1884년의 `갑신정변과 ``三日天下의 金玉均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희대의 혁명아, 탁월한 선각자, ‘담을 것은 많으나 그릇이 작은’ 사람 등등.
김옥균은 참으로 재주 많은 사람이었다. 이율곡의 학문을 숭상했고, 白衣의 정승 유대치의 사상을 이어받았고, 문장, 시, 글씨, 그림, 음악에 이르기까지 능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춤과 노래가 일품이었고, 육자배기가락으로 머슴들과도 잘 어울렸다.1872년 알성시에 장원급제한 후 개화사상을 가진 동지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갑신정변이 三日天下로 끝난 후 일본에 도망가 있을 때 그는 글씨를 팔아 끼니를 떼우기도 했다. 실패한 지도자를 반기는 나라는 없는 법. 그는 북해도에서 춥고 배고픈 유배생활을 했는데, 그의 명필을 구하러 오는 일본인이 많았다.
그의 바둑실력도 도움이 되었다. 일본 고관대작들이 `그를 ‘사범’으로 모셨다. 실패한 혁명가의 실낱같은 목숨을 그나마 지켜준 것은 그의 `다양한 재주 덕분. 일본 바둑史에 김옥균 이름 석자가 올라 있다.
김옥균을 혁명가로 만든 것은 일본이었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은 영국을 따라잡자며 선진 과학기술을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김옥균도 눈을 뜨고 “조선은 프랑스를 배우 따라잡아야 한다” 고 외쳤다.
개화정치 실패후 민비 중심의 親淸 수구세력이 권세를 잡자 김옥균은 `대역죄인이 되고, 그가 망명한 일본에도 자객 4명이 들어와 있었다. 결국 그는 이일직과 홍종우에 의해 상해 한 여관에서 살해되고 그 시신은 한강가에서 갈갈이 찢겨졌다.
김옥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혁명동지들과 생사를 같이하지 않고 일본으로 도망간 비겁자”란 것과 “국가를 통치할 그릇이 못되는 단순 이상주의자”란 것과 “자신의 능력을 過信하는 오만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를 일컬어 才勝薄德, 재주는 많으나 덕이 모자라는 사람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재주는 많으나 덕이 많이 모자라고, 오만에 빠져 `제 그릇 작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권력자가 많은 나라가 발전하는 예는 드물다. `큰 통치자는 ‘머리’를 빌릴 것이 아니라 `‘그릇’을 찾아다니는 법이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