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영 선 <경주초등 교사>

내 고향에서는 가까운 이웃 아저씨를 아재라고 부른다. 척간이 걸리기도 하고 먼 친척뻘이 되기도 하는 낯설지 않은 호칭이다. 아재를 아저씨라고 부르면 그 어감 때문에 어쩐지 남처럼 느껴진다. 아재는 결혼을 했건 미혼이건 상관없이 붙여지는 호칭이다. 그런데 아저씨보다는 어쩐지 좀 친근하고 마음을 터놓고 지내어도 허물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아재가 ‘아저씨를 낮춰 부르는 말’이라는 사전적 풀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무논이나 못둑 같은 습기 찬 곳에서 노란 미나리아재비꽃을 볼 수 있다. 미나리와는 생긴 모습이 많이 다른데 물을 좋아하여 물기가 스며 나오는 곳에 산다는 점이 같은 정도다. 그런데 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일까? 어쩌면 이웃집 아재처럼 친척이 아니라도 친척처럼 가까워 들일을 도와주고 집안 대소사에 빠지지 않고 몸수고를 해 주며 한 식구처럼 가까이 지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외가를 진외가라 부르는데, 늙은 아버지에게 외가가 있고 누이가 있다는 것이 생소했던 어린 시절, 달구지를 끌던 윗마을 아재가 집에 들르시면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마을 구판장으로 심부름 갔던 기억이 아련하다. 주름이 밀리는 얼굴을 마주하고 오일장이면 얼굴을 마주하고 파안대소하던 아버지의 외사촌 동생이었다.

살림살이로는 지금보다 풍요롭지 않았지만 마음은 풍요롭고 사람 노릇을 하며 살았던 시절엔 동네 어른들이 어르신 아니면 아재로 통했다. 어르신은 좀 어렵고 거리감이 느껴지지만 아재는 굳이 격식을 갖추지 않아도 흉허물이 되지 않을 사이였음이다. 동네 아재도 아재요, 친척집 아재도 아재였다. 이모아재, 고모아재, 외아재로 부르던 어른들이 어느새 빈 자리로 남았다.

아버지를 아부지라 부르면 따뜻해지는 것처럼 오촌이나 칠촌을 아재라 부르다보면 사투리 속에 녹아있는 끈끈한 정이 가슴에서 가슴으로 오간다. 아지매도 마찬가진데 아지매 중에서도 그 중 으뜸은 외아지매이다. 외가가 한 동네라 자주 얼굴을 접한 까닭도 있겠지만 언제나 반색을 하며 따뜻이 맞아주던 그 정 때문일 것이다. 방학이면 외가에 놀러가 하룻밤 자고 오는 영광은 못 누렸지만 그래도 외가가 좋고 외아지매가 무턱대고 좋았다.

먹고 살 만 하니까 사람 사이가 자꾸 멀어지는 듯하다. 시골을 떠나 도회지로 나와 살게 되면서 처음엔 이웃의 간섭과 관심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 홀가분했었다. 해가 뜨면 낮잠은 고사하고 대문을 활짝 열어젖혀두고 살아 사생활을 침해받기도 했던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자꾸 외로움을 타게 된다. 정 때문일 것이다. 굳이 나를 내보이지 않아도 뿌리까지 속속들이 나를 꾀고 챙겨주던 이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 이웃을 만드는 것도 생각처럼 쉽지 않고 속내를 내보일 만큼 허물 없는 사이도 아니고 보면 아재나 아지매라 부르며 드나들던 마음의 빈 자리가 없어 쓸쓸할 때가 많다. 다들 무슨 일인가로 빽빽하고 또 뻑뻑하다. 늘 차린 모습들이라 스며들 틈이 없어 보인다. 지금도 고향 사람을 만나면 반가운 것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동질감 때문일 것이다. 아래 윗대를 다 알아 그 근본을 다 아니, 속고 속이는 일이 없고 또한 가식이 없어 좋다. 도회지풍 옷차림을 했지만 어느 샌가 입에서는 고향 사투리가 쏟아진다.

미나리아재비꽃을 마주하고 있자니 오일장이면 시오리길을 걸어 장에 나가 안부를 주고받던 투박하지만 정답던 얼굴들이 떠오른다. 젊은 사람들이 사라져가는 고향은 이제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 혼자 버티기가 어려운 듯 하다. 누군가 손을 잡아주든가 아니면 홀로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줘야 할 것처럼 위태롭다.

다 낡은 집처럼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기에 다들 살아남으려 몸부림치고 있다. 이젠 고향에 가도 엄마도 아부지도 계시지 않는다. 아재도 늙었고 아지매도 늙었다. 마음이 드나들던 고향의 빈 집 한 채 밑그림처럼 내내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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