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청시대, 낙동강을가다 - 7.청송 용전천

▲ 청송 용전천의 명소 현비암에 조성된 인공폭포에서 시원한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2, 3일 청송에서 수달래축제가 열린다. 주왕산을 붉게 물들이는 진달래보다 진한 수달래 꽃을 소재로 한 축제로 올해 29회째다. 청송지역은 주왕산을 비롯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외지에서 들어가기에는 지형이 험하다. 산림이 82%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곳에 들어와 살다보면 인심이 좋아 떠나기 싫어하는 고장이라는 것이다. 고원지대라서 바람이 차 사람이 살기에 열악하다는 것은 옛말이다. 요즈음은 기후온난화로 그리 춥지는 않은 곳이 됐다.

기후는 변해도 산수(山水)는 그대로다. 청송의 빼어난 자연환경을 이용한 것이 한동수 군수 취임 이후 2011년 지정받은 청송(부동·파천면) 국제슬로시티다. 군정목표의 하나인 '휴양 청송'답게 힐링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슬로시티는 '유유자적한 도시, 풍요로운 마을'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치타슬로(cittaslow)의 영어식 표현이다. 전통과 자연생태를 슬기롭게 보전하면서 느림의 미학을 추구해 나가는 도시라는 뜻으로 1999년 시작됐다. 인구가 5만 명 이하이고, 도시와 주변 환경을 고려한 환경정책 실시, 유기농 식품의 생산과 소비, 전통 음식과 문화 보존 등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담양(삼지천마을), 예산(대흥), 전주(한옥마을), 남양주(조안), 상주(함창 이안 공검), 영월(김삿갓면), 제천(수산) 등 12곳이 슬로시티다.

청송의 산수가 낳은 현대의 주산물은 사과다. 일교차가 커서 육질이 단단하며 당도가 높아 '꿀사과'라고 불린다. 지난해 약 2천700 농가가 연간 1천61억 원을 생산했다. 자연이 만든 명품 '청송사과'는 전국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2015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대상' 사과브랜드 부문 대상으로 선정됐다. 3년 연속이다. 청송사과가 단 것은 물 좋은 이곳 수질과도 무관치 않다. 물 좋은 지역엔 약수가 없을 수 없다. 청송읍 소재지에서 3㎞가량 떨어진 부곡리 괘천에는 청송의 명물 달기약수가 유명하다. 탄산수여서 고혈압, 당뇨, 위장병, 피부병에 좋다고 한다.

슬로시티 청송 땅을 적시는 두 개의 큰 하천이 있다. 용전천과 길안천. 그 중에서도 용전천(龍纏川)은 청송군의 파천면·청송읍·부남면 일대를 흘러 파천면 어천리에서 반변천으로 합수한다. 군에서는 유로 연장이나 유역면적이 가장 큰 하천. 주산천, 괘천, 마평천, 노부천 등 9개 소하천들이 용전천으로 흘러들어온다. 용전천은 옛 문헌에는 파천(巴川), 남천(南川), '읍전천(邑前川)'으로 기록되어있다. 청송 읍내 앞으로 흘러가는 하천이라 해서 '읍앞내'라 하기도 한다. 용전천은 해방 이후 하천 지명을 정비하면서 청송읍 덕리 용전암(龍纏岩)에서 딴 이름이다.

▲ 한 노인이 용전천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다.


부남면 화장리 저수지를 관통하는 노부천 물이 약 3㎞를 흘러내려오다 병암서원 앞을 지나며 절경을 만들고 구천리에서 용전천에 합류한다. 이 서원은 청송 고을 산골 선비들의 정신적 구심처였다.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병암의 선경을 안고 있는 곳에 있는 이 서원은 1702년 청송부와 유림에서 건립하여 사액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가 1882년에 복원되었다. 율곡 이이와 사계 김장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남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경상도에서 노론과 기호학파의 뿌리인 율곡과 사계와 인연을 맺은 것이 특이하다. 율곡이 말년에 몸이 아파 경치 좋은 병암에 사계와 함께 휴양차 다년간 것을 기념하여 서원을 건립했다고 한다. 이 서원 출신들이 후일 청송 의병을 이끈다.

서원 앞 병암에는 다른 지방보다 늦게 찾아온 봄 내음이 가득하다. 버들 강아지의 꽃망울이 귀엽다. 냇가에 둘러있는 버드나무 줄기의 물오른 마디가 봄의 싱그러움을 말해준다. 물이 아홉 구자를 그리며 흘러간다.

용전천이 청송읍을 지나는 곳에 섶다리를 복원해 놨다. 최성달 작가는 "조선시대 세종 10년(1428년) 청송읍 덕리 보광산에 위치한 청송심씨의 시조묘 전사일(奠祀日)에 용전천에서 물이 불으면 관원과 자손들이 건너지 못할까 걱정해 소나무가지를 엮어 만든 것이 섶다리의 시초"라고 말한다. 청송군은 물길이 얕아지는 10월초에 길이 75m, 섶다리를 놓았다가 이듬해 우수기전 6월말경에 철거하고 있다.

용전천을 따라 외씨버선길이 지난다. 옛 청송군 관아 객사인 청송읍내 운봉관에서 청송한지체험장 간 11.5㎞. 외씨버선길은 청송 주왕산국립공원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지나 영월 관풍헌에서 끝난다. 전체 구간의 거리는 200여㎞.

 

▲ 하늘에서 바라본 청송읍 청운리 전경.


청송읍 전통시장 건너 용전천변에는 수달생태공원이 있다. 수달은 청송군을 상징하는 군동물로 1급수의 청정지역에서만 산다고 알려져 있다. 주왕산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흐르는 용전천 상류에는 지금도 수달이 물장구를 치며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용전천이 청송읍을 지나면서 진보 방향으로 가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청송심씨 집성촌 파천면 덕천리. 입구 개울가에 늙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마을 손님을 맞는다. 그중 99칸 큰집이 송소 심호택의 집이다. 9대 내리 만석꾼이었다는 이 '심부자집'은 12대 만석꾼이었다는 경주 최부자집과 함께 경상도에서 이름난 부호 집안이었다.

고려말 역성 혁명 앞에 운명을 달리한 용감한 청송심씨 두 형제의 얘기가 이채롭다. 묘하게도 형제간에 새 왕조 창업 앞에 길을 달리했다. 심덕부(沈德符)는 요동정벌군 장수로 위화도 회군에 참여한 조선 개국공신이다. 조선시대 정승 13명과 왕비 4명을 배출한 청송심씨의 화려한 벼슬은 한양에 입성한 그의 덕택이다. 반면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외치며 이성계의 왕위찬탈에 등을 돌리고 두문동으로 들어간 72현 중에 한 분인 전리판서(정2품) 심원부(沈元符)는 그의 동생이다. 여말 역동의 시기 우왕, 창왕, 공양왕을 섬긴 충신이다. 후손들에게 조선 조정 벼슬길에 나서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그 후손들은 청송 풍천 의령 등 경상도 일대에 흩어져 살았다. 고을세가 약한 청송이 도호부(都護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청송심씨인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를 기리기 위해 세조가 부(府)로 승격시켰다는게 심명택 전 청송문화원장의 얘기다.

 

▲ 외씨버선길걷기 참가자들이 용전천 돌다리를 건너고 있다.


덕천리 앞에 흐르는 신흥천을 따라 올라가면 2007년부터 가동되어온 청송 양수발전소다. 전력수요가 적은 심야전력을 이용해 하부댐의 물을 상부댐으로 끌어올린 뒤 저장해 전력수요가 많은 낮 시간과 여름철 피크시간대에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이 발전소 주변지역 주민들은 발전소측이 매년 지원사업(올해도 2억6천만원 예산)으로 혜택을 본다는 것이 군청 건설담당자의 얘기다.

청송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의병 유공 선열을 많이 배출한 충의(忠義)의 고장이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등록된 전국 의병유공자 2천122명(2013년 기준) 중 청송출신이 86명으로서 전국 시·군 중 가장 많음을 청송인들은 자랑스럽게 여긴다. 퇴계 이황선생의 우국충절의 선비정신이 의병정신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한다. 퇴계(退溪) 선생의 관향이 청송의 진보(眞寶). 임란 초에 퇴계, 남명 두 선생의 후학들이 대거 의병으로 참가한다. 의병승장 이었던 사명대사 또한 주왕산 대전사에서 의병을 훈련 한 것으로 전해진다.

1895년 10월 일본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병자년 개항 이후 쌓여온 반왜의식이 반왜 의병투쟁으로 바뀌면서 청송지역에서도 의병활동이 일어난 것. 1986년 청송의진, 진보의진, 산남의진이 그 의병활동이다. 청송의진은 1896년 3월 12일(양력) 결성되어 16일에 창의(倡義)의 깃발을 들었다. 1896년 1월 16일(양력)에 창의한 구한국 의병운동의 효시지역으로 알려진 안동보다 두 달 늦게 일어났던 것이다.

이들 의병의 활약상은 의병기념관에 전시된 '적원일기(赤猿日記)'와 '영야음(營夜吟)'에 생생히 기록돼있다. 영야음은 밤에 병영(兵營)에서 시를 읊음이라는 것. 적원일기는 청송의진의 활동을 남긴 일기식의 진중 기록물로서 의진이 결성되기 직전인 1896년 3월 2일(양)부터 의진이 '분진'하는 5월 25일(양)까지 85일간에 걸친 기록이다. 의진의 활동내용을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긴 예는 제천의병과 더불어 청송의병이 대표적이다.

2011년 용전천이 내려다보이는 부남면 언덕에 지은 항일의병 기념관에서는 멀리 주왕산을 비롯해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떨쳐 일어선 의병들의 기개와 함께 이를 후원해야만 했던 청송 일대 백성들의 혈(血) 고(膏) 루(淚)가 지금도 가득한듯하다.

김정모 서울취재본부장
김세종 기자 kimsj@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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