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울분 과거서 벗어나 현재에 대한 자신감 생겨야 사랑하는 한일관계 원년된다

▲ 최재목 시인·영남대 철학과 교수
'친하다'는 말이 왜 이상한가. 친구, 친애, 친밀, 친절…처럼 '친(親)' 자가 들어간 말에 거부 반응을 느낄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 '친' 자가 유독 이웃나라 일본의 '일(日)' 자 앞에만 붙으면 사달 난다.

우리 기억속에 일본은 임진왜란, 일제강점의 치욕으로 해서 불편한 대상이다. 독도나 위안부를 둘러싼 일본의 태도에 수시로 국민감정은 들끓는다. 하여 우리에게 일본은 아직도 상처와 아픔만 주는 불운의 존재이다. 일본의 우경화와 혐한 세력의 득세는 일본에 대한 우리의 친밀감은 수시로 지워진다. 그럴수록 '친일'이란 말에 소름이 돋는다. 평소 잘 쓰던 '친' 자가 불편해진다. 과거나 지금이나 한 인간을 매국노로 몰아붙일 작정이라면 친일, 친일파라는 낙인을 찍는다. 정쟁을 하다가 이 카드를 꺼내 들면 멀쩡한 인간과 그 이력이 순간 형편없이 구겨진다. 친미니 친중이니 하는 말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 그 파괴력은 가히 천문학적이다.

우리 현대사에 하나 더 있다. 정적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우는 매카시즘인 '친북'이란 말이다. 우리 역사가 만든 불온한 '친' 자이다. 그 보이지 않는 손에 악수를 할 글자는 무엇일까. 메르스에 감염된 것처럼 '친' 자가 붙어 이념적, 사상적으로 격리되는 일이 많다면 불행이다.

돌이켜보니 우리 역사에 '친' 자를 꼬투리 잡았던 기억이 더 있다. '대학'이라는 책 첫머리에 나오는 '친민(親民)'이다. '대학'이란 책은 본래 '예기'라는 텍스트 속에 기껏'대학편(大學篇)'이라는 한 챕터로 꽁꽁 숨어 있다가 운 좋게 발굴된 것이다. 정주학에서는 이 '친' 자를 새로울 '신(新)' 자로 바꾸어서 '신민(新民)'으로 읽는 관례를 만들었다. 정주학을 숭상한 조선사회에서는 이런 주장을 금과옥조로 여겼지만 사실 그것은 날조이다. 여기에 정당한 이의제기를 한 사람이 있었는데, 왕양명이다. 이후 양명학 계열에서는 원 텍스트에 '친민'으로 되어있으니 그대로 읽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맞섰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정주자학의 권위와 횡포로 불온사상으로 찍힌다.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다시 과거사가 문제다. 주위에는 '기억 지우기' '생각 버리기'니,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여기를 살아라!' '현재를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등의 주장이 넘친다. 그런데 유독 한일 관계에서만은 이런 어휘나 슬로건들이 맥을 못 춘다.

현재 속에 너무나 많은 과거의 살이 달라 붙어있고, 또 과거 속에는 너무나 많은 미래의 근육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전진하려니 짐 때문에 자꾸 미끄러져 내리고, 후진하려니 갈 길이 너무 멀다. 머뭇머뭇…답답한 한일 관계.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라고 딱 잘라 말하고 현재를 사랑하는 한일 관계의 원년을 만들 수는 없는가. 결국 일국주의를 넘어선 양국 지도자들의 통 큰 결단에 기댈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친' 자의 불온감이나 콤플렉스를 툭툭 털고 일어서는 용기는 결국 '현재'에 대한 자신감에서 온다.

그러려면 우리 내면부터 평온해져야 한다. 민족적 울분과 원한을 과거의 탓으로만 환원시키지 않으려는 지성의 힘, 거기서 용서와 관용이 싹 튼다. 그때 비로소 친일의 '친' 자마저 친선경기의 '친' 자처럼 평이하게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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