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선 <경주초등 교사>

도심을 벗어나니 하얀 감자 꽃이 눈에 들어온다. 전원생활을 꿈꾸는 내게 마늘 몇 고랑과 감자 몇 고랑이 집 가까이에 있는 풍경은 거의 환상적이다. 경주 남산이 눈앞에 확 펼쳐진 동네에 집터를 마련한 동료가 참으로 행복해 보인다.

남쪽으론 산자락에서 흘러내려온 봇도랑물이 졸졸졸 앞마당을 돌아 흐른다. 탁 트인 들녘의 벼가 싱그러움을 더하니 절로 생기가 돋는다. 이 곳에 집터를 마련한 까닭도 남산 때문이라니, 그 마음이 내 마음 같아 내 집이 아니라도 즐겁다.

자주 놀러와 내 집처럼 머물다 가면 될 터이니 전원주택을 마련하는 꿈이 아직 멀더라도 괜찮다. 어서 집을 지으라고 부추기며 마당을 한 바퀴 돌아본다. 마당가에 석류나무 몇 그루와 목련나무, 감나무가 집터의 흔적이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마당보다 깊은 예전의 흙집은 얼마 전에 무너뜨렸다고 한다. 머잖아 이 공터엔 새 주인의 기호에 어울리는 집이 들어설 것이다. 주위에 아직 공터가 남아 있어 이웃으로 들어와 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흙 마당인지라 고추 포기가 심어지고 파밭이 만들어지고 열무도 제법 모양새를 갖추어 자라고 있다. 아욱이 담장 가에서 손바닥 만하게 자라고 있다. 마당에서 골라낸 돌무더기들이 마당과 텃밭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주인처럼 소박한 경계다.

나의 꿈은 마당 있는 집에 사는 것이다. 촌락의 흐름한 집 한 채 얻어 사람답게 살다 가는 것이 요즘의 내 꿈이다. 문 밖에 계절이 지나가는 소리를 온 몸으로 느끼며, 간간이 뻐꾸기 소리가 들리는 산자락 양지쪽에 둥지 틀어 살고 싶다.

이슬이 걷히기 전에 논두렁길 한 바퀴 돌아오면 아침이 열리는 그런 고즈넉한 마을에서 자연이 들려주는 시를 받아 적으며 살고 싶다. 오래된 감나무가 있다면 그 아래 살평상을 내다놓고, 감잎차를 우려마시며 처연히 살고 싶다.

같이 늙어가는 내 남자가 언제쯤 다래 넝쿨 올린 집을 마련해 줄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는 공구를 늘어놓을 공간을 필요로 하고, 나는 마음껏 책을 어질러 놓을 공간을 그리워한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한 울타리를 마련하는 게 그와 나의 꿈이다.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가운데 아름다운 동행이 되기까지는 넘어야 할 고비가 아직 첩첩산중이다. 그가 날 위해 징검다리처럼 등을 내어주었듯이 나 또한 그를 위해 요긴하게 쓰일 곳이 있기를 갈구한다. 겨우 마음 한 쪽 내어주면서 큰 소리 친 적은 없는 지 돌아보는 날들이다.

감자꽃처럼 얼굴빛만 봐도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그 경지에 가 닿고 싶다. 마당 있는 집에 살게 된다면 감자도 몇 고랑 심고 옥수수도 심어 남으로 창을 내어 살고 싶다던 어느 시인의 시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옥수수가 익으면 놀러 올 이 있다면 그 또한 사는 맛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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