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대표 건설기업 화성산업 창업주 8일 별세…향년 99세

고 이윤석 화성산업 명예회장.jpg
▲ 이윤석 화성산업 명예회장
대구경북을 대표하는 건설기업인 화성산업㈜의 창업주 이윤석 명예회장이 지난 8일 오후 6시 10분 경북대학교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9세.

“세상을 보다 살기좋게, 보다 안전하게 이뤄 나가는 밀알이 되는 기업이 되고자 합니다”

한 평생 우리나라 건설업계와 지역경제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화당(華堂) 이윤석(李潤碩) 회장의 기업경영 철학이다.

화성은 57년 전 건설회사를 창업할 당시부터 기업의 책임을 강조하며 최고의 품질을 위해 부단하게 노력해 온 것이 오늘 날 지방업체로서는 드물게 국내 대규모 건설회사로 성장, 발전하게 된 원동력이 됐다.

그는 일찍이 현장에서부터 잔뼈가 굵어 일제 때는 중국에서 기술을 배웠고 해방뒤 귀국, 6·25전쟁 복구공사를 시작으로 기상관측사상 최대의 피해를 냈던 사라호 태풍피해복구, 농업토목 등 농촌재건사업을 비롯해 국가 근대화사업에 적극 앞장서면서 나 보다는 이웃, 지역, 나라를 생각하며 열정을 바쳐 우리나라 산업화 시대의 산증인으로 불리우고 있다.

이 회장은 건설업을 모태로 사업 분야를 유통, 해양운송, 산업설비, 환경, 철구, PC, 엔지니어링 등으로 크게 확장하는 등 영남지역의 모범적인 기업인이다.

지난 1917년 경상남도 밀양군 무안면 성덕리에서 벽진(碧珍) 이정화(李楨化) 공(公)과 김단금의 3남1녀 중 3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린시절 경주~감포 간 도로공사 현장 업무를 도와준 것이 계기가 돼 평생 건설인의 삶을 살게 됐다.

1939년 만주 봉천(심양)의 건설회사에서 6년간 근무하면서 본격적으로 건설기술을 습득했고, 해방과 함께 1945년 귀국해 8명이 공동으로 삼화토목을 설립, 최연소 사장을 맡아 당시 대구·경북 도급공사의 60% 이상을 수주하면서 영남권 최고의 건설업체로 성장시켰다.

6·25 전쟁 직후 경북도에서 조직한 건설대의 대장 직을 맡아 안동교, 점촌 이안교 등 전쟁으로 파괴된 도로, 교량 복구공사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41세 때인 1958년 대구 동인동에서 자본금 1천 30만원으로 오늘 날의 화성산업을 설립했다.

조화롭고 화목하게 이룬다는 뜻의 ‘화성(和成)’은 2014년 기준으로 전국의 1만1천여 개의 건설 업체 중 172번째로 건설면허를 취득한 것만 보더라도 반세기가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1970년대 국가산업이 농업에서 공업으로 옮겨가는 시기에 전국의 도로, 교량, 항만, 상수도, 공장 건설 등을 주력해 산업근대화에 앞장섰으며, 문화재보존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시기에 수익성 보다는 선조로부터 이어오는 문화재를 보존, 복원하는 것에 큰 의의를 두고 지금은 경상감영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중앙공원 조성공사를 고 건축물과 현대식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도록 완벽히 수행해 전문가들로부터 호평을 듣기도 했다.

2014년 시공능력 평가결과 화성산업(주)은 전국 건설업체 중 47위, 계열사인 (주)화성개발은 전국 98위로, 2개 회사 모두 100위권 안에 진입해 있고, 그동안 수주한 수 많은 공사를 탄탄한 기술력과 시공능력, 품질 제일주의로 신뢰를 쌓아왔으며 특히 재무구조가 견실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지난 1972년 대구 중심지 교동상가아파트 공사비 체불로 인해 뜻하지 않게 유통업에 진출, 동아백화점을 세우게 됐으며 가격 정찰제, 직영 수퍼마켓 도입, 배송센타 설치 등 당시 지방백화점으로는 선진화된 유통업기법으로 제2의 창업이라 할 만큼 큰 성장세로 돌풍을 일으켰다.

외식 문화사업, 수퍼마켓 체인화, 신용 판매제도 도입 등으로 유통혁신을 이뤄내면서 서울에 쁘렝땅백화점 개점, 할인점 진출 등 전국적인 유통업체로 성장세를 이어갔다.

하지만 재벌그룹의 무차별적인 시장 확장, IMF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등의 여파로 유통업에서 철수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본연의 건설업을 더욱 튼튼히 하고 내실화를 기하기 위해 유통업에서 철수하는 용단을 내렸다.

동아백화점은 지역의 유통근대화에 이바지했을 뿐 아니라, 1984년 동아쇼핑 개점으로 지방 최초의 초현대식 문화공간을 제공했다.

당시 지역에 문화공간이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무대공연장, 전시장, 각종 세미나 공간, 공개방송시설, 문화 강좌실, 각종 부대시설 등은 지역문화 예술발전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1988년 기업공개를 통해 지역 기업에서 전국적 기업으로 도약했으며, 70년대 후반 지역에서 최초로 주택건설업자로 지정됐다.

80년대 들어 녹원맨션을 시발점으로 주택사업의 전기를 마련하며 국민의 주거안정을 위해 대구경북 지역은 물론 수도권 신도시개발 등에 적극 참여하며 오늘날의 '파크드림' 브랜드를 성공시키게 된다.

그는 1993년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과 인재양성을 위해 사재 50억원으로 화성장학문화재단을 설립해 매년 장학사업, 환경·문화·예술사업, 불우이웃 돕기 등의 지원활동을 통해 보다 나은 사회, 모두가 함께 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해 왔다.

90년대 후반 명예회장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화성장학문화재단 이사장, 대구시 원로자문협의회, 금오회 등 지역과 사회에 필요한 사회공헌활동은 고령에도 불구, 직접 맡아서 하거나 꾸준히 참여해 노익장을 과시했다.

이와 함께 KAPA(한미친선협회) 회장을 맡아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고 한미친선에 기여하는 민간 외교사절로서의 역할 역시 나라사랑 정신이 바탕이 됐다.

그는 남다른 철학과 지역 경제 및 국가 산업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1981년 석탑산업훈장을, 1987년 산업포장을 받았으며 재무부장관, 법무부장관 표창, 한미동맹 강화에 기여한 공로로 한미연합사령관으로부터 Good Neighbour Award 상을 수상했다.

특히 2010년, 국가채무로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한 서상돈 선생을 기리고 그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제정된 제6회 서상돈상 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당시 수상 소감으로, 103년 전 국채보상운동을 주창하신 故 서상돈 선생의 높은 뜻을 다시 한 번 가슴 속에 되새기면서 “여생을 국가와 사회발전을 위해 더 헌신하라는 뜻으로 받아 들이겠다”고 피력하며 상금 전액을 불우이웃돕기에 기부했다.


이기동 기자
이기동 기자 leekd@kyongbuk.com

서울취재본부장. 대통령실, 국회 등을 맡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