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반을 드리운 푸른 병풍 천인대 옛 선비들이 노래한 삼산이수 천하절경

▲ 낙동강700리 표지석.
▲ 상주보 전경.

조선 시대 조공배들 길목
낙동강 수운 중심 낙동나루터
장터·주막 등 번성 누려

4대강 사업으로 만든 상주보
수려한 경치로 관광명소 부상


낙동강 700리가 시작되는 상주시 사벌면 퇴강리. 강변에 '낙동강 700리'라는 표지석 앞에서 해마다 풍년을 기원하는 지신밟기, 소망기원제와 달집태우기 등 낙동강 700리 희망의 달빛기원제가 연중 행사로 열린다. 지난 2009년부터 매년 개최하고 있다.

아래로 조금 더 내려오면 사벌면의 경천대가 있다. 경천대는 낙동강 물길 중 경관이 가장 아름답다는 '낙동강 제1경'이다. 주변에 천주봉, 울창한 노송숲과 전망대, 1637년 우담 채득기 선생이 학문을 닦던 무우정, 임진왜란의 명장 정기룡장군의 용마전설과 말먹이통 등 명승지와 유적지를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상주시 도남동 강변에 자리잡은 국립낙동강 생물자원관. 12만3천592㎡ 부지에 2만3천458㎡의 건물을 2013년에 지었다. 생물자원의 안전한 보관과 생물자원 증식 자생 야생생물 유전자원 특성연구와 전시 및 체험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경천섬 부근 도남동에는 강변 배경이 운치 있는 도남서원이 있다. '도남(道南)'이란, 북송의 정자가 제자 양시를 고향으로 보낼 때, "우리의 도가 장차 남방에서 행해지리라"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도남서원은 동학운동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동학이 일어나자 그에 반대한 유생들이 조직적인 반(反)동학농민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곳이다. 외서면 우산리에 있는 우산서원에서 1863년 9월 동학 배척통문(排斥通文)을 만들어 이웃 도남서원으로 보냈는데, 도남서원은 경상도 일대의 서원에 통문을 보내 일제히 거병을 호소했다.

상주시청은 앞으로 상주보, 경첨섬, 그리고 드라마 '상도' 세트장과 낙동강 신나루 조성 예정지 사이에 현수교를 설치해 도보와 배로 넘나들며 관광을 할 수 있도록 조성할 계획이다. 도남서원과 경천섬 아래 위치한 상주보는 중동면 오상리와 상주시 도남동사이에 4대강사업으로 만들어졌다. 길이는 335m(가동보 105m, 고정보 230m).

한참 강을 따라 내려가면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다. 의성에서 흘러오는 위천는 삼산이수(三山二水)의 지형이다. 더 내려가면 상주시 낙동면과 의성군 단밀면 사이에 걸친 낙단보가 눈에 들어온다.

과거에는 낙동면 낙동리에 낙동나루터가 있었는데 낙동강 수운의 중심지였다. 조선시대 조공배들의 길목으로 낙동장터와 주막 등이 낙동나루를 끼고 번성했다. 명맥만 이어오다 1986년 강 건너 의성군 단밀면을 잇는 낙단교가 생기면서 사라졌다. 낙단교를 지나면 국도25호선을 잇는 낙동대교가 있고, 바로 위에는 2017년 준공 예정인 상주~영천간 고속도로 교량건설이 한창이다. 옛 절경이 개발로 인해 가려져 아쉬움을 남긴다.

중동면 우물리에 낙동강변에 깍아지른 듯 수직을 이룬 절벽 천인대는 상주 땅이 낳은 낙동강의 마지막 경승지다. 김각(1536~1610) 현감이 지은 '천인대'라는 시다.



모래언덕 솔 두둑에 푸른 물을 베개하여, 계교 늙음을 마치기 위해 도구를 쌓노라, 창 앞에 두 물은 천 길이 합했으며, 하늘 밖 삼산은 한 털같이 떴네, 비낀 날은 강을 건너 절벽에 번득이고, 가는 구름 비를 끌어 긴 물가에 지난다. 세상 만사에 마음 없음이 오래니, 깃 돌 위 한가한 맹세

백구와 한가지 했네.



상주(尙州)라는 이름은 신라 진흥왕 13년(552년)에 군사조직으로 5州에 6정(停)을 두어 상주정(尙州停)이 설치되면서 부터였으니 아주 오래된 이름이다. 상주정은 요즘으로 치면 군단급이다.

상주는 농경문화가 발달된 오랜 농도(農都)다. 연밥따는 노래, 상주민요, 모내기노래, 서보가가 이를 말해준다. 지역의 농사관행을 정리한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는 국가농서격인 '농가집성' 편찬시 기초로 활용되기도 했다. 선사시대부터 농경문화가 시작해 번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벌의 사(沙)는 강의 물과 모래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생달이 뜨도록 힘든 노동일을 하면서 불렀을 상주함창가(공갈못 연밥 따는 노래) 4절이다. '이 배미 저 배미 다 심어 놓고 또한 배미가 남았구나, 지가야 무슨 반달이냐 초생달이 반달이지'



상주는 한 때 큰 고을이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경상도를 관할하는 절도사가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200여년간 경상감영이 있었다. 경상도(慶尙道)는 경주(慶州)와 상주(尙州) 두 고을의 머릿 글자를 따왔을 정도로 상주는 경상도의 뿌리라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 때의 감영은 지금의 도청처럼 행정의 중심지가 아니다. 행정의 중심은 사또 또는 원님으로 불리는 수령이 다스리는 부목군현의 관아다. 감영은 수령에 대한 감찰권 정도만 있다. 임진왜란 때 감영이 불타고 1601년 대구로 옮겼다.

1905년 1월 1일 경부선이 개통되자 수천 년을 이어오던 교통의 대동맥이 수운에서 철도로 바뀌었다. 경부선은 한반도 교통 토목 역사에서 최고 최대의 혁명이었다. 1909년 개통된 경의선, 1911년 개통된 압록강철교와 함께. 상주 역사에 있어서 경상도 감영과 경부선 철도는 운명의 여신처럼 사라지고 다가왔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와 공업화시대 한 세기 동안 낙후된 상주는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상주는 경지면적이 2만6천187ha에 달해 경북에서 제일 넓다. 농업이 기간산업이다. 상주시 전체 인구수 104만1천820명중 농업인은 3만8천508명(36%)에 달해 농업비율이 전국 상위권에 달한다. 생산물도 곶감은 전국시장의 60%를 차지하고 있고, 오이, 양봉, 육계는 전국 1위다. 이와 관련, 이정백 상주시장은 "상주는 농산물 총생산 조수익이 연간 1조2천억원을 넘는다. 연 1억 이상 고소득 농가가 1천200여 호나 되어 농사만 지어도 잘사는 농업 도시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풍요롭고 부유한 농촌 비전을 밝혔다.

누구나 어디나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상주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이 살길이 아닌가 싶다. 상주는 국내 최초 국가지정 논습지 및 람사르 습지 등록을 앞두고 있다. '귀농 1번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폐교된 농업고등학교를 부활시켜 농부를 길러내는 전문 농고로 만들 면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상주는 지형이 배다. 무학대사는 행주(行舟)형이라고 했다고 한다. 행운을 불러오는 길지다. 평양 부여 공주가 대표적이다. 짐을 가득 싣고 오가는 배를 멀리서 보면 아름답고 푸근하다. 21세기는 바이오농업시대다. 풍요를 가득 실은 새로운 상주호를 기대 해본다.

김정모 논설위원
김정모 기자 kjm@kyongbuk.com

서울취재본부장으로 대통령실, 국회, 정당, 경제계, 중앙부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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