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어린자식 품에 안고 있는 듯한 형국 '옥룡사지'

▲ 양동주 대구한의대 대학원 겸임교수

전라남도 광양시내에서 북쪽으로 지방도를 따라 약 25㎞ 떨어진 곳(광양시 옥룡면 추산리)에 옥룡사지(玉龍寺址 사적 제407호)는 백두대간의 마지막 성봉인 지리산을 태조산으로 하여 산맥이 마치 연 꼬리가 춤을 추듯 힘차게 용트림하면서 달려와 섬진강을 건너며 잠시 쉬는 듯 하다가 다시 용트림하여 솟구쳐 오른 산이 백운산이다.

백운산을 주산으로 하여 용맥이 다하고 물을 맞이하는 그런 자리에 터를 잡은 곳이 바로 옥룡사 터이다. 주차장에서 옥룡사지까지 올라가는 계곡 양쪽은 물론 옥룡사지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동맥나무숲은 마치 절터의 울타리 같다.

주변의 다른 잡목들과 확실히 구별돼 한눈에 조림된 숲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곳 동백나무 숲은 신라 말 경문왕 4년(864) 고승이자 한국 풍수지리설의 대가인 선각국사 도선(道詵 827∼898)이 옥룡사를 지으면서 이곳의 땅 기운이 약한 것을 보완해 비보(裨補)하기 위해 심은 것이라고 한다(천연기념물 제48호).

도선 국사의 탄생설화에는 신라 말 전라도 영암 월출산 기슭에서 태어난 스님의 속성은 김씨(金氏)라고 하는데, 어머니 최씨는 처녀가 아기를 낳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아기를 바위에 버렸더니 비둘기들이 날아와서 아기를 감싸주는 것을 보고 비범한 아기가 아니라 생각하고 길렀다고 한다.

하지만, 미혼모가 아기를 낳았다고 하는 설화는 스님의 출신이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암시하며, 먼 훗날 스님이 명성을 떨치게 되자 마을이름을 도선 스님의 출생 설화를 뜻하는 '비둘기 숲'이라는 의미의 구림(鳩林)이라 고쳤다고 한다. 구림리는 백제시대에 일본에 한문을 전해준 왕인 박사의 고향이기도 하다.

아무튼 도선은 15세에 구례 화엄사에 출가해 불법을 배우고 24살 되던 850년 천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는데, 그 후 전라도 곡성 동리산 태안사(太安寺)에서 선종 9산문 중 하나인 동리산문 시조인 혜철선사(惠徹禪師)에게서 법문을 들은 뒤 크게 깨우쳐 중국 남돈선(南頓禪)을 기초로 불교의 지덕사상에 바탕을 두면서도 신라 토양에 맞는 풍수지리설을 개발했다.(2015.05. 남원 실상사 참조)

1100여 년 전에 도선국사는 왜 이곳에 절터를 잡았으며, 스님이 남겨 놓은 옥룡사지 얼마나 명당일까 하는 호기심이 옥룡사지로 필자의 발길을 향하게 하였다. 옥룡사지 입구에는 주차장과 숲 해설사가 머무는 안내소가 있으며 옥룡사지를 알려주는 안내판만 있었으며, 백운산자연휴양림과 함께 소개되고 있는 '도선 국사 천년숲길'이라는 등산로 안내판을 따라 좁은 길을 들어서니 안내를 담당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으나 자세한 설명은 듣지 못했다.

주차장에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왼편에 농가와 비탈 밭만 보이다가 잘 다듬어진 산책로 안내판이 세워진 지점부터 울창한 동백나무 숲길이다. 약 700m쯤 올라간 산중턱에 길이 좁아지면서 돌계단에 올라서면 옥룡사지가 펼쳐지고, 돌계단 왼편의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옥룡사지는 원래 9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커다란 연못이었다는데 용들이 마을주민들을 많이 괴롭히자 도선 스님이 용을 몰아낸 뒤 연못을 메우고 절을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을 간직한 곳이어서 인지 절터 입구부터 물기가 많은 땅으로 보이며 샘물이 솟아나듯 항상 물이 흘러나온다. 느티나무 왼편에 타원형의 작은 연못이 전설을 추억하게 해주는 것 같다. 철지난 칠월의 동백 숲은 짙푸른 동백나무 잎이 하늘을 가리듯 하여 동맥숲속은 온통 컴컴하고 음침한 기분이 든다.

▲ 옥룡사지.

도선국사는 당나라로 유학을 다녀왔다는 주장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고 스님이 37세 되던 864년 옥룡사를 창건한 이후 효공왕 2년(898) 72세로 입적할 때까지 35년 동안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국사의 명성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수백 명이 옥룡사로 몰려오자 부근에 도선사, 운암사 등 4개의 사찰을 더 지었다고도 할 정도였으며, 헌강왕(875~886)도 스님을 경주로 초청하여 설법을 듣기도 했다고 하며 당시 전국의 유명 사찰에 스님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있는데, 충청권에만도 공주 갑사, 마곡사, 당진의 영랑사, 안국사 등 이루다 다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옥룡사는 조선후기인 1878년 화재로 송두리째 소실된 이후 중창하지 못하고, 1996년에야 순천대학교박물관 팀이 처음 지표조사에 나서서 절터와 도선 국사와 통진 대사 부도와 탑비, 그리고 명문 비편 90여점을 확인했다.

옥룡사지 한 가운데에 빛바랜 안내판 하나가 덩그맣게 세워진 것은 해당 관리당국의 무성의로 느껴진다. 오른쪽 나지막한 고갯마루를 넘어가면 근래에 세운 도선 국사의 부도 탑과 비석이 있고 그 왼편에는 수제자 통진 대사의 부도 탑과 비석 등이 있는데, 원래의 탑비들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파손돼 사라진 것을 1996년 순천대학교박물관 팀의 지표조사 후 조선 성종 때 서거정 등이 편찬한 시문집인 동문선(東文選)에 남아있는 탁본을 보고 복원한 것이다.

부도탑 아래 산기슭에는 큼지막한 금빛 나는 부처 입상을 배경으로 중창중인 운암사의 대웅전, 약사전, 명부전, 관음전 등이 있는데, 이 절은 1969년부터 중창 중에 있다.

▲ 선각국사 도선 증성혜등탑.


중국의 풍수설이 음택(陰宅: 무덤)위주이었으나, 도선은 땅의 힘으로 나라의 흥성과 국민의 이익을 가져온다고 하는 양택(陽宅: 사람이 사는 절이나 집)이론을 펼쳤다. 땅 기운은 생물처럼 살아 움직여서 왕성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한다고 보는데, 쇠퇴한 곳에 나라나 사람의 집터를 정하면 망한다는 것이다.

명당의 기운이 풍수지리학적으로 완벽한 곳은 그러하지 않겠지만 완벽하지 못한 곳에서는 양기가 소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람의 몸에 옷을 입어 한기를 막아 보호하듯 산천의 허약한 곳에 절이나 불탑을 지어서 땅의 기운을 보완할 수 있다는 사찰비보풍수(寺刹裨補風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나말 여초 신라의 쇠망을 가져오고 새 나라의 출현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했다.

스님이 입적하자 효공왕은 요공국사(了空國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그의 저서는 도선비기·송악명당기·삼각산명당기 등이 있다.

그의 이론은 제자 경보, 지문스님 등에게 전해졌다. 도선 국사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고려 태조 왕건(877~943)이 임종하기 한 달 전 병석에 누워서 대광 박술희에게 왕위를 계승할 자손에게 훈요십조(訓要十條), 신하들의 도리를 준수할 것을 계백료서(誡百僚書)를 각각 남긴 것에 도선 국사가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선 국사는 왕건이 태어나기 30여 년 전 개성의 거부 왕융을 찾아가 새 임금이 태어날 것을 예언했다고도 하지만, 후에 직접 왕건에게 불법을 전수했는지에 관해서는 자료가 없다. 하지만, 태조가 남긴 훈요십조 제2항에서 도선 스님이 비보사탑지로 지정한 곳 이외는 일체 사탑을 짓지 말도록 명할 정도였다고 하니 스님의 풍수지리설이 얼마나 널리 굳건하게 신봉되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 후 현종은 도선 스님에게 대선사를, 숙종은 왕사,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 시호를 각각 추증했는데, 신라의 승려로서 고려시대에 국사로 추증된 사람은 원효, 의상, 도선 3인 뿐이다. 고려 말 굉연(宏演) 스님은 '고려국사 도선전'을 저술하여 비보사탑설을 체계화했다.

▲ 옥룡사지에서 바라본 동백림.


옥룡사지의 용세를 풍수지리적으로 살펴보면 크게 백두대간 용맥이 지리산(1,915m)에서 끝을 내었다고 볼 수 있으나 지리산은 그 지맥들이 불꽃이 일어 하늘로 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光자의 모습이다.

북쪽으로는 삼정산(1,182m)를 가운데 두고 좌우로 크게 용맥이 뻗어나가 좌로는 인월면 우로는 금서면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토지면과 악양면으로 크게 뻗어나간다. 지리산에서 서남으로 이어지는 용맥은 제석봉→장터목대피소→연하봉→화장봉→삼신봉→촛대봉까지 한걸음에 달려오고 이곳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세석평전을 거쳐 영신봉에서 북과 서로 크게 가지를 내어 용맥을 내어주고 남으로 뻗어나간 용맥이 거사봉을 거쳐 형제봉(1,115m)을 성봉했는데 이 봉우리가 악양면의 주산(主山)이 된다. 산맥 즉 용맥은 물을 만나면 건너지 못한다는 풍수이론이 있으나 이것은 용맥의 흐름이 끊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용맥의 흐름이 멈춘다는(界水卽止) 뜻으로 이해해야한다.

용맥은 강이나 바다도 건너 이어진다는 것으로 은맥(隱脈) 혹은 잠룡(潛龍) 즉, 땅속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리산과 옥룡면의 주산이 되는 백운산(1,212m)과의 사이에 섬진강이 흐르고 있으나 큰 용맥의 흐름은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필자의 풍수지리적 해석이다. 용맥은 섬진강을 지나면서 잠시 쉬어 힘을 비축하고 다시 크게 일어나 백운산에서 서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크게 한번 용트림해 신선대를 거쳐 또아리봉까지 단숨에 내어 달리고 도솔봉으로 방향을 바꾸어 남서쪽으로 이어지고 이곳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어나가는 용맥이 옥룡면지를 이루는 주룡맥이 되는 것이다.

용맥이 힘차게 꿈틀거리며 달려오는 가운데 왕성한 기운은 점점 낮은 지세로 변화해 여러 지맥을 내어 곳곳의 마을 양택지를 만들어 주고 중심용맥은 옥룡사지로 이어져 좌우 청룡과 백호맥을 만들어 어머니가 어린자식을 품에 안듯이 닭이 알을 품듯 한 형국과 지세를 만들었다.

신라 말 고려 초 새로운 시대사상이었던 풍수지리설은 자연과 인간은 동일하다는 만물일원사상 내지 전통 민간신앙과 결합되어 부지불식간에 한국인의 고정관념이 됐으며 현대에 까지 풍수지리학은 계속 연구되고 발전돼 왔으며, 영남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정규과목으로 선택돼 많은 풍수지리학자가 배출되고 있다.

어리석은 중생들은 손가락으로 먼 산을 가리키면 산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바라보듯 도선 국사가 동백나무를 심은 깊은 뜻은 알지 못한 채 붉은 동백꽃만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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