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령들 선산분지 살찌운 김천의 젖줄…봉화산 골짜기 바위 틈 마르지 않는 용천수

▲ 김천시내를 관통하는 감천 전경.

김천시 대덕면 봉화산 해발 800m에는 옹달샘(너드렁 상탕)이 있다. 낙동강 지류인 감천(甘川)의 발원지다. 시는 1999년 이곳에 표지석을 세우고 '감천발원제'를 올렸다. 김천시와 경남 거창군을 경계로 하는 우두령에서 시작한다. 거창장에서 지례장을 잇는 길목으로 소들이 지나 다녔던 고개가 '우두령(牛頭嶺)'이다.

대덕면 봉화산은 백두대간 자락에 있다. 백두대간 서쪽 신라와 백제의 국경으로 유명한 '나제통문(羅濟通門)' 부근인 무풍지역(현 전북 부주군 설천면)은 도경계를 넘지만 김천의 이웃이다. 경상도 언어와 풍습에 가깝다고 한다. 고려 성종(981~997) 때 전라도로 편제되기 전까지 경상도의 일부여서일 것이다.

'너드렁 상탕'에서 시작한 물줄기는 대덕천, 감호천, 구남천, 부항천, 무릉천, 하원천과 합류한다. 조마면에 이르러 강곡천과 대방천을 보듬어 내려가 김천시 신음동 속구미에서 직지천과 합쳐지면서 물길이 커진다. 북동쪽으로 흐르면서 율곡천, 송곡천, 연봉천과 함께하고, 구미시 무을면에서 대천과 합쳐진 후 선산읍 원동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감천은 길이가 69㎞(170리)로 김천 구미 등 2개 도시에 걸쳐 있고 유역 내에 17만 명의 주민이 산다. 김천시 북동부에서 개령들을 이루고 일대에 기름진 선산분지를 만들었다. 감천변의 넓은 들은 김천과 선산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김천은 전국 생산량의 18%로 생산량 1위를 차지하는 자두로 유명하다. 전국 생산량의 10%인 포도(3위)와 감자 참외 등도 전국적인 명성을 거머쥐었다.

김천과 선산을 유유히 흐르는 감천의 주변에는 신라 불교와 유교의 성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417년 선산에 신라 최초의 사찰인 '태조산 도리사'를 지었다. 신라가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527년(법흥왕 14)보다 110년 앞선 것. 직지사는 아도화상이 황악산을 가리키며 "저 산 아래에도 절을 지을 만한 훌륭한 터가 있다"고 하여 곧을 직(直)과 손가락 지(指)에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선종의 가르침인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旨人心 見性成佛)'에서 땄다고도 한다. 직지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왜국까지 건너가 포로를 송환하는데 큰 역할을 한 사명대사의 출가사찰이다.

고려 말 유학자 길재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선산(금오산)으로 낙향해 후학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하위지, 생육신인 이맹전을 비롯해 한국 최초의 '농사직설'을 저술한 정초와 김숙자·김종직 부자, 김굉필, 박영, 장현광, 구(舊)한국 의병 허위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곳이다.

감천은 여러 인물을 낳고 키웠다.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1503)는 1481년 왕명을 받아 승(僧) 의침과 함께 당나라 두보의 시를 언해했다, 이것이 '두시언해(杜詩諺解)'의 초간본으로 고문과 고어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무오사화로 유배된 의주와 순천에서 유배가사의 효시인 '만분가(萬憤歌)'를 집필했다. 김천문화원에서 1980년부터 매계 고택 터인 율수재에서 '매계 백일장'을 열고 있다.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1929~2002)도 김천 봉산면 신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19대조 정종소도 성균관 사성을 지냈으나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낙향하였고, 18대조 정이교도 사헌부 장령, 홍문관 교리는 무오사화로 화를 당했는데 그 역시 79년 12.12군사반란으로 화를 당했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계엄사령관이된 정승화는 12월 12일 군권을 탈취당하기 전까지 당시 정국의 중심에 섰다. 언론인을 육군본부로 초대해 차기 대권을 둘러싸고 국민의 관심이 쏠린 3김에 대해 평가한 말이 당시 정국을 강타했다. 즉 "김대중은 사상이 의심스럽고, 김영삼은 무능력하며, 김종필은 너무 부패했다"는 것이다.

최석채(崔錫采·1917-1991)는 조마면 신안리 출신. 1946년 경북신문을 거쳐 부녀일보 편집국장 시절 기사로 구속됐다 풀려났다. 대동청년단 경북도정치위원장을 지내고 이승만 정권에서 성주 문경 영주 경찰서장을 지내다가 6·25전쟁 중 사임했다. 대구일보 편집부국장으로 언론에 복귀. 매일신문 주필 시절 필화(筆禍)로 30일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조선일보 경향신문에서 논설위원 편집국장을 지냈다

김천시 지례면의 감천 기슭에는 지례현감 이채(李采·1745~1820)가 축조한 '방천(防川)제방'이 있다. '이공제(李公堤)'로도 불린다. 1790년 당시 전국적으로 엄청난 홍수피해를 입으며 쑥대밭이 된 지례현감에 부임, 지례현 중심을 감싸는 1㎞의 제방과 방천제방 뒤편 지례장터와 관아를 중심으로 '사이둑'('새뚝')으로 2중 제방을 쌓았다. 농민요 '축 다지기 노래'(일명 장천다지기 노래)가 나온 배경이기도 하다. 100여년 뒤 1936년 병자년 수해에 떠내려가 일제에 의해 다시 축조됐다.

감천 상류 지례면은 조선시대부터 '지례돈(知禮豚)'이라는 토종 흑돼지 산지로 명성을 날렸다. 조선총독부가 발간하는 잡지에도 등장한다. 다른 돼지고기와 달리 껍데기와 비계를 그대로 구워도 기름이 흘러내리지 않으며 살코기 보다 비계가 더 쫄깃하다.

감천 유역에서 옛 풍치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정자는 방초정(芳草亭)이다. 방초정은 연안(延安) 이씨 집성촌인 구성면 상원리 마을 앞에 방초 이정복이 건립한 것을 후손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임진왜란 때 이정복의 처 화순 최씨 부인(17)이 신행을 오다 왜병을 만나 정절을 지키기 위해 마을 앞 웅덩이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이 때 하녀 석이(石伊)도 함께 투신해 숨졌다. 웅덩이를 확장해 '최씨의 연못'이라는 뜻의 '최씨담(崔氏潭)'이라고 하고 방초정을 지어 부부의 인연이 영원토록 함께하기를 기원했다는 애뜻한 사연이 전한다. 인조가 내린 어필정려문과 정려각 앞에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어 찾는 이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김천역을 중심으로 김천은 번성하기 시작했다. 1922년 감천제방이 축조되기 전까지 감천변의 모래사장에 김천장이 섰다. 감천철교 부근의 모래언덕과 아랫장터로 불리는 감호·용두동이다. 김천장은 조선시대 5대 시장의 하나로 손꼽혔다. 1908년 당시 김천장의 연매출액은 72만원으로, 전국 제일의 대구 서문시장(연 매출 108만원)에 이어 두번째였다. 1928년엔 매출이 130만원으로 불어났다. 대구서문시장(259만원) 개성장(150만원) 다음의 매출규모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몰려든 곳은 우시장(牛市場)이었다. 김천장의 최고 거래품목이다. 1931년, 김천장의 무역거래액 124만여원 중 소의 거래액이 36만여원으로 최고를 차지했다. 당시 김천인들은 억척스러움을 밑천으로 시장경제를 키웠다. 양민이 살기 좋은 곳으로 유명해지며 인구가 불어났다.

김천에서는 쌀을 가공하는 도정(搗精)업을 비롯해 농기구제조업, 유기(鍮器)제조업, 제과업 등의 공업이 발달했다. 제과업으로도 유명했다. 광복 이후까지 김천의 제과업체는 40곳이 넘을 정도로 전성기였지만, 대기업이 제과업에 뛰어들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농산물의 집산지답게 농기구제조업이 발달했다. 족답식 탈곡기를 만드는 공장이 20곳에 이르렀다. 하지만 1965년 동력식 탈곡기가 출시되고, 이 탈곡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김천은 안성과 더불어 유기로도 이름이 높은 고장이었다. 1970년대 스테인리스 그릇이 등장해 대부분 쇠락했으나 징과 꽹과리는 옛 공법으로 제작, 김천유기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감천이 21세기 들어서 몸살을 앓고 있다. 상류인 부항천에 2013년 댐이 준공되는 등 크게 변모하고 있다. 댐 건설단 측은 저수지 바닥에 수몰되는 자연상태의 모래, 자갈 등을 댐 축조재료로 활용해 주변 환경훼손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했다고 설명했다. 저수지 둘레에 10여㎞의 일주도로를 만들어 새로운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또 감천 중류 경관이 빼어난 구성면 송죽리에 개발의 마수가 뻗쳤다. 처음에는 공단을 조성했으나 공단부지 분양이 원활치 못해 10여 뒤인 2013년 골프장(베네치아)을 개장했다가 폐장했다. 송죽리는 신석기와 청동기를 망라하는 선사시대 유적·유물이 많이 발굴된 곳이어서 아쉬움을 남긴다.

농소 남면 일대에 들어서는 경상북도 혁신도시인 '경북드림밸리'에 한국도로공사 등 13개 공공기관이 입주 중이다. 혁신도시에는 문화 '교육' 자족 기능을 갖추기 위한 다양한 시설들도 들어설 예정이어서 김천시민들은 과거의 시세를 되찾는데 한 몫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정모 논설위원
김정모 기자 kjm@kyongbuk.com

서울취재본부장으로 대통령실, 국회, 정당, 경제계, 중앙부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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