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는 그 사람 인격 응축 무심코 그려 보는 얼굴처럼 보고 싶은 얼굴 많아 졌으면

▲ 최재목 시인·영남대 철학과 교수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꼴 보기 싫어도, 피하고 싶어도 그냥 모른 척 지내야 할 때가 많다. 남들에게 성인군자연하는 멀쩡한 얼굴인데, 늘상 사람을 음해하거나 해코지해대는 경우는 어떤가.

보이스피싱을 당해 본 사람은 안다. 그냥 걸려오는 전화 벨소리, 평범한 인간의 목소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악마성이나 범죄는 일상성-평범함 속에 늘 발톱을 숨기고 있다. 물론 선행이나 성스러움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가 살아있다는 것이 누구에게는 축복이나 누구에게는 비극이고 불행일 수 있다. 엇비슷한 얼굴만 스쳐도 소름이 돋는다면, 그런 얼굴은 걸어 다니는 흉기이고 공포이며 폭력이다. 그러나 현실적 삶은 그런 끊임없이 자신을 해치고 위협하는 타자들과도 공존하는 지혜를 요구한다. 그것을 용서니 관용이니 부르나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보들레르의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 가운데 '새벽 1시에' 를 읽는다. '마침내! 혼자가 되었군! …몇 시간 동안 휴식까지는 아니라도 우리는 고요를 갖게 되리라. 마침내! 인면(人面)의 폭력은 사라지고, 이제 나를 괴롭히는 건 나 자신 뿐이리라.' 말은 또 이어진다. '마침내! 그러니까 이제 나는 어둠의 늪 속에서 휴식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자물쇠를 이중으로 잠그자. 이렇게 자물쇠를 잠가두면, 나의 고독은 더욱 깊어지고, 지금 나를 외부로부터 격리시키는 바리케이드가 더욱 단단해지는 것 같다.' 그리고 더 이어지는데, 딱 눈에 띄는 구절이 있다. '한 극장 지배인에게…(왜일까?) 내가 기꺼이 저지른 다른 비행들은 부인하였다. 하나는 허풍의 범죄. 다른 하나는 인간 존중의 범죄이다.' 인간을 만나고, 얼굴을 맞대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보들레르는 자발적 고독을 원한다. '인면의 폭력'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이다. 아울러 존중해 줄 필요가 없는 데도 애써 참아가며 남을 존중하는 것을 범죄로 보았다. '인간 존중의 범죄'라니! 참 재미있는 발상이다.

에즈라 파운드는 '지하철 정거장에서' 라는 짧은 시를 썼다. '군중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파운드는 파리의 지하철에서, 스쳐가는 수많은 얼굴 가운데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아름다운 어린 아이의 얼굴이나 부인의 얼굴 등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어떤 얼굴은 '유령' 처럼, 또 어떤 얼굴은 '꽃잎' 처럼 각인됐다.

한 사람의 몸은 결국 얼굴에 수렴된다. 얼굴 하나에 그 사람의 인격이 모두 응축 되는 것이다. 심지어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라'는 말은 온 생애가 얼굴에 집약되는 경우이다. 반대로 얼굴이 온 몸으로 확산되기도 한다. 온몸이 모두 얼굴이라는 말이다. 몽테뉴의 '에세' 에 나오는 이야기이다.'겨울에 셔츠 바람으로 다니는 거지가 있었다. 그는 온몸을 수달피 가죽으로 둘둘 말고 다니는 사람만큼 건강하게 지냈다. 누군가 그것을 보고 신기하여 어떻게 그렇게 추위를 잘 참고 지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거지가 말하였다. "보이소, 댁도 얼굴은 벗었지요? 나는 온 몸이 얼굴이요!"' 이 발상은 나의 신체를 '부모가 남긴 몸(父母之遺體)'로 보는 것과 통한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처럼, 우리 사회에 보고 싶은 얼굴이 자꾸 많아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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