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독도, 바다사자 천국…일본의 불법 포획으로 자취 감춰

▲ 일본인들이 독도에서 바다사자를 무차별 포획해 멸종으로 이어졌다.
괭이갈매기의 천국 독도는 1982년 11월부터 국가천연보호지역 336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독도는 괭이갈매기들의 터전이자 낙원이었지만 이전 해양에서는 바다사자가 터줏대감이었고 그들의 안식처였다.

독도는 인간의 손길로 무참히 도륙된 바다사자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 독도 바다사자는 어떤 종일까?

불과 100여 년 전의 독도는 강치 혹은 가제(가재), 가지라고 부르는 해양포유류가 주인일 정도로 바다사자의 천국이었다.

해양학자들은 전 세계적으로 독도 바다사자와 유사한 종으로 캘리포니아 및 갈라파고스 바다사자를 꼽는다.

독도 바다사자 수컷은 몸길이가 약 240㎝, 몸무게 490㎏에 달하며, 암컷은 몸길이 180㎝, 몸무게 120㎏ 정도로 거대한 해양포유류였다.

번식 시기는 4~6월, 임신기간은 사람과 비슷한 11개월로, 1년에 1회에 새끼 한 마리를 낳고, 먹이로는 방어, 멸치, 정어리, 고등어, 대구, 민어, 오징어 등을 잡아먹는다고 알려졌다.

국내 물개과에 속하는 해양포유류는 북방물개, 큰바다사자, 독도 바다사자 등 3종이 있다.

▲ 지난 2009년 독도에 나타난 물개.
△ 독도 바다사자는 언제부터 있었나?


우리 역사에 독도 강치와 관련된 기록들이 다수 등장한다. 1417년 태종실록에 무릉등처안무사 김인우가 수우피(水牛皮)라는 소처럼 생긴 바다에 사는 동물의 가죽을 토산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한다.

또, 1694년에 삼척영장인 장한상의 울릉도 체류 보고서에는 울릉도 남쪽 해안의 동굴에 다수의 가지어(可支魚)가 서식하고 있다는 등 바다사자로 칭하는 기록이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

당시 울릉도에는 가지어가 다수 서식해 1700~1800년대에 울릉도에 다녀간 관리들은 울릉도에 다녀온 증거자료로 '가지어' 가죽을 조정에 바쳤다는 것이다.

독도에서 바다사자는 1800년대 후반 혹은 1900년대 초에 울릉도에 온 전라도인들의 증언에 독도 바다사자 잡이가 등장한다. 식용 또는 가죽을 취하고 바다사자의 기름으로 등불을 밝혔다는 기록이 있다.

독도·울릉도를 포함한 동해에는 바다사자만 존재 했는 것이 아니다. 지난 2009년 독도에 나타난 물개를 비롯해 점박이 물범 등이 독도에서 쉬어 갔는 것을 봐도 유추 할 수 있다.

하지만 해양학자들은 그 당시 동해안에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바다사자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바다사자의 번식지는 40여개 이하로 번식기에 독도를 찾아 번식했고, 동해 및 남해 연안에 주로 서식했다.

바다사자와 달리 물개는 북위 42도 위쪽인 이북에서 번식하고 그 중 어린개체 및 성체 일부가 가을에서 봄까지 회유한다고 한다.

▲ 독도 앞 해상에서 회유하는 해양포유류.
△ 독도 바다사자 왜 멸종 됐나?


무자비한 일본에 의해서 독도 바다사자가 멸종됐다.

독도에서 본격적인 바다사자 잡이는 1903년부터 상당히 최신식 선박과 장비를 갖추고 진행됐다.

당시 일본인 거부 나까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는 대한제국 조정의 어떠한 허가도 없이 불법적으로 이뤄졌다.

1903년부터 독도에서 바다사자 잡이를 시작한 나까이는 1904년 한 해 동안만 무려 3천200마리의 강치를 잡았다.

일본기록에는 1905년에 2천800마리, 1906년에 1천919마리, 1907년에 2천104마리를 잡았다.

무자비한 바다사자 잡이로 당시 독도는 물론 울릉도까지 바다사자의 피 냄새가 진동했다고 하며, 심지어 일본 해군에서 바다사자 잡이 자제를 요청했을 정도였다.

학살하듯이 사냥을 한 일본에 의해 점점 개체수가 줄어들어 1941년에 잡은 바다사자는 고작 16마리였다.

이렇게 학살당한 바다사자는 1970년대 울릉도, 독도에서 출몰 됐다가 자취를 감췄다.

△ 독도 바다사자, '강치'인가? '가제(가재)'인가?

광복 70주년인 올해 초 일본 내각관방은 초등학교 교사출신인 스기하라 유미코가 '메치(독도 바다사자의 일본 방언)가 살아있던 섬'이라는 그림책을 학생들에게 읽어주는 동영상을 인터넷에 배포했다.

일본문헌에 바다사자를 칭하는 것은 대분분 '아시카'인데 아시카란 명칭을 두고 오키지역의 방언 '메치'를 사용했는 것을 주목 할 필요가 있다.

국민 대다수 사람들은 독도 바다사자를 강치라 부른다. 울릉도·독도의 바다사자를 칭하는 기록에는 강치라는 기록이 없다.

가지 혹은 가제(가재), 수우어, 가지어 등이 기록됐다. 울릉도·독도 내에서는 가제바위 가제굴 등 바다사자를 칭하는 지명이 많이 남아 있으며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다.

또, 1950년대 울릉주민들로 구성돼 독도를 지킨 독도의용수비대원들도 가제라고 불렀다는 것을 보면 강치라 불린 역사가 아주 짧은 것으로 추측 할 수 있다.

동국대학교 역사교육학과의 한철호 교수는 2012년 발표한 '독도·울릉도 가지(강치)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의미'라는 논문에서 "독도 바다사자는 역사 기록 속에서 가지, 수우 등으로 기록됐다"며 "울릉도 주민들은 가재 혹은 가제라 불렀다"고 한다.

강치라는 단어가 역사에 기술된 것은 이규경(1788~1856)이 처음 기술했다. 이를 증거로 한 교수는 강치라 칭하는 것은 독도바다사자인 가지랑은 다르다는 주장이다.

이규경의 '수피금모변증설'에 가지와 비슷한 모양을 지닌 강치, 해마, 오용은 모습과 사용용도 유래 등을 자세히 기술해 북방인(함경도)이 부르는 강치와 울릉도·독도 등의 지역에서 불리던 가지와는 다른 종으로, 독도 바다사자인 강치를 가지나 가제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양학자의 생태학적인 논리대로 북방(이북)에 물개가 많았다는 논리로 접근하면 강치로 불리던게 큰바다사자나 물개가 아닐까 생각도 든다. 일본도 물개와 바다사자를 혼돈해 사용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유미림 한아문화연구소장은 올해 '가제냐 강치냐 호칭에 유래와 변천에 관한 소고'에서 "독도 바다사자를 강치라 부르는 것보다 가지나 가제로 불리는 게 더 정통성을 지닌 고유호칭일 듯"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유 소장은 "현재 언론 및 독도관련연구소에서 바다사라라는 호칭보다 강치라는 호칭이 더 많이 사용되고 있어 호칭을 정하는 문제는 모든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울릉도 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울릉군 문화관광과 김기백 과장은 " 독도 바다사자를 두고 정부나 기관 등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강치 보다 우리 역사 속에 바다사자를 칭하는 가지나 가제(가재)로 사용하는 것이 명분이나 역사와 연계 할 수 있어 좋을 듯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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