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공화국 시절 야당 지략가…좌우명 '주인의식 갖는다'

▲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일성포럼에서 김수한 전 국회의장(87)이 김정모 서울취재본부장과 대담을 나누고 있다. 유홍근기자 hgyu@kyongbuk.com

김 전 의장은 67년 7대 총선 때 신민당 전국구로 처음 국회에 들어간 이후 6선 의원을 지냈다.

김영삼 정권 후반기 국회의장을 지냈다. 한일친선협회 중앙회장 등을 맡아 정계의 일본통으로 불린다. 한일 친선 및 우호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그는 보수의 대척점인 혁신계(요즈음 말로 진보정당계)로 대구에서 정치 활동을 했다. 이후 보수정당인 신한당 신민당으로 들어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 개헌 반대활동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4공화국 시절 '김수한 있는 곳에 당권 있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야당내 지략가였다. 그는 10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에서 전국 최다 득표를 하고, 차점자와 최다표차를 낸 인기 정치인.

1971년 7대 대통령선거 전국 유세장에서 김대중 후보의 찬조연사로 나서 후보보다 연설을 잘 한다는 평을 받으며 야당의 바람을 일으키는데 일조했다.

밝혀지지 않은 정치비사에 대해 몇 가지 물었으나 손을 내저으며 다 지나간 일이라며 답변을 하지 않았다. 1970년 신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1위(과반수 미달)를 한 김영삼 후보를 결선투표에서 김대중 후보가 역전승을 한 과정에 대해서는 "내가 당시 김대중 후보가 뭘 했는지 가장 잘 알지만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김대중씨가 3위를 한 이철승과 당내 제2파벌의 수장인 이재형에게 각각 차기 당 총재로 밀기로 이중 밀약을 했다는 것은 정설이다.

김 전 의장은 일제 강점기인 1928년 경상북도 사회의 지식인 사업가였던 김성진의 6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의성군 춘산면에 살던 선친(김성진)이 대구로 이사와 왜관에서 사업을 하면서 왜관에서 서당과 왜관초등학교를 다녔다.

칠곡의 노옹들은 "김수한이가 5세에 천자문을 통달해 귀재로 소문났다"고 전한다. 수재들이 입학하는 경북중학교에 입학했다(경중은 5년제 중등교육기관으로 경상도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선친이 성주에서 하던 금광사업이 실패해 기숙사비도 못 내게 되면서 그의 인생드라마는 시작된다. 이 때 빈부차이와 계급모순에 대한 의식에 눈을 뜬 것이다.

43년 일장기를 칼로 찢은 '일장기 말소사건'에 그가 주모자로 대구경찰서 고등계의 조사를 받았다.

'불경선인(不敬鮮人)'의 요시찰 학생으로 압박을 받았다. 실제는 관여하지도 않았는데 반골 성향이 좀 있어서 오해를 샀다고 한다. 당시 선친의 사업도 어려워 학교에 다니기가 버겁기도 해서 3학년 2학기에 학교를 그만뒀다.

그는 선친이 하던 칠곡군 석적면 밤실 과수원에서 일하다 해방을 맞았다. 다시 대구중학교(당시 5년제) 1회생으로 들어가 졸업(49년6월)했다. 보성전문(현 고려대) 법과 출신인 선친이 애독하던 '개벽' '삼천리' 잡지를 읽고 사상적으로 감화를 받았다.

집안의 경제사정이 어려워 서울에 가지 못하고 대구대학(대구대와 청구대를 통합 1970년대 영남대로 바뀜) 법학과를 졸업했다.

법학과 학생회장으로 학생시절부터 리더의 자질을 드러냈다. 아들 김성동(61)씨도 정치에 입문해 국회의장 비서실장, 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혁신계(요즈음 말로 진보정당) 거물인 동암 서상일을 대구에서 만나면서 정치의 길로 접어들었다. 자유당 독재를 무너뜨리기 위한 '민권수호국민총연맹'에 가담했고, 4대 대선을 앞두고 야권 연합의 공명선거전국추진위원회 대변인을 했다, 5대 총선(민의원) 대구 동구에서 민혁당으로 6대에는 소수정당인 사회대중당으로 대구에서 출마했다.

그는 혁신이념에서는 떠났지만 보수 야당가에서는 강경파였다. 제3공화국 당시 야당이 윤보선 등 강경파의 신한당과 유진오 박순천 유진산 등 온건파의 민중당으로 나뉘었을 때 신한당 대변인이다. 대일굴욕외교반대국민회의 초대 대변인이 김영삼 당시 의원이고 2대 대변인이 그다.

제3공화국 야당 거두인 박순천 윤보선을 두 지도자로 한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의 대변인과 69년 5월 공화당정권의 3선개헌에 저지를 위해 신민당 주도로 만든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대변인도 지냈다.

현대정치사에서 선두에 선 그는 여든여덟의 나이를 무색하게 아직도 국가 원로로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수주작처(隨主作處)가 좌우명. 어디서든 주인의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마산 출신 민족 시인 노산 이은상의 시가(詩歌)를 좋아한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둥켜 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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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모 기자
김정모 기자 kjm@kyongbuk.com

서울취재본부장으로 대통령실, 국회, 정당, 경제계, 중앙부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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