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산요수, 지혜로운 이는 움직이고 어진 이는 고요하다네

▲ 백일홍 고목이 세월의 무게를 더하는 서출지 이요당.

누정(樓亭)은 선조들이 자연이라는 스크린을 바라보는 영화관이다. 언덕 위 높은 곳이나, 저 푸른 초원 위, 물소리 우렁찬 계곡가, 파도 부서지는 바닷가에 정자와 누각을 짓고 자연이 풀어내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자연에 응답하는 교류의 장이었다.

누정에 앉아 풍광을 가슴속에 끌어들였고 가슴 속에 끌어들인 풍광을 다시 내뱉어 누정 밖에 배치했다. 내뱉은 풍광은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그림이 됐다.

정자는 자연을 끌어들이는 구심점 노릇을 했고 스토리를 재배치하는 원심력의 중심이 됐다. 학문의 중심이었으며, 시문학의 경연장이었으며, 고급스런 놀이문화의 정수, 한국 선비정신의 농밀한 과육이 누정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선비정신이 농익은 누정을 찾아 그 고귀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연재한다.

경주 남산의 대표적 산행길은 배동 삼릉에서 출발하는 서남산 코스와 남산동 통일전에서 올라가는 동남산 코스이다. 서남산코스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며 마애불과 절터를 만나는 즐거움이 있고 동남산은 산둘레에 펼쳐지는 왕릉과 석탑, 절터가 인상적이다.

이요당(二樂堂)은 동남산 코스의 출발점이다. 이요당(서출지)-남산리 삼층석탑-염불사지-칠불암-신선암으로 이어지는 신라시대 '나의 문화유적 답사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이요당의 '요(樂)'는 세 가지 발음으로 읽히고 세 가지 뜻을 담고 있다. '좋아할 요'에 '즐거울 락', '풍류 악'이 그렇다. 어떤 발음으로 읽히든지 어떤 뜻으로 소용되든지 기분좋은 글자의 '삼위일체'다. 불교에 관세음보살을 많이 외면 행복해진다는데 이 글자도 읽고 쓰는 자체로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지는 마력을 가졌다.

이요당의 '요'는 '좋아할 요'로 쓰였다. '요산요수(樂山樂水)'에서 '요'자 두자를 따내 지은 이름이다. 논어의 옹야편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하나니 지혜로운 이는 움직이고 어진 이는 고요하다(智者樂水 仁者樂山 智者動 仁者靜)" 산의 어짐과 덕, 물의 지혜를 정자에 담으려는 조선시대 선비의 '숨어사는 즐거움', 은거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공자가 또 이르기를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오래살고 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즐겁게 산다고도 하였으니 남산을 등 뒤에 두고 서출지를 앞에 둔 이 배산임수의 명당터는 덕과 지혜 외에도 어쩌면 오래토록 재미있게 살고 싶은 마음까지도 담고 있다.

정자는 이름그대로 자연을 닮아 있다. 뒤로는 남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정자 앞에는 여름내내 연꽃을 품었던 서출지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ㄱ'자 형의 정자는 동쪽 정자 다리를 연못 속으로 밀어넣었다.

정자를 떠 받치는 다리를 연못에 밀어넣어 정자가 자연스럽게 연못의 일부가 되도록 했다. 맑고 깨끗한 물 앞에서 발을 물 속에 집어 넣고 싶은 '탁족'의 심리를 정자의 건축구조에 담았다.

이요당이라는 당호는 임적이 1664년 자신의 호를 따서 지었다. 1663년에 가뭄이 심하게 들자 임적이 마을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못 옆에 우물을 파서 물을 끌어올려 죽어가는 농사를 살렸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지었다고 한다.

'ㄱ'자 형태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에 남쪽으로 달린 마루에는 작은 방이 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심하게 불 때 날씨가 추운 날에 유용한 장치이다. 칼바람이 부는 날 방안에 들어가 누워보니 거친 풍랑 속에 표류하는 일엽편주처럼 위태위태하게 느껴졌다.

정자는 풍류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험한 세상을 가로지르는 작은 배이기도 하다. 정자의 동쪽은 분합문을 벽처럼 만들어 내 비바람을 막을 수 있게 했고 여름에는 문을 열어 너른 들판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서출지 못물을 바람에 실어 남산으로 통할 수 있게 했다.

나무로 만든 북쪽 벽도 문만 열면 남산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했다. 정자가 산과 물을 지나는 바람의 통로 노릇을 하고 있다.

이요당이 사랑을 받는 진짜 이유는 정자 앞의 연못, 서출지(書出池)에 얽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에 관한 이야기 때문이다. 서출지에는 신라시대 죽음으로 사랑의 종말을 맞는 비극적인 연인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왕의 여자와 그 여자를 사랑한 중이 끝내 왕이 쏜 화살에 죽음을 당하는 슬픈 사랑이야기다.

'삼국유사' 에 나오는 이야기를 따라가보자. 신라 21대 소지왕이 행차를 했다. 가는 길에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어대며 사람처럼 말을 했다. 이상히 여긴 임금은 사람을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했다.

남산 아래 양피촌에 이르렀을 때 한 노인이 연못 속에서 나와 봉투를 주었는데 겉면에 '봉투를 열면 두 명이 죽고 열지 않으면 한 명이 죽는다'라고 적혀있다. 왕이 고민한 끝에 봉투를 여니 '거문고 갑을 쏘아라(射琴匣·사금갑)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왕이 궁궐로 돌아와 거문고갑을 향해 화살을 쏘자 내전의 불공을 맡고 있는 중과 궁주가 죽어서 나왔다. 왕의 여자와 왕의 여자를 사랑한 중은 왕을 죽이고 사랑을 성취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 비극적 사랑과 음모의 현장을 고발한 글이 나온 곳이 서출지다.

그 덕에 소지왕은 83살까지 장수했다. 왕은 자기를 살려준 까마귀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오기일'을 지정하고 약밥을 지어 바쳤다. 대한민국 최초의 음식블로거였던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전국의 유명음식을 소개했는데 경주의 약밥이 먹을만한 음식이라고 했다. 그 약밥은 여기서 비롯됐다.

왕의 여자를 사랑한 성직자. 남의 눈을 피해 성직자를 사랑한 왕의 여자. 1,500년전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 뒤에는 음모의 향기가 살짝 비치기도 한다.  영화 '천일의 앤'이 떠오른다.

영국의 헨리 8세는 6번이나 이혼을 하며 이혼을 허락하지 않은 교황청에 대항하여 새로운 교회인 성공회를 세운 뒤 전부인의 시종인 앤불린과 결혼한다. 이 결혼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왕은 변했다. 또다른 여자가 생기자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앤을 모함하여 참수한다. 1,500년전 하늘도 벌벌 떨게 할 정도의 절대권력은 자기를 배신한 여자를 죽이기 위해 연극 한편을 공연해도 될 정도의 소품과 인물, 심지어 동물까지 동원한다.

그리고 저수지에서 글을 들고 나온 신령스런 인물을 통해 하늘의 계시를 받아 여자를 죽였다. 이제 왕은 하늘의 보호를 받는 위대한 인물이 됐다. 여자의 배신과 암살음모를 하늘이 이렇듯 계시해주고 배신자를 처형하라고 암시해주지 않는가.

'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내려받았다'는 유럽의 왕권신수설도 이렇게 만들어졌지 않을까. 이제 음모의 향기가 느껴지는가. 그러나 증거는 없다.

서출지는 8월이 화려하다. 못 둘레에 '백일동안 꽃이 지지 않는다'는 백일홍이 눈이 아리도록 붉은 꽃을 피우고 있고, 못 속에는 흙탕물을 먹고 맑은 꽃을 피우는 연꽃이 가득하다.

연꽃은 마음의 등불, '심등(心燈)'이라고 한다. 가만히 서서 보면 너나 할 것 없이 촛불하나를 들고 소망하나씩을 빌고 있는 엄숙함이 있다.

이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서출지의 8월은 전국에서 내로라는 화가와 사진작가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백일홍과 연꽃, 이요당과 남산이 한 폭의 풍경화가 되기 때문이다.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그러나 산에 들에 물이 오르는 봄은 봄대로, 황락이 스산한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배산임수 요산요수의 이요당은 철마다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고졸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있다.

특히 눈이 내리는 겨울은 탄성이 절로 나오는 연하장 그림이다. 눈이 오지 않는다면 칼바람에 관절 앓는 소리를 내는 연의 잔해, 거친 물결 일으키며 빠르게 북쪽으로 가는 바람의 향기, 거친 풍랑 앞에서 의연한 작은배 같은 이요당, 이요당 너머 '구름모자쓴 남산할아버지'를 읽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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