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보며 형님·아우님 부르면 섭섭한 마음도 다 사라지죠"

▲ 쌍암고택 안채 마루에 앉아 있는 강계희 여사.
옛 말에 "되는 집안에는 들어오는 사람도 잘 들어온다"고 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집안 화목을 위해선 중매할 때 당사자들의 됨됨이는 물론이고 집안내력까지 살펴보고 중매했다고 한다.

특히 종갓집의 종부의 중매는 온 집안 어른들의 관심사이다.

산호대교를 타고 대구방향으로 500m 쯤 내려가다 해평면으로 들어서 처음 만나는 마을이 해평리이다.

해평리 뒷산(주산 해발 100m) 아트막한 중턱에 최근 붉은 흙벽으로 지은 8채의 집이 들어서 화제다.

이 집들은 해평리 전주 최씨 종갓집인 쌍암고택의 8형제들이 집안 대소사에 참여할 때 하루 이틀 거주할 수 있도록 지은 집으로 인근 주민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있다.

특히 이 집안은 형제들이 모이면 '문을 안연다' 할 정도로 우애가 돈독할뿐만 아니라 쌍암고택으로 시집 온 동서간의 화목도 동네에 자자하다.

'되는 집안에는 들어오는 사람도 잘 들어온다'는 옛 말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쌍암고택으로 들어온 사람(시집 온 사람) 중 강계희(1939년생) 여사가 이 집안을 지키고 있다.

현재는 2남 3녀마져 출가시키고 남편인 최렬씨와 고즈넉한 말년을 지내고 있다.
▲ 쌍암고택.

쌍암고택을 지키고 있는 전주 최씨 집안의 종부의 강계희여사는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에서 광산을 운영하는 강씨 집안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다.

춘양에서 영주여고까지 기차통학을 하면서 학업을 마치고 집안일 돌보던 강처자는 마을에서 재원으로 소문나 어느 집안에 시집 가는지가 마을 이야깃거리로 회자되고 있었다.

마침 최씨 집안 인척 한 분이 춘양면 오미동 이동학교에 근무하면서 당시 22살인 강처자를 눈여겨보고 구미 해평면 해평리에서 전주 최씨집 종손인 최렬(1935년생)씨와 혼담을 꺼냈다고 한다.

강여사는 신랑이 10남매의 맏이이지만 '시대가 어수선할 수록 다남매한 집안에 시집가는게 좋다'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집안 결정한 대로 따랐다고 한다.

옥인가량 (玉人佳郞·옥처럼 아름다운 사람과 재주가 있는 훌륭한 낭군이라는 뜻)이란 말만 듣고 60년에 200여리 떨어진 해평리 쌍암고택으로 시집온 강여사는 시할머니를 비롯해 시어른, 9명의 시동생과 시누이, 찬모 2명에 유모 1명 등 집안일과 농사철에는 40여명의 일손들의 뒤치락 거리로 바쁜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음식, 가례뿐 아니라 교육 및 집안 환경도 친정과 비슷해서 아무리 많은 일도 두럽지 않았다고 한다.

시집 오기 전 친정어머니로부터 큰 집살림은 동동쪽쪽(팔다리를 걷어붙이고 바삐 움직여라)해야 한다는 말, 모르면 시키기를 기다리는 것 보담 먼저 물어보고 미리 해놓아라는 말에 따라 4대 봉제사와 명절 30여 마지기의 농사철에는 눈 코 뜰새없이 바쁘게 살아왔다.

시할머니의 자미로운(자애롭고 재미있게) 가르침과 시어머니의 억척같은 생활력이 강여사를 낯설은 집안에서 살게 한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또 비슷한 집안끼리 혼인을 하다보니 아랫 동서들끼리도 서로 큰 소리 한번 안내고 살고 있다고 한다.

또 새아지매(새아주머니)라는 친근하게 불려주던 결혼 당시 서너살의 막내 시동생은 이젠 퇴직하고 고향인 해평리로 내려와 항상 옆에서 이야기 친구가 되어주고 있다.

강여사는 "사랑채에서 하는 일은 반대한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집안어른과 형제들끼리 모여 협의, 결정한 사항은 존중해주며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다.

또한 동서들에겐 "섭섭한 소리들리면 일단 얼굴 색을 내지말고 형님, 아우님이라 부르며 얼굴보면 다 사라진다"면서 동서들끼리는 나쁜 얼굴색 한 번 안 내면서 지내왔다고 한다.

'우리끼리 해결하고 담밖에 안나게 한다'는. 그러한 세월을 쌓이면서 바깥 사랑채에서 웃음소리가 나면서 안채 동서들끼리도 당연히 오순도순 이야기하면서 지내왔다고 한다.

전주최씨 가풍으로 억척같은 교육열과, 형제간의 우애를 꼽았다.

10남매 중 시누이 한 명은 대구여고를 졸업하고, 나머지 9명 모두가 대구, 서울에서 4년제 대학을 다 졸업했다.

형제들은 '어머님 날 낳으시고 할머니가 날 교육시키셨다'면서 당시 해평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할머니께서 대구 삼덕동에 집을 한 칸 마련해 손자 손녀들을 전부 공부시켰다고 한다.
▲ 강계희 여사는 아직도 손님이 오면 직접 챙긴다.

평생 책을 가까이 했다는 할머니는 손자들에게도 큰소리 한 번내지 않고 고사성어와 은유법으로 손자들을 가르치고 타이르면서 훈육했다고 한다.

68년 한 해에는 대학생 4명이 재학중인데도 시어머니의 정확한 계산과 기억력으로 강 여사는 큰 집안 살림을 뒷바라지하는데 어긋남이 없었다고 한다.

강 여사 슬하에도 2남3녀를 두고 모두 출가시켰지만 딸들도 종갓집에서 자란탓에 어려서부터 보고 들은 일이라 아무리 큰 일도 두렵지 않고 잘한다고 한다.

주산 중턱에 지은 8채 집도 집안에 큰일이 있으면 조카들을 포함해 40~50명이 모이는데 특히 조카들이 나이가 들어 고향을 찾아오면 묵을 수 있도록 마련했다.

돈은 없어지지만, 사라지지 않는 고향, 집안을 생각할 수 있도록 쌍암고택 뒷산 자락에 8채를 나란히 지어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도록 마련했다.

강 여사는 최근 선산 유림회관에 나가 논어를 배우고 있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길을 가야할 첫째 며느리에 대한 안쓰러움과 고마움이 더한 듯 했다.

자신의 뒤를 이어 전주 최씨 가문의 살림을 도맡아할 첫째 며느리도 57년 전 자신과 같이 요즘 흔한 연애결혼이 아닌 남편 얼굴도 모르는 중매결혼으로, 그것도 시아버지가 직접 선택한 탓에 누구보다 그 속을 잘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구부정한 허리와 깊게 패인 주름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세월의 흔적을 짐작하고도 남을 만 했다.

강 여사에게 그동안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해 달라는 요청에 순간 어색해진 경상도 할아버지의 모습과 기대도 하지 않고 있다는 웃고 마는 강 여사의 모습은 긴 세월 집안을 지켜온 부부의 세월만큼이나 다정해 보였다.
하철민 기자
하철민 기자 hachm@kyongbuk.com

부국장, 구미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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