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에 좋은 기운이 오래 머문다는 전착후관형 건축

▲ 양동주 대구한의대 대학원 겸임교수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성당 계산천주교회, 통칭 계산성당(桂山聖堂)은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오거리에 위치한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주교좌성당이다. 본당의 주보성인은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이다. 1911년에 대구대목구가 설정되었을 때 주교좌성당으로 결정되었다.

1885년 12월 제7대 조선(朝鮮)대목구장 마리장귀스타브 블랑(한국식 이름: 백규삼) 주교가 대구본당을 신설하고, 초대본당 주임으로 프랑스의 아킬레 바오로 로베르(한국식 이름: 김보록) 신부를 임명하였다. 로베르 신부는 신나무골에서 대구와 가까운 죽전 새방골(대구시 서구 상리동)로 옮겨 3년간 은신하여 전교하였다. 낮에는 바깥출입을 삼가고 밤이면 상복으로 변장하고 신자들을 방문하여 성사를 주었다.

1891년 새방골에서 읍내로 들어와서 성 밖 정규옥 승지댁에서 7년 동안 전교하면서 영구적인 본당을 설치할 부지를 물색하던 중 1897년 3월 김보록 신부는 현재의 계산동 성당 자리와 그 서편에 있는 동산 두 곳을 물색하였다.

김보록 신부는 동산 전부를 150냥에 매입하려고 결정하였으나, 신자들 특히 노인층 신자들은 현 계산성당 자리가 좋다고 하였다. 그들은 구릉지대이며, 허허벌판 지대에(당시 황무지) 성당 자리를 잡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전국 어느 곳을 막론하고 성당의 위치는 대개 높은 지대에 있어 마을이나 전 시가를 내려다보게 되는데, 계산성당은 시내에서도 낮은 지대인 평지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옛 어른들의 지혜에서 나온 것으로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볼 때 물을 쉽게 얻을 수 없고, 높은 곳은 바람을 막을 수 있는 환경이 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으로 해석된다.
▲ 계산성당의 현재 모습.

계산동에 정착한 김보록 신부는 신자들이 성전 건축과 신부의 새 사제관(사랑채)을 짓기 위해서 한결같이 보여준 열성으로 3년 만인 1899년 이른 봄 한식(韓式)으로 지은 십자형 기와집 성당과 신부 사랑채와 신자 교육관으로 사용될 해성재(海星齋) 건물 등을 건축했다. 사제관인 신부 사랑채는 2층으로 지었으며, 채색을 잘하는 스님 5명을 모셔다 성당과 사제관을 화려하게 단청(丹靑)하였다. 서울에 세워진 약현(중림동)성당, 종현(명동 1898)성당, 인천 답동(1896)성당 등은 모두 서양식 건물인데 반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세워진 대구 성당은 순수한 한식으로 동양 건축이었다. 1899년 12월 25일 루르드의 성모께 헌당식과 축성식을 성대히 거행하고, 성모성당이라 하였다.

십자형 성당은 봉헌 축성한 후 불과 40일 만인 1900년 2월 4일 밤 8시경에 대구에서는 매우 강력한 지진의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제대 위에 세워 둔 촛대가 지진의 진동으로 넘어져 제대 보와 양탄자 등에 불이 옮겨 붙어 성당을 모두 태워 버렸다. 건물 내부가 온통 화염에 휩싸여 창문과 출입문 등으로 불길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근처에 있는 집은 보호하자면 이미 불이 붙은 성전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불길이 서쪽으로 14m 떨어져 있는 해성재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보록 신부는 성수가 가득 담긴 병과 루르드의 물병을 들고 나와 불 속에 던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화염이 건물 안으로 몰려들더니, 이웃 초가집들은 손상을 입히지 않고 불길이 사그라졌다.

본당 설립 후 14년 만에 어렵게 건립된 십자형 성당이 이렇게 화재로 소실되자 모든 신자들은 큰 충격을 받고 허탈감에 빠졌다. 그러나 김보록 신부만은 별로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화재가 발생한 지 1주일 후 새로운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위한 호소문을 발표했다.
▲ 계산성당의 옛 모습.

김보록 신부는 교회 중진의 협력으로 벽돌로 내화구조와 성당 재건계획을 세우고 손수 설계하여 현재의 계산동 성당은 1901년에 착공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양옥 축조의 경험자가 없었으므로 중국(청)에서 벽돌공과 미장이, 목수를 데려 와서 일을 시켰다. 12사도의 스테인드 글라스와 함석류, 창호철물 등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각종 자재는 프랑스에서 주문해, 착공한 지 1년만인 1902년 5월에 양식성당을 준공하였다. 1903년 11월 1일(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에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성대한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이 성당은 국내에서도 찾기 힘든 정면 쌍탑의 고딕성당이다.

구조와 세부상세는 오히려 로마네스크양식에 가깝다고 하겠으나 평면 구성은 전형적인 고딕양식이다. 평면은 라틴 십자형 3랑식 열주의 아케이드(Aceade)를 이루고 천정에 의해 네이브(Nave)와 아일(Aisle)의 구획이 뚜렷이 되어 있다. 주현관은 서쪽 정면의 나르텍스(narthex)의 좌우 아일부에 2개의 동일한 종탑이 차지하고 있다. 전체 성당은 화강석 기초 위에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을 쌓았는데, 회색 이형벽돌의 사용은 버트레스(Buttress)와 정면 출입구 및 창 둘레, 그리고 내부 열주와 천정 리브에 집중하여 구조체와 장식을 겸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정면 중앙에 있는 박공부분의 큰 장미창과 좌우 익랑 박공부문의 장미창은 이 건물을 한층 화려하고 또한 엄숙하게 하고 있다. 이렇게 건축한 성당은 들어오는 입구가 좁고 안이 넓은 형태가 되어 풍수지리학적으로 전착후관(前窄後寬)이라 하여 좋은 기가 성당 내부에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두 개의 종은 서상돈(아우구스띠노)과 정규옥의 부인 김젤마나가 기증했으므로 종의 명칭도 이름을 따서 아우구스띠노와 젤마나로 명명되었다. 이렇게 해서 영남 지방에서 최초의 웅장한 고딕식 건물의 성전이 세워졌다. 이 점이 인정되어 1981년 9월 25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었다.

1984년 5월 5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계산성당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풍수지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대구 중심권은 분지형이면서 구릉지가 많은 곳이며, 먼 사방에 서쪽으로는 가야산이 북쪽에는 팔공산, 남쪽에는 비슬산 그리고 동쪽으로는 채약산이 있다.

계산성당으로 연결된 용맥은 백두대간에서 분맥한 낙동정맥이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이어져 부산 몰운대에서 끝을 맺는다. 낙동정맥이 아화리에서 낮고 넓게 끊어질 듯 이어져 다시 기룡하여 사룡산(해발 685.5m)에서 분맥한 비슬지맥이 청도권과 영천, 대구권을 좌우로 하여 서쪽으로 달려가는 맥은 생룡이 용오름을 하듯 힘차게 상하좌우로 之玄자로 움직이고 있으며 경산서 청도로 넘어가는 재를 비롯하여 팔조령과 헐티재를 거쳐 비슬산에 이르렀으며 비슬지맥은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나갔다.

그리고 북쪽으로 뻗어 나온 지맥이 대구 중신권의 주룡맥으로 청룡산(해발 793.6m)과 대덕산(해발 658.7m)을 지나 비파산(해발 500.5m)를 정점으로 큰 줄기가 이어져 오고 이곳에서 낮게 떨어져 이어지는데 영남대학교 대명동캠퍼스에서 성봉하여 지맥을 동으로 내어주는 맥은 대구시수도사업소를 지나 건들바위가 있는 곳으로 북진하다가 대구향교와 남산을 거쳐 낮게 이어진 맥은 경상감영으로 내룡하고 보일 듯 말 듯 한 지맥은 계산성당 쪽으로 연결되고 있다.
▲ 계산성당 위치도.

이러한 맥을 풍수지리학에서 농룡(壟龍) 혹은 평지세(平地勢)라고 한다. 계산성당의 안산은 지금의 동산병원이 있는 높은 구릉지가 되며, 수세는 삼각로타리 쪽에서 발원한 물이 명덕네거리 옆을 지나 북으로 남문시장을 지나고 계산성당 앞을 지나 북성로 이륜차(오토바이)골목으로 빠져 나가고 있다. 지금은 하천이 복개되어 도로로 활용되고 있지만 대구중심권의 원활한 보온보습을 위해서는 중심권에 흐르는 실개천을 복구하여 물이 흐르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양택의 입지에서 주요한 것은 사신사(현무, 청룡, 백호, 주작)가 갖추어진 곳이 명당이나 경상감영과 계산성당이 있는 대구중심권처럼 구릉지가 많고 낮은 지역에는 바람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고 태양에너지를 충분히 받을 수 있고 물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곳, 즉 장풍득수지(藏風得水地)에 입지를 선택해야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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