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재 훈 <포항강변교회 목사><포항강변교회 목사>

파스칼이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라고 설파한 이후 사람들은 그야말로 생각의 존재로 살아오고 있다. 물론 그 이전에는 사람은 생각의 존재였다.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의 특수성을 이렇게 단적이고 직선적으로 정의를 내린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파스칼의 말 한 마디는 사람들 개인마다에게 많은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생각이 없는 사람은 단순무지함의 대명사로 일컬음을 받게 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은 그 생각의 깊이에 따라 삶을 영위해 가고 있다. 만약 사람에게 생각이 없다고 가정해 본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생각은 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생각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더 발전적이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유익함을 주고 있다. 그 생각이라 함은 곧 내일을 바라보며 준비하는 것이리라. 더 큰 것을 향해 묵묵히 전진해 나가는 삶이리라. 사람들은 더 큰 것에 대한 반응보다는 작은 것에 반응을 훨씬 빨리 해 버리는 습성들을 가지고 있고, 내일보다는 오늘에 자신을 함몰 시켜버리는 일에 서두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토머스 화이트 맨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중독’이라는 책에서 “인생이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의 10%와 그 일어나는 일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의 90%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반응은 인생의 ‘어퍼스트로피(’)와 같다. Impossible을 I’m possible로 바꾸는 생명을 지녔기 때문이다. 어퍼스트로피 하나면 ‘고질병’이 ‘고칠병’이 된다”라고 했다.

두 친구가 사이좋게 살고 있었습니다. 한 명은 시장에서 구두들 만들며 어렵게 살았고, 다른 한 명은 소 장사를 해서 괜찮은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소장수는 자기 친구가 만든 구두가 탐이 나서 이 구두, 저 구두를 신어보며 눈치를 살폈습니다. 그래서 구두를 만드는 사람은 소 장사하는 자기 친구의 정신을 좀 고쳐줄려고 한 가지 장난을 치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소 장수가 소 한 마리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소장수는 언덕을 넘다가 길가에 자기 좋아하던 구두의 한 짝이 버려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구두 한 짝을 신어보았습니다. 너무도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한 짝밖에 없다는 것에 실망을 하고서는 그는 그 구두를 멀리 풀밭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언덕을 넘어서 빠져나가는데 또다시 조금 전 자기가 버렸던 구두의 다른 한 짝이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누군가가 그 구두를 사 가지고 가다가 한 짝을 잃어 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가던 소를 소나무에 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좀 전에 자기가 버렸던 구두 한 짝을 찾으러 뛰어 갔습니다. 잠시 뒤 그가 돌아왔을 때는 소나무에 매어놓았던 소가 보이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구두 한 켤레에 마음을 빼앗겨 그것을 찾다가 그만 구두 수십 켤레를 사고도 남을 소를 잃어버린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시름에 싸여 구둣가게로 찾아갔습니다. 그는 자기 친구에게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이렇게 나무랐습니다.

“여보게, 소 장사해서 돈을 많이 벌면 구두는 얼마든지 많이 살 수 있는데, 왜 하찮은 구두에 그리도 정신을 빼앗기면서 사는가? 소탐대실小貪大失해서는 안 되네.”

그러면서 친구는 그에게 자기 집 뒤뜰에 가보라고 했다. 그 곳에는 소장수가 잃어버린 소가 말뚝에 안전하게 매어 있었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는 말이 의미 있는 말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작은 것을 얻기 위해 큰 것을 잃어버리는 이웃들이 많다. 생각의 차이일 것이다. 삶의 주변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이웃들, 오늘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여 내일의 안락함을 포기해 버리는 이웃들, 오늘의 성공을 위해 내일의 행복을 저버린 이웃들... 오늘도 구청장의 면담 거절에 상처받아 목매어 죽은 어느 장애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생각의 문제이다. 어제도 살았는데 왜 오늘 자신의 전부를 잃어버리려 하는 것일까? 힘들고 암담해도 살아있음이 감사한 일이다.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을 쓴 김지선 양은 화상으로 인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지만 “그래도 죽는 것 보다는 사는 것이 좋다”는 고백으로 삶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각박하고 어려운 현실일수록 더 큰 것을 볼 수 있는 생각의 깊이가 요구되어지는 때이며, 작은 것 얻기 위해 큰 것을 잃지 않는 지혜로운 생각이 필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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