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의 시대 三災 없는 '한국판 유토피아' 재조명

▲ 전라도 길지로 꼽히는 전남 구례군 토지면 전경.
인류역사상 가장 풍요롭다는 현대사회가 결핍이 화두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해 인공지능(AI) 알파고까지 나오는 과학기술 시대이지만 확실한 게 하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다. 재난, 전염병, 경제공황이라는 현대판 삼재(三災)는 주기적으로 발생한다. 헬조선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삼재와 버금가는 현상이 일상사다. 한국인의 행복한 삶은 불가능한가. 난세(亂世)에 살아갈 대안은 무엇인가. 그 공간을 탐색하기 위해 '한국의 힐링처- 십승지의 재발견'을 연재한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했던가. 한국판 유토피아 십승지(十勝地)를 말한 '정감록(鄭鑑錄)'만큼 오랫동안 관심 받은 것도 드물다.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1973년 안춘근의 '정감록 집성'이, 80년대엔 현대어로 출간한 정감록이 나왔다. 풍수전문가 최어중(崔於中) 씨는 '정감록'에 따라 전국의 십승지를 답사해보고 99년 '십승지풍수기행'을 펴냈다. 공산체제의 대세가 무너진 91년 이후에도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여전히 읽혀지는 것처럼 정감록은 현대인의 심연에 강하게 남아있다.

정감록은 무엇일까. 정감이 이심, 이연 형제와 함께 조선의 산천을 둘러본 뒤 금강산에서 조선의 국운과 미래를 예언하고 문답을 나눈 것을 기록한 것이라는 설이다. 정감록은 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베스트셀러이자 정치·종교운동의 모태다. 풍수지리설, 후천개벽(後先開闢)설, 주역을 내용으로 하는 변혁과 전환의 사상을 담았다. 말세관 전염병 전쟁 흉년 환란 이야기와 '새 하늘 새 땅'이 미륵신앙, 재림예수의 신앙과 유사하다. 조선의 통치이데올로기였던 유학이 추락하면서 성리학질서에 대항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다.

조선왕조 몰락을 예언해 금서(禁書)로 지정됐으나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구는 잠재울 수 없었다. 새 왕조 개창을 바라는 민중의 염원이자 일제로부터 광복을 바라는 희망이었기 때문. 그 새 시대를 열 영웅은 '정성진인(鄭性眞人)'이다. 정씨성을 가진 진인, 이른바 정도령은 민중의 구세주이자 후천세계의 개창자다. 새로운 정치를 내걸었다가 비명에 간 사람들 중에 정몽주 정도전 정여립 정희량 등 정씨가 많다는 것이 이채롭다.

정감록은 역성혁명의 근거가 됐다. 1589년(선조) 정여립은 "木子가 망하고 奠邑(전읍)이 일어난다"는 노랫말을 퍼뜨려 역모(逆謀)사건으로 비화했다. 목자는 李고, 奠邑은 鄭이다. 혁명아 허균사건으로 몰락한 북인계 윤운구는 1628년(인조) "진인(허의의 아들)이 났으므로 새나라가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을 전라도에 퍼뜨려 유배됐다. 신유박해 무렵 김조순의 일족인 김건순(金健淳)은 정감록을 끼고 다니고 주문모 신부에게 청(淸)을 쳐 병자호란의 원한을 씻어보자고 했다가 처형됐다. 조선왕조는 입에 담기조차도 싫은 정감록을 드디어 1739년 실록에 기록했다. "평안도 함경도지방에 정감의 참위(讖緯)한 글이 서로 널리 전했다"고.

한국인은 옛 고구려의 영광에 대해 그리워한다. 이탈리아의 옛 로마 영광에 대한 부활의식을 무솔리니가 점화했듯이, 정감록은 미래의 한민족의 영광을 이야기했다. 일제도 정감록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세기부터 필사본으로 나돌든 정감록을 일본 신문기자 호소이가 1923년에 처음 활자화(정감록비결집록)해 대중화했다. 총독부 학무과에서 수집정리한 정감록을 기초로 한국연구가 아유가이가 필사본으로 펴낸 정감록(감결, 1913)을 배껴서 출간 한 것. 아유가이는 민비(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참여하고 러일전쟁 공로로 경부철도 부설 이권으로 떼돈을 번 행운아(?)다.

정감록의 '정'은 정씨를, '감'은 천도(天道)와 풍수지리를, '록'은 계시록 같은 예언서를 뜻한다. 정확한 저자와 집필연도를 알 수 없으며 어느 게 정본(正本)인지도 희미하다. 문구도 알쏭달쏭하고 두루 뭉실하다. 전문가들은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16세기 말 ~ 17세기에 완성됐다고 본다. 저자로는 중국 촉(蜀)나라의 도인 정감(鄭鑑), 정도전 등이 꼽히지만 증거가 없다.

정감록은 감결, 삼한산림비기, 무학비결, 도선비결, 남사고비결, 토정가장비결, 삼도봉시 등 신라 고려의 예언 전통을 담은 비기(秘記)들이 망라됐다. 민족의 오래된 지혜라고도 할 수 있다. 동학 증산도 원불교 등 신종교가 여기서 파생됐다. 1894년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새 세상을 내건 동학혁명 때다. 전봉준은 구름떼같이 몰려든 동학도들에게 정감록에 나오는 '궁을(弓乙)'을 부적으로 만들어 불살라 먹게 했다. 그만큼 정감록을 신앙했다. 우연이겠지만 다음날 농민군은 전라도 감영이 있는 전주성을 함락했다.

조선 후기는 외적의 침입, 민란과 함께 염병(장티푸스)이나 호열자(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창궐했다. 서민들은 잦은 가뭄과 흉년으로 초근목피도 어려운 데다 탐관오리들의 착취와 수탈이 호랑이보다 더 무서웠다. 지리학자이자 여행가인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 1894~97년 조선에 머무르면서 조선관료의 수탈을 흡혈귀로 표현할 정도다.

정감록이 왕조 교체뿐 아니라 기독교 최후의 심판 같은 삼재(三災), 즉 전쟁이나 기근이나 전염병의 위기에 안락하고 재난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를 거론했다. 승지(勝地)는 이상적인 명당이요 길지. 중국은 이를 동천(洞天) 또는 복지(福地)라고 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에덴동산이요 중원의 무릉도원인 셈이다. 대를 이어살만한 새 땅을 가리키자 민중은 환호했다. 이 십승지는 전국에서 뉴프론티어 정신으로 이주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영국인들이 새 땅을 찾아 신대륙에 뉴잉글랜드를 만들었듯이.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1516)는 '공화국', '도농 순환', '6시간 노동' 등 법과 제도로 이상을 그렸지만 한국의 십승지는 '진인'이라는 영웅과 '승지'라는 자연에서 찾았다. 20세기말에 와서야 대두한 문명보다는 자연을 찾는 포스트모더니즘보다 수 백년 앞서 한국인들은 승지를 찾아 나섰다. 오히려 현대 한국인들이 농경시대 정착의식에 매여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며 산다. 해마다 (갔다가 되돌아오지만)세계 인구 10억 명이 이동하는 시대에.

그럼 십승지는 어디인가. 서양 최대의 예언가라는 프랑스의 노스트라다무스에 버금가는 격암(格巖) 남사고(南師古·1509~1571)가 가장 정확하게 정감록 십승지를 표현했다. 정감록과 남사고의 십승지는 대부분 겹친다.

영주시 풍기 금계촌, 예천군 금당실, 봉화군 춘양, 속리산 우복동, 개령의 용궁. 합천군 가야산 만수동, 공주시의 유구-마곡, 남원군 운봉, 무주군 무풍, 부안군 호암아래 변산, 태백산, 영월군 연하리 등 태백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에 접한 곳이다. 이외에도 '택리지' '남격암' '두사충비결' '피장처' 등이 추천하는 명당은 삼척, 울진, 평해, 청송 진보의 보미산, 문경, 영양군 수비, 구미 금오산, 하동, 함양, 정선, 산청, 영종도, 영천, 승주, 구례, 양주, 강화, 포천, 곡산 등등이다. 21세기 현대인들이 봐도 귀촌 귀농지역으로 선호하는 이상향이다.

오늘날은 어디가 좋은 땅일까. 1751년 이중환이 편찬한 '택리지' '복거총론(卜居總論)'은 백성들이 살 만한 곳을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등 네 가지 기준으로 골랐다. 오늘날도 유효하지만 비결서에서 가리키는 승지를 현대의 눈으로 재조명이 필요하다.

본 연재물은 정신적 물질적 결핍 때문에 이민이라도 가고 싶은 도시인들을 위해 힐링처(healing處)로 눈여겨 볼만한 땅을 찾는 작업이다. 생태와 생명의 땅을 찾아 인생 반전(反轉)을 노리는 사람들이 개척지로 삼거나 최소한 마음속에 두고 가끔은 찾을 수 있는 곳 말이다. 영국의 존 오키프 교수는 '장소세포(place cell)'를 발견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생쥐도 장소마다 다른 신경세포가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장소 기억은 지도처럼 뇌 속의 장소 세포에 저장되어 반응한다는 것이다. 사람과 장소와의 함수관계는 훨씬 심오하고 신비로울 것이다. 보배로운 땅, 희망이 될 땅, 그 승지를 한 곳씩 찾아 나선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김정모 기자
김정모 기자 kjm@kyongbuk.com

서울취재본부장으로 대통령실, 국회, 정당, 경제계, 중앙부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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