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귀몰니의 길지로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 엿보여

▲ 운조루 안채.
이 집은 조선 영조 52년(1776년) 당시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가 지은 것으로 99칸의 대규모 저택이다. 류이주는 그가 처음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九萬坪)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歸晩)이라 했으며 이 집을 '귀만와'(歸晩窩)라고도 불렀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본래 이 집의 이름은 중국 진나라 때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 칠언율시에서 머리글자만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서 피어오르고(雲無心以出岫), 날기에 지친 새는 돌아올 줄 안다(鳥倦飛而知還)라는 문구에서 첫 머리 두 글자를 취해 '운조루'(雲鳥樓)라고 지었다고 한다. 참으로 낭만적이고도 호방한 이름이 아닌가.



건축양식은 한 시대와 한 지역의 보편적인 건축적 특성을 대변하는 말로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역사적 상황이 그 시대의 양식을 만들어 낸다. 전라남도의 민가는 비옥하고 넓은 평야지대의 생활환경과 맞게 홑집형의 'ㅡ'자집이나 'ㄱ'자집 또는 이들을 조합하여 만든 튼집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지만 운조루의 경우 경상도 사람이 창건주라는 사실답게 경상북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ㅁ'자집을 하고 있으며, 운조루의 평면 형태는 본채인 'ㅁ'에 사랑채가 서측과 남측으로 곁달린 형태이다. 이렇게 'ㅁ'자집에 사랑채를 곁달린 형식은 경상도 북부지역에서 많이 보이는 형태로 안동의 충효당과 양진당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사랑채가 독립되어 나오는 것은 남녀의 규율이 더욱 엄격해지고 제례 시 손님 접객을 위한 공간이 별도로 필요함에서 발달된 것으로 16세기 이후 성리학의 이해가 더 깊어지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운조루의 구조양식은 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 얹어 그 위에 서까래를 놓는 나무인 '도리'와 그 도리를 받치고 있는 모진 나무인 '장여'로만 된'민도리집' 구조이다. 지붕은 사랑채, 안채가 이어 있으며 팔작지붕이다.



운조루의 사랑은 서측의 큰 사랑채와 남측의 중간사랑채로 나누어져 있다. 그전에는 중간사랑 아래도 작은사랑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이렇게 사랑채가 많이 있는 것은 당시의 대가족제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큰 사랑채는 중간에 사랑대청을 놓고 좌우로 온돌방과 누마루를 두었는데 특이한 것은 후면에 마루방을 별도로 두고 그 뒤로 온돌방을 하나 더 두었다. 이곳은 본래 서책을 보관하기 위한 서고와 공부하는 글방으로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독립적인 공간이다.



운조루의 안채는 사랑채와 사이에 있는 중문간을 통하여 진입할 수 있다. 안방 위에는 골방이 있고 그 위로는 다락을 두었는데 좌측 채와 우측 채 모두 상부에 다락이 있다. 이렇게 다락을 두어 층을 구성하는 수법은 경북의 예천권씨 종가나 의성김씨 종가처럼 역시 경상북도 가옥에서 주로 볼 수 있는데 서측 채 다락은 사랑뒷마당으로 오를 수 있는데 남단 벽에는 원래 가로로 누워진 띠살 들창문이 달려 있어서 과거 남성들에 의해 통제된 젊은 여성들이 사랑마당을 오가는 남성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주인의 어린 시절만 해도 마을 앞 조망을 즐기는 놀이공간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붙박이창 하나만 붙어 있다. 동측 채 다락은 안채주인이 사용하는 공간으로 건넌방을 통하여 오를 수 있고 안채 안쪽으로 계단과 쪽마루가 있어 부엌에서 다락으로 음식을 나를 수 있도록 하였다.

운조루에서 특이한 것은 굴뚝이다. 안채와 사랑채의 굴뚝을 별도로 두지 않고 전면 기단에서 연기가 배출되도록 하였는데 일설에 의하면 어려운 시절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여 밥 짓는 연기가 멀리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설계라고 하니 당시 사대부의 인품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http://www.unjoru.net/)


▲ 운조루 소슬대문.

운조루의 벽체부를 이루는 기둥의 단면형태를 보면 큰 사랑채는 모두 원기둥으로 되어있고 중간사랑채를 비롯하여 안채는 모두 각기둥을 사용하였다. 이는 운조루 솟을대문 앞의 연못과 같이 당시 천원지방과 연계된 건축관으로 가장 높은 어른이 거하는 큰사랑만 위계를 달리하여 원기둥을 사용하고 그 외에는 각기둥을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안채의 경우 대청마루 2칸을 이루는 정면 기둥 3개만 원형기둥을 사용하였는데 역시 가옥 내에서 안주인의 위상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일제시대 때 무라야마(村山智順) 라는 사람이 <조선의 풍수> 란 책을 썼는데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금내리 및 오리미 일대를 1912년께부터 이주자들이 모여들었다. 충청남도,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 각처에서 꽤 지체 높은 양반까지 와서 집을 짓기 시작하여 현재(1929년) 이주해 온 집이 일백여호에 달한다. 계속 증가 추세에 있다. 비기(秘記)에 말하기를 이곳 어디에 '금귀몰니(金龜沒泥)' '금환락지(金環落地)' '오보교취(五寶交聚)'의 세 진혈이 있어 이 자리를 찾아 집을 짓고 살면 힘 안들이고 천운이 있어 부귀영달한다고 전해온다. 이 세 자리는 상대(上臺), 중대(中臺), 하대(下臺)라고도 하며 하대인 오보교취(五寶交聚) 자리가 제일 좋은 자리라 한다.

이곳 제일 오래된 류씨의 집이 오미리에 있다. 그 택지는 류씨(柳氏)의 원조 류부천(柳富川)이란 사람이 지금부터 300년쯤 전에 복거(卜居)한 것이라고 한다. 류부천은 서울까지 밤마다 구름을 타고 왕복할만한 방술에 통한 자였다고 한다. 그가 좋은 집의 초석을 정하고자 할 때 뜻밖의 귀석(龜石)을 출토했다. 비기에 이른바 금귀몰니(金龜沒泥)의 땅이라는 것을 알고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 운조루 쌀 뒤주.


실제로 운조루 영건시 거북돌이 출토되어 널리 알려졌고 집안의 가보로 전해져 오고 있었으나 근래에 도난으로 없어졌다. 거북돌을 넣어 두었던 함의 뚜껑에는 집을 짓기 시작한 해인 1776년에 개기 때에 출토되었다고 그 연유를 적고 있다. 창건주인 류이주는 운조루를 지을 당시 낙안군수를 역임한 후이고 상주영장을 지내는 시점이었으므로 이 지역의 풍수적인 지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그러한 정황은 앞서 언급한 삼수공행장에서도 잘 나타난다.

운조루에 소장된 호구단자 건의 유물을 통해 보면 1774년에는 토지면 구룡정리에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룡정리 마을은 현재 파도리로서 류이주의 아들인 류덕호의 처가가 있던 곳이다. 즉 이곳에 임시로 터를 잡았다가 운조루가 완성되는 1776년에 오미동으로 옮겨 정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오미동의 이름은 '오동'이었다. 내죽, 하죽, 백동, 추동, 환동의 다섯 동네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랬던 마을 이름이 운조루를 지은 류이주가 정착하면서부터 오미리로 바뀌게 되었다. 다섯 가지 아름다움이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그 다섯 가지란 월명산, 방방산, 오봉산, 계족산, 섬진강을 이르는 것이다. 이래저래 운조루가 자리하면서 마을은 이름부터 재편하게 된 것이다.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보면 운조루가 위치한 오미동(五美洞)은 지리산의 노고단이 진산(眞山)인 조산(祖山)이 되고 노고단에서 남쪽으로 강한 일맥이 뻗어 내려오면서 상하로 기복(起伏)과 좌우로 방향은 수없이 변화 하면서 내룡하여 형성된 형제봉이 주산(主山)이 된다.

앞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지고 들 앞에는 섬진강이 있으며 섬진강 건너 오봉산이 안산(案山)이 된다. 그 너머 계족산이 조산(朝山)이 된다. 동쪽으로는 왕시리봉이 좌청룡(左靑龍)이 되며 서쪽으로 천왕봉이 우백호(右白虎)가 된다. 이로서만 보아도 앞으로 섬진강이 흐르고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진 곳, 사람이 살고 양식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배산임수의 명당 터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곳은 사람이 살기에 필요한 식량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곳이어서 외명당이 잘 발달되었으며, 운조루가 있는 내명당은 주봉으로부터 내려온 용이 좌우로 가깝게 형성된 청룡과 백호가 있으면 더없이 좋은 내명당의 조건을 만족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점은 아쉽다.

또한 풍수지리학에서 말하는 양택입지조건 중 첫째가 배산임수(背山臨水)다. 내명당의 임수는 운조루 앞에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장방형 연지와 이곳으로 물을 끌어 드리는 보를 만들어 마을 앞으로 흐르게 함으로써 수계의 기능을 보완하였다. 이 물은 다시 오른쪽 백호 안쪽에 연못을 만들어 물을 가두어 두어 농사에 활용할 수 있도록 오미저수지로 들어간다. 이처럼 운조루터는 오래전부터 물형으로 보아 금귀몰니(金龜沒泥)의 길지로 알려져 왔다.



▲ 양동주 대구한의대 대학원 겸임교수.
영남을 대표하는 만석군 경주 최부자집의 유훈에서 보듯이 재물부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재물로 덕을 베풀어야 한다는 교훈과 운조루에 전해져 오는 쌀독의 교훈 또한 그러하다. 운조루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쓰여진 뒤주다. 큰사랑채와 중간사랑채 사이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어둡고 좁은 공간에 놓여있다. 타인능해(他人能解), 누구나 열 수 있고 항상 열려있다는 의미다. 적극적 배려와 나눔이다.

운조루와 오미동은 이른바 길지(吉地)로 유명한데 길지란 지덕이 있는 좋은 집터란 뜻이다. 하지만 세상사 요행은 없는 것이고 누구나 그러하듯이 성실하게 노동하고 그 댓가로 살아가며 사람 사는 이치는 다 같다 할 것이다. 사람 살기에 안전하고 온화한 땅이란, 이웃 간에 정이 많고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며 살아 갈 수 있는 곳이 명당이 아닐까? 라고 받아드리고 이해하면 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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