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제 꿈꾸는 옛 선비의 부푼 희망도 잠시 쉬어가네

▲ 문경새재도립공원 안에 있는 조선시대 경상감사의 인수인계가 이루어지던 곳에 세워진 정자로 1896년 의병전쟁 때 소실됐다가 지난 1999년 6월에 복원됐다.
문경새재길을 타박타박 걷는다. 계절은 바야흐로 성하로 치닫고 있다. 녹음은 짙푸르러 눈이 시린데 먼지 폴폴 나는 길은 길게 이어진다.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 난다'는 진도아리랑 가사가 자꾸 떠오른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선풍기를 틀어놓은 듯 맑고 시원한 바람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계곡이다.

새재는 고갯길이 높아 '새도 날아가기 힘든 고개'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고갯길 주변에 새(억새)가 많아 '억새풀 우거진 고개'라는 뜻이라고도 하고 하늘재와 이우리재 사이의 고갯길, '새재'라고도 한다. '새로낸 고갯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새재의 험한 산길 끝이 없는 길

벼랑길 오솔길로 겨우겨우 지나가네

차가운 바람은 솔숲을 흔드는데

길손들 종일토록 돌길을 돌아오네

시내도 언덕도 하얗게 얼었는데

눈 덮인 칡덩굴엔 마른 잎 붙어있네

마침내 똑바로 새재를 벗어나니

서울 쪽 하늘엔 초승달이 걸렸네

- '겨울날 서울 가는 길에 새재를 넘으며' 정약용


▲ 문경새재에서 옛날 국밥 한 그릇과 술 한 잔으로 시장기와 여독을 풀던 주막.

새재는 다양한 뜻 만큼이나 사연도 많다. 제일 먼저 머리를 쳐드는 의문 하나. '진도아리랑'의 첫 대목에 왜 '문경새재는 왠 고갠고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 난다'라고 했을까? 문경에서 천리나 떨어진 섬지방 민요에, 그것도 첫 대목에 새재를 언급하는 대목이 나올까.

문경새재는 조선시대에 영남과 한양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길이었다.

추풍령과 죽령이 있었지만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고 했고 죽령은 '대나무처럼 반쪽이 쩍 갈라져서 미끌어진다'는 징크스가 나돌았던 모양이다. 따라서 문경새재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넘어가던 선비들의 '희망통로'였다. 문경(聞慶)의 옛이름은 문희(聞喜)다. '경사스런 소식을 듣는다, 기쁜 소식을 듣는다'라는 뜻이다. 입시학원 이름에 '등용문'이 흔하디 흔한 이유와 같은 맥락이다. 이 때문에 영남뿐만 아니라 호남의 선비들도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길을 넘었다.

진도아리랑에 '문경새재'가 언급되는 이유의 하나는 유치하게도 치정에 얽혀있다. 진도의 어느 선비가 그 지방 아가씨와 열애를 하다가 과거 시험을 보러 한양에 가는데 그 코스가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문경새재다. 사내가 떠나자 아가씨는 애잔한 마음에 노래를 부르며 눈물짓는다. 서울에서 진도로 부임해온 벼슬 아치가 그곳 기생과 깊은 사랑을 나누다가 떠나게 되자 기생이 눈물지으며 한 노래 일수도 있겠다. 또 다른 설은 진도지방에 '문전세재'라는 고개가 있는데 '문전'이 '문경'으로 와전됐다는 설이다.

문경새재는 태종 13년(1413년)에 길이 열렸다. 그전 까지는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계립령이 유일한 길이었다. 길은 험했지만 사회 문화 경제 국방의 요충지였다. '택리지'는 '조선선비의 반이 영남에서 배출됐다'고 했는데 그 선비들은 새재를 넘어 '기쁜 소식을 들은' 케이스다.

새재에 있는 세 개의 관문은 임진왜란 이후 유성룡이 산성을 만들고 관문을 설치하자고 주장해 이뤄졌다. 첫 번째 관문은 주흘관으로 숙종 34년(1708년) 설치 됐다. 2관문인 조곡관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 27년(1594년)에 세워졌다. 3관문은 조령관으로 새재 꼭대기에 있다.

교귀정은 1관문과 2관문 사이에 있다. 조선시대에 출장 중인 관리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조령원터가 나오고 조금더 올라가면 길건너편에 선비들이 새재를 넘어가면서 술 밥을 해결하던 문경주막터가 나온다. 주막터를 지나면 교귀정이 보인다. 1470년 경에 문경현감 신승명이 건립했다. 1896년 의병전쟁 때 화재로 타 없어졌다가 1999년 6월 복원했다.
▲ 정자 건너편 용추 계곡, 퇴계 이황의 시로 유명하다.

건물의 양식은 팔작지붕에 이익공(二翼工),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자에는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교귀정이 건립될 당시에 심어진 나무가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뿌리는 교귀정 방향인 북쪽으로 뻗어 있고 줄기는 남쪽으로 향해 있어 마치 춤을 추는 듯한 모양인데 나무 가지는 길 위로 뻗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교귀정은 새로 부임해오는 신임경상감사와 이임하는 경상감사가 관인을 인수인계하던 곳이다. 요즘으로 치면 이취임식을 하는 곳이다. 신임 감사 입장에서는 관할지역에 들어서자 마자 업무를 시작해야 하고 떠나는 감사는 관할지역을 벗어날 때 까지 업무에 한치의 소홀함이 없어야 하겠기에 업무의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정자 이름 '교귀'는 '거북모양의 관인을 주고 받는다'는 뜻으로 쓰인 이름이다.

조선중기 좌의정을 지냈던 용재 이행이 교귀정이 건립되고 7년 뒤에 이곳에 들러 시를 남겼다.



교귀란 이름은 그 유래 있어도

지난 자취는 전해짐이 없어라

어여쁜 새는 진정 마음 쏠리지만

시든 꽃은 다만 가련할 뿐이네

예와 이제가 한가지 모습인데

지혜와 어림석음 무슨 차이 있으랴

아직은 견마잡힐 신세 아니어도

산과 계곡이 반겨주는 것이리라



문경새재의 교귀정은 비록 복원된 것이지만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교인처이다. 이 때문에 매년 가을 문경문화제 때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고 있다.

교귀정에서 눈여겨볼 만한 것은 건너편 계곡의 '용추'이다. 용이 오른 곳이다. 대한민국의 쓸만한 계곡에, 크든지 작든지 규모야 어떻든 계곡물이 낙하하는 곳에는 다 붙여진 이름이다. 먹물깨나 먹은 이들이 자신의 호연지기를 담아 한번은 날아보겠다고 작심하고 지은 이름일 것이다. 신구경상감사 교인식이 있는 장소에 규모야 어떻든지 이런 정도의 명함은 내밀어야 하지 않겠는가.

계곡은 녹음으로 뒤덮여 있고 햇살에 눈이 부신 반석이 펼쳐진다. 바닥이고 드러난 곳이고 모두 바위이다. 넓은 바위 한쪽에 폭포가 맑은 물을 내리 꽂고 있다. 장쾌한 음향이다. 떨어진 물이 바위에 부딪혀 튀어오르며 분수처럼 물을 흩뿌리는데 '6월에 얼음이며 눈을 밟는다'는 퇴계 이황의 말처럼 뼈가 시리게 시원하다. 용추폭포 옆에는 '龍湫'라는 암각서를 쓰고 덧붙여 '구지정이 숙종 25년에 쓰다'라고 글자를 새겼다. 이장면은 퇴계 이황이 보고 시를 읊었다. '용추'다.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큰 바위는 힘 넘치고 구름은 도도히 흐르네

산 속의 물은 내달아 흰 무지개 이루는구나

성난 듯 낭떠러지 입구 따라 떨어져 웅덩이 되더니

그 아래에는 먼 옛적부터 이무기 숨어있네

푸르고 푸른 노목들 하늘의 해를 가리고

나그네는 유월도 얼음이며 눈을 밟는다네

(중략)

큰 글자 무디어져 바위에 새겨 있으니

다음 날 밤에는 응당 바람 비 내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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