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연이 준 위대한 선물…소백산·풍기 땅 '천지의 조화'

▲ 파노라마로 촬영한 소백산.
소백산은 산(山)이라는 사물이라기보다는 유달리 격이 우러나는 듯한 경외를 느낀다. 무정물(無情物)에 유정심(有情心)이라고나 할까.

20대 시절 읽은 노산 이은상의 '산 찾아 물 따라'에서 선뜻 감응이 되지 않는 문구가 있었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조국의 강산이다"라는 구절이다. 이를 이해하게 된 때가 나이 마흔이 넘어서였으니 나도 꽤 우둔한 사람이다.

아름다운 조국이라는 것을 단박에 느끼는 곳 중의 하나가 풍기 땅이다. 지난 달 하순 취재진은 소백산 자락 노인봉 앞에 높다란 언덕(풍기읍 산법리, 대한광복단기념공원)에서 풍기 땅을 한눈에 봤다. 읍내를 엄마의 팔가슴 처럼 포근히 껴안고 있는 소백산 연봉들의 인자함에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소백산은 남사고가 말했다는 사람을 살리는 '활인산(活人山)'이다. 남사고는 소백산 앞에서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산을 향해 큰절을 했다고 한다.

영주시 풍기읍. 15세기에 기천의 기(基)와 은풍의 풍(豊)자를 따서 풍기(豊基)군이 됐다. 1914년 일제 강점기에 전국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풍기 순흥 영(榮)천 3군이 합해 오늘의 영주가 됐다.
▲ 금계바위.

경상북도의 북단에 위치한 풍기는 소백산맥이 서남쪽으로 뻗어 주봉인 비로봉(1,439m), 연화봉(1,394m), 도솔봉(1,315m), 묘적봉(1148m)으로 이어진 소백산 산록 고원이다. 죽령계곡에서 발원한 남원천과, 비로사 계곡에서 발원한 금계천이 풍기읍 동부리에서 서천을 이루어 영주시내로 흘러들어 내성천이 된다.

'정감록'에 언급된 승지 가운데 풍기가 으뜸이라는데 이설이 없다. 그 가운데서도 정감록촌은 금계리. 삼가리, 욱금리 일대다. 금계리는 노인봉이 바깥 좌청룡, 공원산이 안 우백호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넓은 성주들을 끼고 있는 공원산은 소백산의 기운을 최종적으로 품고 있는 산진처(山盡處)다.

금계리 가장 안쪽에 용천골이 있고, 금계중학교, 풍기향교, 경북항공고, 옛 풍기군 관아터였던 풍기초등학교가 차례로 자리 잡고 있다. 금계리 옆 동네인 백1리(희여골)에는 경남에서 이주한 창원황씨들이 세거하고 있다. 풍기역을 지나는 중앙선철도 남쪽으로 풍기읍내가 펼쳐있다. 금계1리 임실마을에서 재밭마을까지 길가에 무궁화 나무가 심겨있어 인상적이다.

풍기는 평안도 황해도 등지에서 19세기 후반부터 6.25전쟁 때까지 주로 이주해왔다. 1960년대 풍기인구의 3분의 1일이 이북(以北)출신이었다. 서북(西北)지방에 사는 황평(黃平·황해도와 평안도)인들은 정감록을 믿고 '양백(兩白·소백과 태백)'의 하나인 금계리를 찾아 왔다. 이때 이들이 들고 온 게 베틀과 인삼이다. 베틀로 시작한게 유명한 풍기 인견이다.
▲ 죽령주막.

조선시대 내내 서북은 차별을 받았다. 지벌(地閥) 타파는 갑오경장에 나올 만큼 조선의 적폐(積弊)다. 대표적 희생양이 서북인이었다. 16세기 황해도 도적떼의 괴수 임꺽정은 그런 불만 많은 지역을 근거지로 했다. 잦은 외적의 침입에 본능적으로 살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파라오를 피해 가나안으로 출애굽한 유대인처럼 서북을 탈출해 남쪽으로 몰렸다. 실제로 거란-몽골의 외침과 임진왜란, 6·25때도 피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풍기읍내에 있는 정통 평양냉면집도 서북인들로 생겨났다. 지금은 실향 이북 2세들이 맛보러 오는 곳 중의 하나란다.

풍기는 인견과 인삼 사과의 고장이다. 특히 사양토이기 때문에 배수가 잘되어 인삼, 사과 등의 생육에 적절한 곳이다. 일교차가 심한 지역으로 과일이 단단하다. 금계리 좌우로 야트막한 산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데 사과나무 밭이 많다.

풍기인삼은 여름철 보양에 탁월하다. 소백산록에서 자라 타지방 인삼보다 조직이 충실하고 유효사포닌 함량이 매우 높다고 한다. 풍기 땅은 한국 인삼재배의 시발지다. 1541년 풍기군수로 온 주세(周世鵬)붕이 산삼의 씨앗을 받아와 직접 재배에 나선 곳이 바로 풍기다. 주세붕이 황해도 관찰사로 가면서 인삼 재배를 전파해 지금의 개성인삼이 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 금계리 금선정.

풍기인삼이 명품 브랜드로 자리 잡는 데에도 정감록을 믿고 내려온 서북인의 공이 크다. 개성 해주 등지에서의 보다 앞선 재배기술을 익힌 이들이 내려와 풍기에 정착하면서 경공업이 시작됐다.

풍기 산업은 1908년 '풍기삼포조합'이 뿌리다. 한국 상공업의 발상지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영국은 모직 면직 발달이 산업혁명으로 이어져 세계경제를 바꿔놓았다. 우리는 식민경제하에서 더 이상 발달하지 못해 아쉽다. 1910년 경북도지사 인가를 받고 1919년 총독부 상표출원된 것이 풍기인삼. 풍기인삼조합을 만든 개성출신 구당 이풍환은 부친이 영양현감(이종식) 재직 시 풍기를 오가다가 정착했다.

풍기엔 명주의 본고장인 평안도 영변, 덕천, 박천 등지서 남하한 직물 장인들이 많았다. 명주실(누에고치에서 뽑은 실)과 비슷한 인견사(人絹絲)로 짠 인견직물을 짜기 시작했다. 풍기가 인견 공장 지대로 성장한 배경이다. 평안북도 박천에서 이주한 정감록 3세대 송진호(59세) 풍기 부읍장은 "차가운 감촉 때문에 일명 '에어컨 이불'이라 고 불리는 풍기인견은 9년 연속 웰빙 인증을 받았으며 피부에 달라붙지 않고 땀 흡수와 발수가 빨라 여름철 인기품이라"고 자랑했다. 예천의 부잣집 머슴으로 살던 박 모씨는 풍기 직물공장에서 일하다가 대구와 구미에서 섬유공장을 차렸다. 80년대 한국 굴지의 섬유회사로 키웠다.

금계리 서북쪽에는 험준한 죽령이다. 도솔봉과 연화봉과의 사이다. 일명 대재(689m)라고도 불리는 죽령은 신라 시대(158년)에 길을 열었다. 156년에 개통한 문경의 계립령(하늘재)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백두대간 고갯길 중의 하나다. 경상도와 충청도(호서) 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1941년 일제가 죽령터널을 뚫어 중앙선을 개통하면서 죽령은 주 도로 기능을 상실했다.
▲ 5월 소백산철쭉제 부대 행사인 죽령장승제.

풍기 폐군 100년을 맞아 영주문화원에서 발간한 <풍기군의 역사와 문화>를 엮은 김인순(70세) 향토사연구원은 도솔봉이 독수리형상의 산세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도 평안도에서 조부 때 이주한 정감록파의 후손. 이 때문에 인물이 많이 나오는가. 독수리처럼 멀리 보면서 결단할 때는 비호같으니 성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람골인 죽령에서 불어오는 북풍이 사람의 인성을 단단하게 했으리라. 돌·바람·여자가 많은 삼다(三多)의 고장 제주도처럼 풍기도 바람이 거세다. 그만큼 풍기인들의 생활력이 강인하다고 한다.

풍기에는 박정희 대통령 최후의 비서실장으로 금계리 출신인 김계원의 얘기가 자주 회자된다. 그의 조모 이정연이 평양에 살 때 운영한 한의원 행랑채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풍기교회가 1909년 초옥 12칸으로 예배당을 근사하게 지은 것도, 풍기인들이 일찍이 개화된 것은 그 덕택이다. 김계원의 종조부(김창립)가 영신학원을, 김계원의 부친(김길준)이 풍기고등학교를 설립했으며 지금의 항공고다. 풍기 성내동 출신인 강경식은 재무장관,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내고 부산에서 3선 의원을 한 뒤 김영삼 정권에서 경제부총리를 했다. 비밀결사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광복단이 1913년 풍기에서 최초로 결성된 것도 충의로운 풍기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풍기는 동남쪽 영주시내로 가는 길 외는 삼방이 막혀있으나 서남쪽으로 보일 듯 말듯한 트인 곳이 있다. 좁고 긴 골짜기다. 봉현면에 있는 천부산과 용암산(자라봉) 사이로 난 고개(힛티재)를 지나 예천 감천까지 50리에 달한다. 부석-단산-순흥-풍기-봉현-감천(예천)을 거쳐 가는 931번 국도가 통과한다.

풍기라는 곳은 십승지이자 소백산이라는 대자연이 준 위대한 선물이다. 소백산이 중력처럼 사람을 끈다. 소백산과 풍기 땅이 주는 보살핌과 자람(生長)은 천지의 조화다. 말로 다 형용하기가 쉽지 않다. 와서 보면 저마다 감흥(感興)이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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