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마음으로 청산 백수 벗 삼아 후학 양성 매진

▲ 끊임없이 흐르는 물처럼 학문에 정진하자는 뜻으로 지은 수재정.
포항에서 28번 국도를 타고 안강읍 소재지를 지나 영천쪽으로 가다보면 하곡저수지가 나온다. 하곡저수지는 딱실못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예전에는 영남지방의 대표적인 잉어 낚시터로 꼽혔다. 주변에 매운탕집이 들어서 성업을 이뤘으나 지금은 낚시가 금지되면서 쇠락했다. 저수지 앞 마을이름은 저곡, 저실인데 닥나무밭이 많다고 해서 애칭으로 딱실마을이라 불렀다. 하곡저수지는 야일천과 사박천에서 흘러내려온 물을 담수했다가 형산강의 지류인 칠평천으로 유입된다.

하곡저수지를 스쳐 조금만 가면 오른쪽 길가에 '성산서당', '수재정' 푯말이 보인다. 거기서 푯말이 있는 오른쪽으로 꺾어 3㎞ 채 못가면 하곡마을이 나온다. 예전에는 굼딱실마을로 불렸다. 딱실마을 굼진 곳에 있다는 뜻이다. 하곡마을은 300년전 수재정을 건축한 쌍봉 정극후(鄭克後)와 하(河)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개척한 마을이다. 지형이 불화(火) 모양이라 해 '적화오리'라고 불렀다. 마을에 화재가 빈번하자 마을 앞에 웅덩이를 팠다. 그러자 주산인 삼성산에 항상 안개가 걷힐 날이 없으므로 '노을실'이라 하다가 노실(露室) 노곡으로 부르다가 노을 하(霞), 하곡으로 불렀다.
▲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수재정 내부 정원.

하곡마을의 맨 끝에 수재정이 있다. 왼쪽으로 삼성산이 우뚝하고 오른쪽으로 자옥산이 버티고 있다. 두 산 사이의 계곡에 수재정이 자리잡았는데 두 산이 둘러싸고 있어 장중하고 웅혼한 기운이 감돈다. 수재정은 인조 21년 1643년 이곳에 마을을 세운 쌍봉 정극후이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별장이다. 영조 4년 1728년 중수했다. 자연돌을 이용해 높은 축대를 쌓은 뒤 정자를 올렸다. 정면 3칸, 측면 1칸 구조이며 가운데 1칸은 마루로 두고 양옆칸은 방으로 만들었다. 마루에서 보는 암반 개울, 석천이 장관이다. 오래된 배롱나무는 계곡을 향해 길게 누웠고 암반 계곡에서는 작은 폭포와 여울이 끊임없이 수직낙하하면서 물방울을 튕겨내고 있다. 계곡을 지나는 바람이 맑고 시원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다.

정자 아래 계곡은 빠르게 흐르는 물길로 활기차다. 숲은 정적에 싸여있는데 계곡의 물소리는 요란해 이 부조화가 신비롭다. 냇물은 도덕산 서쪽에서 발원해 삼성산과 자옥산 계곡을 흘러와 여울과 폭포를 이루며 암반 계곡을 요란하게 흘러간다. 암반은 울퉁불퉁하고 평평한 온갖 기암으로 뒤덮혀 있다. 골짜기 바위면에 '광영대(光影臺)'라는 글자가 암각돼 있다. 정충필의 글자로 추정되고 있다. 정충필은 정극후의 6대손으로 명필로 꼽혔다. 정극후의 묘비글씨와 양동마을 '정충각' 글씨, 양동의 '양좌서당' 편액도 그가 썼다. '광영대'는 송나라 주희의 시 '관서유감'의 첫 번째 시 '하늘 빛 구름그림자가 함께 어른거린다 (天光雲影共徘回)'에서 따왔다. 이 냇물은 '학동거랑'이라고도 불렀다. 종이가 귀한 시절이었다. 서생들이 맑은 물소리와 산새소리를 들으며 너른 바위 위에 붓으로 글을 썼다. 거랑(개울)은 붓을 씻은 먹물로 늘 검은 물이 흘렀다고 한다. 거랑이 키운 명필이 많이 나왔다. 정충필 외에도 정극후의 증손 정연이 초서로 이름을 날렸고 정연의 아들 매헌 정욱도 문명이 높았다. 정충필의 동생 정동필도 글씨로 이름을 떨쳤다
▲ 조선 중기 학자인 정극후의 별장 수재성. 조선 광해군 12년(1620)에 세웠으며 영조 4년(1728)에 다시 지었다. 주변의 빼어난 경관과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같은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수재정은 '맹자'의 '수재수재'에서 따왔다. 서벽이 스승 맹자에게 물었다.

"공자는 자주 물을 칭송해 물이여! 물이여! (水哉水哉) 하였습니다. 공자는 왜 물을 취하여 칭송하였습니까?"라고 묻자 맹자가 답했다. "근원이 있는 물은 세차게 솟아 끊임없이 흘러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흐른다. 구덩이가 있으면 이를 채운 뒤 나아가 끝내 사해에 이른다. 공자는 이점을 취한 것이다."

현판은 정자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을 보며 상선약수의 교훈과 물의 덕을 새기며 살아가겠다는 물의 철학을 담은 그릇이다. 정자 정면에는 '수재정' 현판이 걸려있고 정자로 들어가는 문위에는 '하계정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매산 정중기가 쓴 '하계서사' 기문도 걸려있다.

정자 주인 쌍봉 정극후는 공부가 깊었다. 여헌 장현광에게 공부를 배웠다. 장현광은 포항 죽장면에서 입암의 경치를 보고 입암 28경을 선정했던 사람이다. 박인로가 이를 토대로 입암 29수를 지었고 이 시는 대한민국 가사문학의 대표작품이 됐다. 죽장 입암리 입암서원이 장현광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후 한강 정구에게 공부를 배웠는데 그의 탁월함에 놀라 '월성에 다시 인물이 났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정극후는 평생 한번도 벼슬을 하지 않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만 힘을 썼다. 58세에 되던 때 동몽교관에 임명됐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금정도찰방에 임명됐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유림 들의 천거(유천)로 후일 효종이 된 봉림대군의 사부가 됐으나 몇 개월 지나 노환을 이유로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수재정을 지었다. 이때부터 그를 호나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사부'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는 문묘제례의 예법을 밝힌 '문묘사향지'를 썼고 설총 김생 최치원 등 신라의 3현에 대한 기록 '서악지'를 짓기도 했다. 그의 문집인 쌍봉집은 국학진흥원에서 번역을 진행하고 있는 데 오는 11월쯤 출간될 예정이다.

옥산서원의 유생들에게 고하는 글을 짓기도 했는데 학생들은 학문을 시작하기 전에 뜻을 세워야 하며 책을 읽되 문자에 얽매이지 말고 성현이 가르치고자 하는 참뜻을 깨달아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 정래영이 쌍봉 정극을 추모해 건립한 성산서당.

■ 가볼만한 곳 - 성산서당

수재정과 계곡을 마주하고 있다. 정래영이 쌍봉 정극후를 추모해 1814년(순조 14)에 성산서사를 건립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당인 경덕사(景德祠)와 기타 부속사는 훼철되고 강당인 흥교당(興敎堂)만 남았다가 성산서당으로 개칭되었다. 일설에는 서원철폐령에 의해 서원이 철폐될 위기에 처하자 서당으로 격하시켜 철폐를 면했다고도 한다.

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이며 평면 구조를 보면 어간(御間)에 3칸마루를 두고 양쪽에 방을 둔 중당협실(中堂夾室)의 형태이다. 방에는 우물천장, 마루에는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지붕은 양쪽으로 날개지붕을 단 겹처마의 맞배지붕이다.

5량가의 3익공집이며 조선 후기의 익공 양식 기법을 보인다. 정면과 대청 중앙 뒷벽에 흥교당, 성산서당의 현판이 있으며 외삼문은 솟을대문이고 대문 좌우에는 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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