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육경 근본으로 종손 대대로 지켜온 천년의 대종가

▲ 인동장씨 옥산고택 전경
구미시 인동동 인동초등학교 후문 앞을 지나다보면 빼곡히 들어선 원룸, 상가 등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도 감히 침범하지 못한 고택 하나가 눈에 띈다.

이 고택은 인동 장씨(仁同 張氏) 시조(始祖)인 삼중대광공(三重大匡公) 휘(諱) 금용(金用)의 유허지(遺墟址)인 옥산고택(玉山古宅)으로, 고려 초에 창건(創建) 한 후 천 여 년 동안 종손(宗孫)이 대대로 세거(世居)하고 있는 대종가 고택이다.

옥산고택은 조선 초기까지 여러 번 중수(重修)를 거치다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로 건물(건물)이 전부 소실됐지만, 1631년 인조 9년 20 대 종손인 극명당공(克明堂公) 휘(諱) 내범(乃範)이 구지(舊址)에다시 축조해 중건(重建)했다.

이후 몇 차례 중건을 거치다 1994년 대동보발간(大同譜發刊) 회의 시 중건을 결의한 후 대동보의 헌성금(獻誠金)으로 1999년 3월 5일 기공하고, 같은 해 6월 7일 상량(上樑) 한 후2000년 3월 30일 준공했다.

대지가 488평, 건물이 27간(110평)이고 가묘(家廟)를 복원해 유림의 공의(公議)로 충정공(忠貞公) 불천위(不遷位)를 함께 모시고 대종가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 집에서 천 여 년 동안 계속해 종손이 살아 온 것은 세상에 드문 일로, 우리나라에 몇 가문 밖에 없는 인동 장 씨 가문의 자랑이다.

이 후 옥산고택에서 본향 5파 (중리, 남산, 황상, 진가, 진평)로, 다시 25 개 여파로 분파(分派)돼 현재 60 여 만 후손이 전국 및 해외에 산거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옥산고택은 시조공의 종손들이 대대로 지켜온 종가(宗家) 중의 종가, 대종가로 인동 장 씨의 뿌리다.

37세손 석원씨 전국에서 찾아오는 후손들에게 집안 내력을 안내해주고 있다.


인동 장 씨가 천 유 여년 세거해온 관향(貫鄕)인 인동은 각종 문헌에도 인동고을 대성(大姓) 가운데 인동 장 씨를 첫 번째로 기록할 만큼 그 세가 넓고, 유명하다.

삼국사기,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여헌선생문집, 동국여지승람 등에 고을의 행정구역명칭으로, 별호를 옥산(玉山)이라고 했다고 기록돼 있다.

옛 부터 성현을 존경하며 도덕을을 기리고 학문을 숭상해 예의를 지키는 고장으로 도학군자(道學君子)와 홍유석학(鴻儒碩學)이 많이 배출돼 추노지향(鄒魯之鄕)으로 불리어 왔다.

옥산은 인동고을의 원이 사무를 본 관아가 있었던 인동의 중심지로 지금의 행정구역상 구미시 인동동이다.



인동 장 씨가 시조로 모시는 삼중대광공(三重大匡公) 휘(諱) 금용(金用)은 고려 개국 초에 주석지신(柱石之臣)이다.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神虎衛)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했으며. 그 후손들은 인동에 옥계사(玉溪祠)를 세워 매년 청명 일에 제향(祭享) 하고 있다. 옥계사 경내에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신호위(神虎衛)는 고려 때 중앙군으로 국방을 담당한 2군6위의 하나로 수도 개경의 수비와 아울러 국경방위의 임무를 맡았으며, 상장군은 정(正)3품(品)으로 2군 6위의 최고 사령관으로 군사를 통솔했다.

고려말 12세손 휘(諱) 안세(安世)는 정헌대부(正憲大夫) 덕녕부윤(德寧府尹)의 관직에 있을 때 함주(咸州 :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갈한천(乫罕川)이 해마다 범람해 재해가 많았으나 해당 수령들이 그 대책을 세워 해결하지 못하자 특별히 함주부사로 임명됐다.

10여 년 동안 함주에 재임해 있으면서 치수공사를 완수, 또 목판으로 길이 70간이나 되는 만세교(萬世橋)라는 다리를 놓았다.

그 뒤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로 낙향하자 태조가 친필의 편지로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아니하고, 아들 중양(仲陽)과 함께 경상북도 구미의 인동에 은거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기우자집(騎牛子集)’의 ‘두문동칠십이현록(杜門洞七十二賢錄)’에 16번째로 기록돼 불천위로 추존됐다.

이상정(李象靖)이 지은 유허비문(遺墟碑文)을 보면, 그의 거관치적(居官治績)과 애국충절이 잘 기술되어 있으며 인동 옥계사(玉溪祠)에 배향돼 있다.



특히 옥산 고택에는 대종가답게 가문의 정신문화와 음식문화에 대한 기록도 잘 보존돼 있다.

대종가의 가훈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필요한 사람이 되라. 나라에 충성하고 지조와 충절을 지킨다. 후손과 남에게 베푸는 것을 일신의 실천을 삼는다. 남의 말을 경청하고, 일을 행함에 있어 부정하지 말 것 등이다.

이어 가정교육으로 예의범절을 몸과 마음에 하나가 되도록 하여 이를 실천하며 학문을 게을리 하지 말며, 학문을 함에 있어 가학을 전승하여 사서와 육경을 근본으로 실천과 수행하며 집안을 화목하게, 나라에 충성하기 위한 마음가짐을 대대로 지킬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 음식문화로 청주는 찹쌀과 누룩 및 엿기름과 솔잎을 이용해 만드는 술로 접빈용으로 사용하고, 파김치는 김장김치와 같은 방법으로 담그나 찹쌀풀이 첨가, 묵은 김치는 3년 정도 숙성하여 먹는데 무를 통째로 갈아 절여 숙성하는데 일반 묵은 지와 달리 시간이 지나도 배추와 무가 살아있듯이 아삭함을 즐길 수 있다.

이 밖에 음식문화로 간장은 10년 이상 된 장을 3번 정도 다려서 사용하고, 제례음식에 사용하는 솔잎 떡은 쌀가루에 솔잎을 첨가하는 것 등이 대종가의 음식문화로 대대로 내려오고 있다.

지금은 37세 손인 장석원(49)씨가 천년의 대종가를 지키고 있다.

대종가를 지키고 있는 장석원 씨는 종손하면 떠오르는 ‘연세가 지긋하고, 전통을 고집하는 원칙주의자’라는 예상을 깼다.

어린 시절 학업을 위해 서울로 유학 서울 근교에서 개인사업을 하다가 2002년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고향에 내려와 3년 상을 마치고, 대종가를 지키고 있다.

“어린 나이에 준비도 없이 내려와 종손을 맡는다는 것이 당시에는 너무나 큰 스트레스이기도 했다”는 석원씨는 “일 년에 몇 개인지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제사가 많으며, 전국에서 대종가를 찾는 집안 분들로 하루가 짧은 정도”라고 엄살을 피우면서도 “그래도 잊지 않고 이곳을 찾아주는 분들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른다. 내가 바로 인동 장 씨 가문 대종가의 종손이기 때문”이라고 은근히 대종가를 지킨다는 자부심을 내비췄다.

이어 “종중(宗中)의 화합을 최우선으로, 인동 장 씨 집안의 유산들이 집안 뿐 아니라 자라나는 청소년, 지역사회가 조상을 섬기고 나라사랑을 실천하는 문화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더욱더 잘 가꾸고 보존 하겠다”고 믿음직한 약속을 했다. 




하철민 기자
하철민 기자 hachm@kyongbuk.com

부국장, 구미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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