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즐기기 제격…고아한 물소리로 마음 씻어주는 힐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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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보은읍 전경

뜨거운 불볕 더위다. 여름휴가를 즐기고 재충전하는 힐링의 장소로 충북 보은은 제 격이다. 보은은 상주와 함게 속리산의 고을.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는 도회지와는 달리 크고 작은 산으로 북새통을 이루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에 계곡에는 맑고 고아한 물소리로 마음을 씻어준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속리산 일대도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곳’이라고 쓰고 있는데, 조선시대 말부터 십승지를 찾아와 이주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속리산 구병산에는 6.25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내려온 주민들이 지금도 살고 있다. 예부터 속리산 자락 보은 땅에 ‘십승지’가 있다고 알려졌다. 속리산 시루봉아래 속리산면 적암리 마을이란 설도 한때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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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루봉

보은은 경상·전라·충청등 삼남의 요충이었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여기서 치열하게 맞섰다. 신라는 보은의 오정산 능선에다 크고 단단한 성을 지었다. 지금 군청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다. 3년에 걸쳐 지었다고 해서 ‘삼년산성’이란 이름이 붙었다. 신라 자비왕 13년(470년)에 축조한 성곽이다. 성은 납작하게 사다리꼴로 다듬은 돌을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쌓아 만들었다. 당시 쌓은 그대로 남아 있는 성벽의 부분은 1500년이란 시간을 버텨왔다. 이 성에 주둔했던 신라의 부대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554년 7월 관산성(옥천)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을 사로잡은 부대가 이곳에서 출발했다. 신라가 얼마나 이 성을 자랑스러워했는지는 태종무열왕이 당나라 사신을 이곳으로 불러들여 접견했다. 당나라와 사대(事大)를 하지만 자주(自主)의 의지를 숨기지 않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당나라 사신을 위압하려 했던 것이리라.

차를 몰고 다니며 여행을즐기는 사람들은 외속리에서 내속리로 이어진 505번 지방도로를 타볼만하다. 삼가천과 서원계곡을 끼고 달리는 이 길 위에 오르면 멀리 속리산의 암봉들이 펼쳐지고, 좌우로 따라오는 삼가천이 운치를 더해준다.

505번 지방도로변에는 보은이 자랑하는 명소인 외속리면 하개리 ‘선병국 가옥’이 있다. 삼가천을 끼고 들어선 이 가옥은 보성 선씨의 집이다. 속리산에서 흘러내리는 삼가천의 물줄기 가운데 자리한 ‘육지 속 섬’의 형상이다. 풍수지리에서 ‘연꽃이 물에 뜬 형상’으로 일컬어지는 명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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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병국 가옥

선병국 가옥은 집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땅의 크기로 보면 마치 하나의 작은 마을 같다. 띄엄띄엄 들어선 안채와 사랑채는 각각 독립된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사당도 별도의 담에 독립건물처럼 서 있다. 전라도 갑부였던 보성 선씨 집안이 1909년 보은의 명당에 터를 잡고 내로라하는 당대 최고의 풍수지리 대가와 대한제국의 도편수를 ‘스카우트’해서 12년에 걸쳐 지은 집이 바로 이곳 선병국 가옥이다. 속리산의 적송을 1년6개월 동안 그늘에서 건조한 뒤에야 목재로 썼다고 전해온다. 구한국 시대에 지어진 이 집은 공(工)자 모양으로 화강석 위에 올려 지어진 사랑채와 안채 건물은 크고 또 우람하다. 사랑채 31칸, 안채34칸. 사랑채는 원주(圓柱)로, 안채는 사각기둥으로 사랑채의 기단은 3단이며 안채의 기단은 2단으로 지었다.

선병국 가옥은 흔히 ‘99칸 집’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1927년 완공한 서당 관선정까지 합친다면 도합 134칸에 달했다. 한국 최대규모의 저택이다. 지금 남아 있는 것만도 110칸에 이른다. 건물이 앉아 있는 담 안쪽의 면적만도 4000여 평. 원래는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이뤄진 부지가 3만여 평에 달한다. 선병국가옥을 담당하는 류재관 문화해설사의 얘기다.

조선 시대의 민간가옥은 땅과 건물 크기가 제한돼 있었다. 이른바 ‘가사(家舍)규제’다. 세종 때 허용된 대지는 대군과 공주 이상은 1170평, 7품 이하 하급직은 156평까지, 여염집은 78평이 상한선이었다. 집의 칸수는 대군 60칸, 공주 50칸, 2품 이상 40칸이었다. 서민 이하는 10칸 이상 집을 지을 수 없었다.이 집은 조선 왕조가 쇠락해 가던 1900년대 초반에 세워진 한옥이기에 조선의 건축규제와는 무관하다.

선병국 가옥은 물론 문화재이비만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본채 맞은편 행랑채에는 고시 공부하는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이 고시원은 역사적인 연원이 깊다. 지금 집주인의 증조부는 전남 고흥에 대흥사라는 사립학당을 세우고 각지의 인재를 모아 무료로 교육 및 시설을 제공했다. 보은으로 집을 옮긴 그 아들은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저택 동편에 관선정을 짓고, 후학을 양성한 것이다.

선영옥이 전남의 소작농에게 땅을 무상지급하자 그에 대한 고마움 고마움의 표시로 철비를 세웠다고 한다. 1922년 새로 길이 만들어지면서 고흥의 국도변에 있던것을 2004년 옮겨왔다. 당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던 셈이다.

선씨 가문은 조선말 대한제국 전후 무역업을 하던 선정훈이 일제강점기 유명한 대동상사를 설립한다. 근대 자본주의 한국 기업의 시초가 아닐까 추정된다. 대동상사는 서울 종로 화신 백화점 자리다. 대동상사에 경영자로 일했던 박흥식은 이를 바탕으로 화신백화점으로 성장했다.

2001년 10월 선씨문중에서 관선정을 창건한 남헌 선정훈씨의 송덕비를 세우면서 선병국 가옥 관선정에 대한 역사적 가치를 비롯 500여명의 동문수학한 명단이 수록된 관선기적(觀善紀蹟) 영인본을 통해 외부에 알려졌다.

이날 제막된 남헌 선정훈 선생 송덕비에는 『대동상사를 설립해 전국 각지와 중국까지 지점을 두어 사업 이득금으로 서당운영의 기금으로 삼는 한편 학교와 면사무소의 부지 수천평을 공익을 위해 희사하고 퇴락한 향교중수도 자담했으며 효자 열녀 등 선행한 이를 찾아 후하게 포상하고 춘궁기와 흉년에는 어려운 사람의 식량도 도와주고 세금을 대납하는 등 사재를 털어 자선을 베풀었다』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당시 관선정은 1944년까지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철거됐다. 그후 1945년 관선정을 다시 경북 서령으로 옮겨서 복원했고 그후 또 다시 경북 상주 동관리로 옮겨 1951년까지 수학을 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보은은 1893년 전국 동학교도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척왜양(斥倭洋)’을 내걸고 충청북도 보은에서 개최한 집회로 동학혁명의 원류가 됐다. 1893년 3월 11일∼4월 2일 충청도 보은 장내리에서는 3만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집결해서 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는 동학교도들이 조정을 상대로 강력하게 민의를 전달하는 시위 형태로 진행됐다.

“그 때까지 조선왕조 전 기간 동안 병란이나 민란 형식이 아니면서 이처럼 대규모 민중들의 집회 형식으로 정치문제 해결을 촉구한 적은 없었다. 보은집회는 그 다음해 벌어진 동학농민혁명의 전사(前史)라는 위치 때문에 학계의 관심이 적지 않다.”고 충북대 신영우 교수는 말했다.

보은에서 대규모 집회가 벌어진 이유가 계속해서 관헌의 탄압을 받아온 최시형 등 지도부가 유사시 피신하기에 적합한 장소이고, 각처의 동학교도들이 모이기 쉬운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시형은 동학의 본부인 대도소를 설치할 장소로 장내리를 선택했고, 1893년 봄 이 곳을 시위 장소로 선정했다는 것이다. 동학 지도부도 이 집회를 경험한 뒤에 집단운동을 이끌 수 있었다.

갑오 농민군의 혁명이념의 하나였던 소작운동은 1950년대 농지개혁으로 그 이상은 실현됐다. 프랑스혁명의 이상인 자유·평등· 박애(형제애)도 1백여년 이상 엎치락 뒤치락하며 발전해오지 않았는가.

보은에는 속리산과 법주사를 빼놓을 수 없다. 법주사를 지나 속리산 세심정 휴게소까지 이어지는 조용한 산책로다. 보은에는 세조가 벼슬을 내린 소나무로 유명한 정이품송이 600년 넘게 살고 있다. 이 외에도 임한리의 솔밭공원과 원정리의 느티나무 등 곳곳의 명소에는 찾아오는 이가 끊어지지 않는다.

김정모 기자
김정모 기자 kjm@kyongbuk.com

서울취재본부장으로 대통령실, 국회, 정당, 경제계, 중앙부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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