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마루에 앉으니 발아래 펼쳐진 풍경이 내 것이로세

내연산 선일대 모습. 선일대는 포항시가 겸재정선 진경산수화 조성사업의 하나로 세운 정자다.

 연산폭포에서 되돌아 나오는 연산다리위에서다. 눈 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보경사를 지나 연산폭포까지 1시간 내내 계곡 건너편 산정상을 스캔했으나 오리무중이던 선일대가 눈에 들어왔다.

놀아운 것은 선일대가 있는 암봉이다. 다리의 남동쪽 산봉우리, 도끼로 장작을 잘라내면 저렇듯 서슬 퍼른 수직의 결이 나올까 싶을 정도로 가파르게 솟아 오른 바위 절벽, 천길 낭떠러지 위에 선일대가 서 있었다. 바위절벽은 푸른 산을 허리에 두르고 허연 속살을 드러낸 끝에 정상에 선일대를 모자처럼 얹고 있었다.

이 장엄한 광경을 보다가 실소가 났다. 만화영화 ‘머털도사’의 한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머털이 도사가 되기 위해 누덕도사를 찾아 죽을 힘을 다해 올랐던 그 산 정상. 구름을 타는 도술없이는 도저히 올라가지 못할 그 산꼭대기를 꼭 닮은 산정상에 선일대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의 만화를 보고 있는 것인가. 실소는 그래서 나왔다.

조선화단에 진경산수화의 시대를 연 겸재 정선을 따라 길을 간다. 1733년부터 2년 남짓 청하현감을 지냈던 겸재는 청하 현감 재임 기간 중 ‘교남 명승첩’과 ‘금강전도’ 등 조선화단에 큰 획을 그은 작품들을 쏟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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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다리에서 본 선일대.
특히 교남명승첩에는 문경지역 이남 58개 명승 고적을 담은 주옥같은 작품이 담겨있는데 ‘내연산 삼용추’도 이 화첩에 들어있다. 겸재는 내연산과 관련해 2점의 ‘내연산삼용추’와 ‘청하내연산 폭포’ , ‘고사의송관란도’ 를 남겼으며 ‘청하읍성도’역시 청하현감 재직시 그린 그림이다.

겸재는 보경사 옆을 지나 연산폭포까지 이어지는 계곡길을 남여라는 가마를 타고 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여는 뚜껑이 없는 가마로 좁은 길이나 산길을 다니는데 용이하도록 제작됐다. 겸재는 청하현에서 보경사까지 말을 타고 보경사에서 부터는 보경사 승려들이 메고가는 남여를 탔을 것이다. 조선의 고관대작의 유산에는 의례 그 산에 있는 절의 승려들이 동원돼 길을 내는 부역을 하고 등산 가이드와 가마를 메는 궂은 일을 도맡아야 했다. 이 때문에 벼슬아치를 가마에 메고 가던 승려들이 일부러 미끄러져 벼슬아치를 계곡 물에 처박아 넣기도 했다고 한다.

내연산은 12폭포가 장관이다. 상생폭포, 보현폭포를 비롯한 12개 폭포가 나름대로 아름답고 매력이 있어 내연산 절경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겸재가 주목한 폭포는 잠룡폭포와 관음폭포, 연산폭포다. 이 세 폭포를 한 장의 그림으로 재현한 것이 ‘내연산삼용추’다. 같은 제목으로 두가지 그림을 그렸다. 호암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이 각각 소장하고 있다. 호암미술관 소장 삼용추도는 겸재가 청하현감으로 있을 당시 산의 얼굴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림의 제일 위부분에 있는 암자는 계조암인데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제일 위에 있는 연산폭포와 그 아래 관음 폭포 사이에 있는 사다리는 오늘날의 연산다리다. 관음 폭포 앞 너른 바위에 도포입고 갓을 쓴 조선의 선비들이 탐승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겸재는 그림 속에 조선 사람을 등장인물로 내세운 최초의 화가인데 그 조선선비들이 내연삼용추에 등장한다.

이 그림은 보면 이백의 시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가 떠오른다.

해는 향로봉을 비추어 자줏빛으로 물들이고
저 멀리 폭포는 마치 긴 강을 걸어 놓은 듯 쏟아지네
그 물줄기 곧추 3천자를 밑으로 흘러 떨어지는
흡사 은하가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듯하네.

내연산 정상의 봉우리 이름이 향로봉이다. 그림 속 연산 관음 잠룡폭포의 그림을 들여다 보니 폭포 뒤에 향로봉이 있고 폭포는 마치 긴강을 수직으로 걸어놓은 듯하다. 물줄기는 3천가 밑으로 떨어지고 별들이 하늘에서 줄지어 떨어지는 모습이기도 하다. 혹시 겸재는 이백의 시에서 그림의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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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일대에서 본 연산다리와 관음폭포
‘청하연산폭포도’도 내연산과 선열대를 가운데 두고 가장 자리에 주변 산수를 배치했다. ‘비류직하飛流直下’하는 연산폭포의 물줄기를 선열대 너른 바위에 앉아 구경하는 사람 가운데 두고 그림의 상단에는 계조암을, 중단 좌쯕 끝에는 두 채의 암자 백운암과 운주암을 배치했다. 이 두 채의 암자를 합쳐 선열대라고 했다.

선열대의 논쟁은 여기서 시작됐다. 포항시는 진경산수(眞景山水)발현지 조성사업의 하나로 지난해 해발 298m 암봉에 2억여원의 예산을 들여 전통 8각정자(가로·세로·높이 각각 8m)를 지었는데 바로 선일대다. ‘신선이 학을 타고 비하대(飛下臺)에 내려와 삼용추(三龍湫)를 완성한 후 이곳 선일대에 올라와 오랜 세월을 보냈다’고 전해지는 곳이며 국토지리원 자료를 인용해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향토사학자의 생각은 다르다. 조선시대 문장가인 황여일의 ‘유내영산록’등 유산기와 겸재의 ‘내연산폭포도’를 근거로 선일대가 들어선 자리는 선열대이며 선열대에서 20여 미터 능선쪽으로 떨어진 곳이 선열암이 있던 터 인만큼 정자의 이름을 선열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판명을 놓고 논란이 진행중인 선일대로 가기 위해 연산폭포에서 관음폭포로 내려와 계곡을 가로질러 봉우리를 오른다. 선일대까지 250m에 목조계단과 데크가 놓여져 있다. 가파른 계단이 올라가면서 탄성이 절로 난다. 발아래에서는 잠룡폭포에서 ‘비류직하’하는 거친 물소리가 끊임없이 들여오고 선일대로 향하는 길은 깊은 적막에 잠겼다. 길도 없는 수직의 가파른 암벽을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올랐을까. 20여분을 숨가쁘게 올라가니 선일대가 나온다. 정자는 평범하다. 전망대 수준의 휴게소 정도로 보면 되겠다. 정자는 그만한데 해발 298미터 봉우리 꼭대기 넓은 바위 위에 세월 풍파를 잘 견디어낸 소나무가 대견하다. 찬바람 비바람에 꼿꼿한 선비의 기개가 확연하다.

▲ 김동완 자유기고가
정자 안에 들어서니 내연산 봉우리들이 어깨를 맞대고 펼쳐진다. 마치 연꽃 잎 처럼 둘러쳐저 있어 마음대로 ‘연봉’이라 이름 짓는다. 굽어보니 연산폭포 앞 다리와 관음폭포가 발아래 아득하다. 신선이 숨어들었다는 ‘선일대’ 같기도 하고 선정의 열락을 표현한 ‘선열대’ 같기도 하다.선일대에서 남쪽으로 20m 떨어진 평지에는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는데 겸재의 내연산폭포도에 보이는 선열암이다. 백운암과 운주암 두채의 암자가 있었던 흔적이다.

선일대는 포항시가 겸재정선 진경산수화 조성사업의 하나로 세운 정자다. 정자의 이름은 국토지리원 같은 공인된 기관의 자료에서 찾아서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선비들의 유산기와 각종 자료에는 이곳이 선열대였으며 그 옆에 있던 암자가 선열암라고 설명하고 있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발현지 조성사업을 하면서 왜 그림에 나오는 선열대와 선열암이라는 이름을 빼고 선일암으로 현판을 지었는지 대답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조사와 토론을 거쳐 제 이름을 찾아주는 노력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김동완 자유기고가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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