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학자 길재 추모 정자…영원토록 변치않는 선비의 절개를 만나다

채미정

아도화상이 구미시 해평면 태조산 기슭에 이르렀을 때였다. 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했다. 화상은 이곳에 절을 짓고 꽃의 이름을 따 ‘도리사’라 했다. 신라 최초의 사찰로 전해지고 있다. 그 때쯤 이었을 것이다. 아도화상은 어느 날 산세 웅장한 산길을 지나는 참이었다. 해가 지는데 산 너머 저녁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까마귀가 황금색으로 물드는 광경을 보았다. 이 장엄한 광경에 마음이 움직였던 그는 산 이름을 금오산이라 불렀다.

원래는 대본산이었는데, 중국의 오악 가운데 하나인 숭산에 꿀리지 않는다 하여 남숭산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아도화상이 저녁 노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황금빛 까마귀를 본 이후 금오산으로 족보를 바꾼 뒤 오늘날에 이르렀다. 1800여 년 전 일이다. 생각해보면 아도는 대단한 네이미스트(namist)였다. ‘복숭아꽃 오얏꽃 활짝 핀 절’, ‘황금색 까마귀 노을 속으로 사라져 간 산’, 뚝딱뚝딱 짓는 이름마다 절묘하지 않은가. 풍미 가득한 커피를 마실 때처럼, 이야기를 잔뜩 품은 그림을 볼 때처럼 스토리와 의미가 풍성해지지 않은가.

채미정에서 본 구인재

채미정은 금오산 초입에 있다. 금오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등산로로 내려오면 숲이 울창한 계곡이 나오는데 계곡 건너편에 있다. 계곡과 채미정 사이에는 석교가 있다. 석교 앞에는 하마비와 교과서에 나오는 조선시조 ‘회고가’비가 있는데 하마비는 조선시대에, 회고가비는 근래에 세운 것이다.

채미정은 고려말의 학자 길재를 추모해 세운 정자다. 길재 사후 350년이 지난 1768년 (영조 44)에 세워졌다. 당초 경북도 기념물이었으나 금오산의 웅장한 산세에다 정자 아래를 흐르는 맑고 아름다운 계곡, 정자 자체의 독특한 건축구조 등에 힘입어 명승 52호로 승격됐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어졌다. 정자의 정중앙에 온돌방을 두고 사방에 우물마루를 깔아 대청을 꾸몄다. 방의 네 면은 벽체 없이 각각 2분합 들문을 설치해 문을 들어 올리면 사방이 개방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둥은 모두 16개를 뒀는데 원통형 화강석 주초 위에 나무로 둥글게 처리했다.

채미정 앞 계곡

사방이 개방된 정자 안은 섭씨 36℃를 오르내리는 찜통 더위에도 불구하고 냉장고에 들어앉은 듯 시원하다. 계곡을 지나는 찬바람에다 수백년 된 느티나무가 만들어내는 그늘에 더해 떼창하는 매미소리가 청량하기 그지 없다. 뜰 앞의 백일홍은 작열하는 태양아래 여전히 붉고 정자 아래 계곡에는 물놀이에 여념이 없는 아이들이 나무처럼 푸르게 푸르게 짙어간다.

채미정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따먹다가 굶어 죽은 백이 숙제의 고사에서 따온 이름이다. 둘은 상나라 말엽 고죽국 군주의 아들이다. 주나라 무왕이 부친의 상중에 상나라 주왕을 정벌하는 것을 보고 부자지간의 예의와 군신지간의 의리를 저버렸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나물을 캐 먹고 살다가 죽었다. 그들이 굶어 죽기 전에 지은 시가 바로 ‘채미가’다.

채미정 정면
조선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한 길재가 조선 500년 역사를 관통하는 동안 줄곧 지조 높은 선비로 추앙을 받게 된 데는 태종 이방원의 공이 컸다. 길재는 지금의 구미시 고아읍 봉한리에서 태어나 11세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도리사에서 글공부를 했다. 관직에 진출한 아버지를 따라 개경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정몽주, 이색, 권근을 스승으로 삼아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

이때 길재는 운명의 인물과 만난다. 그보다 14살이나 어린 이방원이다. 길재는 31살에 사마감시에 급제를 했는데 이방원은 길재보다 1년 앞서 16세의 어린 나이로 급제를 했다.길재와 이방원은 한동네에 살면서 두터운 정을 쌓았다. 이성계의 아들 중 유일하게 문과급제를 한 이방원은 길재의 됨됨이와 학문을 대하는 태도 등에 깊이 감복했다.

채미정 앞에 있는 길재의 ‘회고가’비
길재는 38세 되던 해 고려가 망해가는 나라임을 깨달았다. 고향에 계신 노모를 봉양한다는 핑계로 벼슬을 내려놓았다. 그의 벼슬은 최고 정무기관인 문하부의 7품직인 문하주서였다. 낙향한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금오산의 산중마을인 대혈동에 들어가 하루 끼니 걱정하며 가난한 생활을 했다.

세월이 10년쯤 지나 조선 조정에서 연락이 왔다. 개경에 살 때 한동네 살며 학문을 토론하던 이방원이 그를 기억해냈던 것이다. 조선의 실권을 다 틀어쥐고 있던 이방원은 ‘바지사장’에 불과한 정종을 통해 그를 한양으로 불러 들였다. 그에게 주어질 벼슬은 태상박사였다. 한양에 도착한 길재는 이방원을 만나 옛정을 생각해 벼슬자리를 내주는 것에 감사하지만 두 임금을 모시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므로 철회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고려의 사람이니 조선의 왕이 내린 벼슬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왕의 명을 정면에서 거절한 것이다. 목숨을 내거는 결기가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다.

하마비
이방원은 길재의 고사를 받아들였다. 어릴 적부터 오래 교유해온 그의 성정을 인정했던 것이다. 오히려 ‘강상불역의 도’라며 칭찬했다. 길재 이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정종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고 집안형편을 도와주라는 명까지 내렸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개경에 들렀던 것으로 보인다. 개경에서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떠나온 지 꼭 11년만이다. 그는 문을 닫은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세월의 덧없음, 권력의 허망함, 흥망성쇠의 무상함을 노래했다. 채미정 입구에 서 있는 ‘회고가’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 일을 통해 길재는 절개 높은 선비의 대명사로 조선 선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다. 금오산 깊은 곳에 살던 그에게 공부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고 벼슬살이 하는 이들이 곤궁한 살림을 돕기 위해 팔을 걷었다. 그는 이런 저런 도움을 거절하며 여전히 꼿꼿한 조선의 선비로 살았다.

죽은 뒤에도 그를 추모하는 글과 비가 줄을 이었다. 채미정 뒤편을 가면 길재 유허비와 경모각이 있다. 경모각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숙종의 어필 오언구다. “금오산 아래 돌아와 은거하니/ 청렴한 기풍은 엄자릉에 비하리라/ 성주께서 그 미덕을 찬양하심은/후인들의 절의를 권장함일세”

길재의 묘소가 있는 구미시 오태동에 ‘지주중류(砥株中流)’ 비가 서 있다. ‘지주중류’란 인동현감 류운룡(柳雲龍)이 길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지주란 중국 황하 중류에 있는 지주산이다. 황하가 범람할 때마다 탁류가 이 산에 부딪치지만 쓰러지지 않는 모습이 충절을 굳게 지킨 길재를 닮았다. 비석 앞면의 ‘지주중류’는 중국의 명필 양칭츄안의 글씨이고 뒷면의 글은 류운룡의 동생 류성룡(柳成龍)이 썼다.

김동완 칼럼리스트.jpg
▲ 김동완 자유기고가
충남 금산 청풍서원내 청풍사에는 자주중류 비와 나란히 ‘백세청풍’비가 있다. 금산은 길재의 아버지 원진이 금주지사로 부임할 때 따라가 살았던 곳으로 청풍사는 길재의 영정이 모신 사당이다.백세청풍는 오래도록 부는 맑은 바람, 즉 영원토록 변치 않는 맑고 높은 선비의 절개, 길재가 후세에 오래도록 풍기는 고아하고 맑은 향기를 말한다. 실제 길재 자신도 금오산 은거하면서 백이숙제의 절의를 흠모해 가을에 국화꽃을 꺾어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고 하니 길재를 추모해 지은 정자 이름으로는 ‘채미정’이 딱 들어맞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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