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파도와 순풍 기다리며…울릉·독도 순찰 나선 수토사들의 숙소

▲ 조선시대 울릉도를 조사하고 관리하던 수토사들이 울릉도를 가기 위해 순풍을 기다리던 대풍헌.
‘음수사원’(飮水思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최근 항저우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면서 뼈 있는 말을 남겼다. ‘물을 마셔 갈증을 해소했으면 그 근본인 우물을 누가 팠는지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음수사원 굴정지인 飮水思源 掘井之人)’는 뜻인데 양국이 한반도 사드 배치를 놓고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형편이다 보니 발언의 의도를 놓고 설왕설래한다.

울진 기성면 ‘대풍헌’ 현판 가운데 ‘월송영장 황공 영세불망지판’이라는 현판에도 ‘음수사원’과 비슷한 말이 나온다. 황씨 성을 가진 월송만호진의 영장이 구산리 마을에 재물도 내주고 바다를 순찰하면서 주민들의 어려움을 많이 살펴줬던 모양이다. 현판에 그런 이야기를 쓴 끝에 그 고마움을 ‘열매를 먹으며 그 뿌리를 몰라서 되겠는가. 샘물을 마시면서 그 근원을 분별하지 못해서 되겠는가…마음에 새기고 글로 새겨서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특별히 열매의 뿌리와 샘물의 근원을 생각하게 할 뿐이다’라고 썼다.

대풍헌 현판

▲울릉도가는 바람을 기다리는 집, 대풍헌

대풍헌은 울진군 기성면 구산1리 202번지, 구산항 옆에 있다. 구산마을은 평해 구씨(平海 丘氏) 시조 마을이다. 당나라 장수 구대림이 663년(신라 문무왕 3) 일본에 사신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이곳에 터를 잡고 세거하게 됐다. 구씨 마을이라고 ‘언덕’구자를 써 구산이라고 하고 마을 뒷산이 거북을 닮았다고 ‘거북’ 구자를 써 구산이라고도 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는 강원도 평해군 근북면 구산동이었는데 평해 구씨 1세조인 구본혁이 살던 고려 공민왕때도 이곳이 평해였기 때문에 본관을 ‘평해’로 했다고 한다.

대풍헌은 바람을 기다리는 집이다. 울릉도로 향하는 순풍을 기다리는 ‘수토사(搜討使)’들이 일시적으로 머무는 집이다. ‘수토’는 ‘수색하여 토벌’한다는 뜻이다. 삼척진영 사또와 월송만호가 3년마다 돌아가면서 울릉도 독도에 살면서 양민을 괴롭히는 일본인들을 수색하여 토벌했는데 그 출발점이 구산포에 있는 대풍헌이었다. 대풍헌에서 ‘완문’(1871년 제작)과 ‘수토절목’(1883년제작)이 발견돼 학계의 이목을 끌었는데 ‘완문’은 조선시대 관부에서 백성들에게 어떤 사실을 알리거나 특전을 부여할 때 발급하는 문서다. 사실을 확인하거나 권리나 특권을 인정하는 확인서의 성격이다. ‘수토절목’은 수색하여 토벌할 때 지켜야할 12개 조항을 적은 것이다. 완문과 수토절목을 통해 수토사의 역할과 마을 주민들이 수토를 위해 부역하거나 도와줘야할 사항들이 적혀있다.

대풍헌 내부에서 본 구산항

▲울릉도 수토정책이 고스란히 담긴 ‘영세불망지판’

바람이 불지 않아 출항이 늦어지면 수토전이나 양식을 내야 하는 구산동, 직고동 구암동, 야음동 등 9개동 주민들의 부담이 늘어났다. 완문과 수토절목에는 주민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방안들이 적시돼 있다. 가령 돈 120냥을 각 동에 나눠주고 그 이자로 수토비용을 충당하라고 적고 있다. 고깃배나 소금배가 포구에 들어오면 명태는 1뭇에 1전, 소금은 한섬머리에 5푼으로 세를 받아 충당하라고도 적시하고 있다.

대풍헌에는 문화재로 인정받은 현판이 모두 17점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영세불망지판’ 현판 6점이다. 모두 수토와 관련해 벼슬아치들이 대풍헌 인근 마을 주민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고통을 덜어준 공에 감사하는 내용이다.고종 8년(1871년) 4월에 이 마을 주민들이 쓴 ‘평해군수 이용익 영세불망지판’ 에 그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다.“구산진(구산항)은 울릉도 수토때 바람을 기다리는 곳인데 삼척포영과 월송 포진이 간년으로 오고 갈 때 쓴 비용이 너무 들어 매우 현명한 관리라도 어려운 점이 있었다. 이제 우리 수령 이용익씨께서 심히 근심하고 100금을 내어 균역소가 있는 본소에 보내주면서 이자는 2푼5리 정도로 했다. 매년 이자조로 봄 가을로 나누어 내어주어 본진(구산진)에서 보충하여 쓰는 자산이라…동민된 사람들이 그 열매를 먹으면 그 뿌리를 알고 그 쌀을 먹으면 그 밭을 알게 되었으니 항상 명심하여 영세토록 잊지 않게 하고자 한다”

구산항에 있는 독도모형
대풍헌 현판과 대풍헌에서 나온 고문서는 수토정책과 관련된 규칙이 세세하게 적혀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당시 서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단서가 곳곳에 드러나 흥미롭다. 구산항에 소금배와 미역채취선이 들어오고 고깃배가 드나들고 있는 풍경이 눈에 잡힌다. 또 전쟁과 같은 수색과 토벌을 앞두고 바람을 기다리는 눈에 핏발 선 조선의 남자들이 그려진다. 거센 파도를 헤치고 바다를 건너 거칠고 사나운 무뢰배 일본인들을 치러 가는 그들의 심정이 어땠을 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1694년 안용복도해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울릉도 수토정책이 시작됐다. 대풍헌과 구산항 인근의 민가에서 찾아낸 기록들을 통해 1895년 11월까지 200년간 실시됐을 가능성을 열었다. 그 전에는 수토정책이 1894년 12월에 폐지됐다고 알려졌다. 또 수토 정책은 처음에는 3년마다 실시됐으나 나중에 2년으로 변경됐으며 수토 출항지는 삼척의 삼척포? 장오리진, 울진의 죽변진과 평해의 구산포 등 여러 곳이었으나 1787~1799년 부터는 평해 구산포로 기점이 통일 됐다. 새로운 가능성과 역사적 사실을 찾아내기까지 심현용 울진군 봉평신라비전시관 관장의 노력이 컸다.

구산동사 현판
▲대풍헌, 조선의 독도 실효적 지배 확인하는 역사적 자료

대풍헌기록의 또다른 역사적 의미는 ‘조선왕조실록’ 등에 19세기에 들어와 울릉도(독도)에 수토사를 파견했다는 기록이 거의 없어 수토사파견 정책이 없어진 것인지 정책은 있는데 기록이 없는 것인지 알지 못했는데 대풍헌의 현판과 고문서에서 조선이 지속적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관장해왔던 것으로 밝혀져 독도의 실효적 지배를 확인시키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대풍헌은 본래 이 마을 동민들의 회의장소인 동사였다. 때문에 건물 정면에는 ‘대풍헌’ 현판과 ‘기성구산동사 箕城龜山洞舍’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동사 건물을 대풍헌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강릉산인 김학인이 지은 ‘구산동사 중수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새로이 대풍헌이라는 화려한 이름을 거니 파도소리는 방안까지 들리고 구름 그림자가 나무 난간에 드리웠으며 땅은 천년의 터를 열었고 문앞에는 먼곳까지 운행하는 배가 정박한다. 달빛이 아름답게 비치고 아침에 나갔다가 저물녘에 어부 노래 부르며 돌아오는 곳, 산과 바다 운치 좋은 이곳 중 제일승지 정사(精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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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2010년 복원한 대풍헌은 그 역사적 의미와 시대적 사명을 수행한 역할에 비해 초라하다. 민가 사이를 뚫고 자동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갈 만한 골목 끝에 엎드려 있다. 울진군이 대풍헌과 월송정이 있는 월송포진 일대에 ‘수토문화나라’를 조성해 국내 대표적인 ‘국토영유권 역사문화관광권’을 개발한다고 하니 기대가 크다. 대풍헌에서 구산항으로 나오면 조선의 군사들이 바람을 기다리며 술잔을 기울였을 법한 항구에 독도 모형이 세워져 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험함 파도를 넘어 울릉으로 향했으며 울등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였음을 피로 입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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