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귀촌으로 전원생활 이상세계 누릴 수 있는 낙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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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름진 옥토를 만드는 남한강이 있는 천혜의 여주
‘여강(驪江)’이 꿰뚫고 지나가는 경기도 여주시는 서울 사람들이 경기도내에서 찾는 전원 생활 1순위 지역으로 손꼽힌다. 여강은 여주(驪州)에 흐르는 남한강의 별칭이다. 여주의 옛 이름 황려에서 따왔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이 고을이 황려현이었다. 여말에 여흥군을 거쳐 1469년(조선예종1) 여주목으로 지금의 고을 이름이 됐다.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은 여주시, 동쪽은 강원도 원주시다.

여주는 넓은 들녘과 비옥한 땅이 낙토라고 부를 만하다. 예로부터 질 좋은 쌀의 산지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궁중에서 사용되는 그릇 등을 생산했던 사옹원(司饔院)의 분원이 있어 도자기로도 이름난 곳이다. 오늘날 여주가 도자기 축제로 유명한 것이 다 이런 연유다. 조선 시대 한강수계의 나루터 중 큰 곳으로 알려진 이포나루와 조포나루가 있었다.

여강이라 부르는 여주의 남한강은 주변의 풍정과 어우러지며 그 수려함이 뛰어나다. 조선시대 문인 서거정(徐居正)은 여강에 대해 “여강 물은 월악(月岳)에서 근원하여 달천(獺川)과 합하여 금탄(金灘)이 되고, 앙암(仰巖)을 거쳐 섬수(蟾水)와 만나 달려 흐르며 점점 넓어져 여강이 되었다. 물결이 맴돌아 세차며 맑고 환하여 사랑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이런 곳에 명촌(名村)이 없을리 만무하다. 여주에서 예로부터 손꼽히는 마을은 외사리, 금당리, 매룡리.

△금반형의 여주 흥천면 외사리

하늘로 치솟은 천덕봉(天德峯)은 흥천면 외사리(外絲里)의 비옥한 들녘과 구름을 감싸 원적산(圓寂山) 낙맥(落脈) 중 가장 높은 정상에 자리잡아 여주, 이천, 광주 등지의 3개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바로 그 산기슭 아래 자리한 외사리, 상대리, 현방리 언저리 40리 안을 금반형이라 부른다. 그것이 어디를 꼬집어 말하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지만.

옛 사람들이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도 하고 마치 옥녀가 상을 들고 있는 형세여서 옥녀봉반형(玉女奉盤形)이라고도 한다. 이 금반형에 집터를 잡으면 극(極)을 이뤄 산줄기와 물줄기가 태극형으로 서로 어울리는 곳이다. 남쪽에 조산(鳥山)이 있고 장관대(壯觀臺)에 바로 산과 물이 엉키듯 사수동파(四水同派)가 백리천(百里川)하여 서로 휘감아싼 이 지역이 금반형(金盤形)이다. 금반형 소문이 방방곡곡에 퍼져 전국 각처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정착하여 동리를 이룬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때 명(明) 군 사령관로 왔던 이여송(李如松)이 금반형에 대한 비기(秘記)를 알아 두사충(杜士沖)에게 금반형에 가서 살라 했다는 전설이다. 숙종 때 정승인 김관주(金寬柱)가 청(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어느 고관이 조선에 금반형이라고 하는 곳이 있으니 한번 찾아보라고 하며 비기를 수록한 문헌을 주었다. 김관주가 귀국하여 관직에서 물러난 다음 이곳 금반형에 와서 아흔아홉 칸의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금반형이라 부르는 외사 2리에는 쌀이 너무 많이 생산되어 흙으로 쌀두지(뒤주)를 만들어 보관했다 해서 흙두지 마을이 있으며, 해방후 지금까지 흉년을 모르고 지냈다고 한다.



△여주 가남면 금당리

쌍마(雙馬)가 치달아오를 듯 천마산(天馬山)이 좌정한 언저리가 금당리(金塘里)이다. 경미년 난리를 당한 후 금당리로 바뀐 것. 6·25 전쟁 등의 전란을 겪어온 백천 조씨(白川趙氏)가 400여 년(14대)을 지켜 살아온 마을이다. 산세의 높고 낮은 굴곡이 절묘하며, 꽃봉오리처럼 에워싼 영마루에 눈부신 햇살을 받은 뭉게구름은 솜처럼 피어난다. 금당리는 조선중기 함경북도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 겸 경성도호부사(鏡城都護府使) 조상주 장군(趙相周 將軍)이 태어나 자란 고장이란다. 멀리 오압산을 넘보면서 마치 쌍마가 적진을 향해 휘달리는 형세인데 사면에 높고 낮은 굴곡을 이루며 자리한 산명(山名)과 동명(同名)만 보아도 가히 짐작이 되는 곳이다.

『정감록』에 “양금지간(兩金之間)에 가활만인피란지지(家活萬人避亂之地)하여 십이실지중(十二室之中)”이라 했다는데 군내 십이실은 구비실, 우뢰실, 모래실, 덕실, 음실, 품실, 다리실, 새미실, 마구실, 어실, 각기실, 오금실을 뜻하고 양금지간은 금대와 금교동 사이를 말하니 바로 금당이라는 것이다.



△여주시 매룡동

크고 작은 산봉(山峯)을 물그림자 지며, 즐펀한 들녘을 운치 있게 여강(驪江)을 굽어보듯 좌정(坐定)한 산이 황학산(黃鶴山)이다.

아늑한 이곳에 자리잡은 천년고찰 신륵사(神勒寺)가 있다. 강변 고찰로 유일한 여주 신륵사 경내에는 조선후기 권신 판돈령 김병기(金炳冀) 송덕비가 눈에 띈다. “김병기는 신륵사에 시주하여 법당과 구룡루 등 신륵사를 크게 중수했고, 여주의 대화재로 백성들이 고통 받을 때 사재를 털어 구휼했다”고 여주시청 추성칠 홍보팀장은 말했다. 김병기는 판돈령(判敦寧) 좌찬성 등 정승과 판서 사이 종1품을 지냈으며 흥선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여주에 낙향해 살았다. 흥선대원군이 아들을 낳으려면 김병기 같은 사람을 낳으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웅특했다는 그는 조선말 양요로 한성에서 양반들이 탈출하자 머나먼 여주에서 가솔을 이끌고 입경했다는 등 족적을 남겼다. 양반이 아닌 전라도 판소리꾼 송흥록에게 벼슬을 줘 판소리가 전국에서 활개를 치게 하는 한류를 만들어냈다.

연촌(淵村) 마을 옆 동리 양촌(陽村)이란 곳을 지나면 한 동리가 있는데 승천하는 용의 비늘이 매화꽃처럼 흩날려 떨어진 동리라 하여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으로 마을 이름조차 매룡동(梅龍洞)이다. 일대에 영월루(迎月樓)라는 누각이 있는데 서하군(西河君) 임원준(任元濬) 선생이 당(堂)을 짓고 사우(四友)라 이름하여 경·목·어·초(耕·牧·漁·樵), 즉 농부, 목동, 어부, 초부와 같이 벗하며 지내자는 뜻에서 취한 편액을 달았다. 이 황학산(黃鶴山)을 승산(勝山)이라고 부르는데, 이 승산(勝山) 언저리에서 세종대왕 어머니 원경왕후, 명성황후 여흥 민비 등이 태어난 것이다. 민비는 조선말 정국의 여장부였으나 왕조를 지키고자 청나라 일본 군대를 끌어들여와 나라를 패망시키는 장본인이 됐다.

여주에는 고려왕조를 지키려다 스러진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의 한이 서려 있다. ‘驪江迷懷(여강미회)’라는 그의 절명시다.



끝 없는 천지에 끝 있는 인생이로고(天地無涯生有涯)

호연(浩然)한 뜻 어디로 돌아가련가(浩然歸志欲何之)

여강(驪江) 한 구비 산은 그림 같은데(驪江一曲山如畵)

반은 단청 같고 반은 시 같구려(半似丹靑半似詩)



이색은 1396년 잃어버린 왕조의 마지막 충신으로서 강가에 서 죽음이 임박한 운명을 예감했다. 돌아갈 곳이 없는 막막함을 여강의 아름다움에 애써 감추려했다. 한 구비 그림 같은 여강 앞에서 토해내는 한 편의 시다. 역성혁명을 반대했던 이색은 경상도 영해 출생의 한산이씨로 여말의 거의 모든 사대부들은 그에게 배우지 아니한 자가 없었다. 여강으로 유배를 가던 도중 감영 벼슬아치가 주는 술 한 잔을 받아 마시고 죽었다. 야사에 전하는 독살설의 연원이다.



역사에서 흥망성쇠를 지켜본 여주는 21세기 귀촌 귀농 낙향의 땅으로 거듭나고 있다. ‘자랑스런 여주인상’을 받은 김영래 내나라연구소 이사장은 “도시에 살아도 늘 마음은 농촌에 살았다”고 술회했다. 그는 경남대 아주대 교수, 한국정치학회장,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상임공동대표, 동덕여대 총장을 지냈다.



일찍이 서거정이 자연에 귀거래(歸去來)하고 싶다는 소망을 읊은 시다.



사람의 생애 백 년도 못되거늘(人生百年內)

아직 백 년도 차지 못했네(百年亦不滿)

세상의 티끌 속에 얽혔으니(況?塵網中)

어찌 맑고 한가로이 지내리(何能任蕭散)

저 여강(驪江) 물 바라보니(瞻彼驪江水)

물 맑아 갓끈 씻을 만 하네(水淸纓可澣)

내 세속에 적합한 취미 없어(我無適俗韻)

시세(時勢)의 차고 더움 못 따르지(不隨時冷暖)

늙어버렸구나 내 벼슬 버리고서(老矣謝簪笏)

적송자(赤松子)와 함께 살리라(行與赤松伴)



전원생활을 이상의 세계에서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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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몰에 장관인 여주 남한강과 황포돛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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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교가 보이는 여주 남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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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 시가지(신륵사가 보이는 여주 영월루)


김정모 기자
김정모 기자 kjm@kyongbuk.com

서울취재본부장으로 대통령실, 국회, 정당, 경제계, 중앙부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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