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조선에 이어 삼국유사는 마한에 관한 사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본문은 다음과 같다.

위지(魏志)에 말했다. “위만(魏滿)이 조선(朝鮮)을 치자 조선왕 준(準)은 궁인(宮人)과 좌우 사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서쪽 한(韓)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열어 마한(馬韓)이라고 했다.”

또 견훤이 고려 태조에게 올린 글에도, “옛적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났으며, 이에 백제(百濟)가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최치원(崔致遠)은 말했다. “마한은 고구려(高句麗)이고, 진한(辰韓)은 신라(新羅)다.”

여기에 대하여 일연은, 신라가 먼저 일어나고 고구려가 일어났기 때문에 마한이 고구려라는 것은 뒤에 일어난 고구려가 마한 땅을 차지했다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금마산을 착각하여 마한을 백제라고 한다고 주장한다.

이상의 기록에서 몇 가지 쟁점을 논하고자한다. 첫째, 조선왕 준이 위만의 공격을 받고 배를 타고 바다로 한나라 땅으로 피해 가서 마한을 세웠다는 것이다. 먼저 조선왕 준이 기준(箕準)이냐는 것인데, 기준이라면 기자조선의 후예가 된다. 조선시대에는 당연히 기준이라 하였으나, 근래에는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이며 한씨, 곧 한준(韓準)으로 보고 있다. 참고로 ‘동국문헌비고’에 따르면,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은 기자(箕子)의 40세손으로서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았으며,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이 문제는 기자조선을 인정하느냐 등의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어 이 자리에서 더 이상 상론하기 어렵다.

둘째, 조선왕 준이 달아난 출발지와 도착지의 문제다. 기자조선 또는 고조선의 수도를 평양으로 산정하는 쪽에서는 당연히 평양 부근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충청도나 전라도 지방으로 갔다고 한다. 그러나 요하부근에 고조선의 수도가 있었다고 이해하는 측에서는 요하에서 한강(漢江) 이남으로 이동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평양에서 남쪽으로 달아날 때, 과연 배를 타고 해로로 가는 편이 육로로 가는 편보다 효율적인 지는 모르겠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익산군조에서는, 기자의 41세손인 후조선왕 기준이 위만을 피해 이곳에 와서 마한을 세웠는데, 뒤에 온조왕이 병합하여 금마저(金馬渚)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윤여동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풍윤현이 마한의 도읍인 월지였으며 금마저였다고 한다. 환향하공원의 형상이 말과 같기 때문이라는 등의 이유다.

종래에는 준왕이 남하하여 기존에 있던 마한, 진한, 변한을 합하여 국호를 한(韓)이라 하고 한왕(韓王)이 되었는데, 그 도읍이 마한의 월지국이라고도 한다.

여하튼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마한과 삼한 등의 문제는 명쾌히 밝히기 어려운 우리 고대사의 수수께끼다. 심지어 단재 신채호는 삼한(三韓)은 원래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큰 나라였다고 한다. 그 삼한이 고조선 쇠퇴이후 남하하여 한반도의 삼한이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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