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 삼국유사목판도감소

삼국유사는 역사학자가 아닌 승려 일연에 의하여 저술되었고 신화나 전설, 설화가 많기 수록되었기 때문에 정사(正史)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과 가락국의 역대 왕력이 기록되어 있고 식견이 높은 지성인에 의하여 설계, 집필 되었으므로 개성 있는 당당한 역사서로 볼 수 있다. 일연은 몽골의 침략으로 백성이 재난에 처하고 수많은 문화재가 파괴되는 현장을 지켜보았다. 한때 천자국의 위엄을 지녔던 조국의 산하가 일개 속국으로 전락하는 오욕의 시기를 당하여, 민족의 역사정신을 고취하는 위국위민의 기원을 삼국유사에 담았다. 


삼국유사가 존재함으로써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지식과 긍지는 엄청나다. 그 몇 가지 예를 들면, 민족의 시조가 단군왕검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였으며 고조선의 건국이 기술됨으로써 근 5천년의 역사를 가진 유구한 전통의 나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이외에도 부여와 발해를 소개하였고 자칫 잃어버릴 뻔 했던 가야국의 시말(始末)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신라인들의 높은 문화의식과 정신세계를 오늘에 전해주고 아름답고 순수한 향가 14수를 기록하여 우리의 문학사를 풍요롭게 하였다.

삼국유사를 읽어보면 오늘의 대한민국, 특히 경북정체성의 핵심 부분이 와 닿는다. 이 정체성을 찾아 음미하고 소화하여, 오늘의 한국과 경상북도에 과연 잘 계승되어 있는지 살펴야 한다.

그리하여 오늘의 상황이 정체성혼미 같은 상태라면, 과감히 그 치유와 정체성회복에 나서야 한다. 왜냐하면,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훌륭한 유전자를 발휘하여 세계수준의 높은 문명을 과시하였기 때문이다. 거의 기록이 전하지 않는 고대사(古代史) 기간을 제외하고 통일신라시대는 아마도 우리민족 최고의 전성기였다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그 시대를 산 인물들의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는 삼국유사를 통해서 신라의 정체성, 나아가 경북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삼국유사가 말해주는 우리의 정체성은 대략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우리민족의 근원적인 유전인자 속에 함유되어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천손족(天孫族)과 곰토템족, 호랑이토템족의 기질, 둘째 풍류(風流)와 신도(神道)의 전통, 셋째로 찬란한 신라문화를 낳은 유전인자, 넷째는 순수하고 정의로운 신라인의 인품, 다섯째 충효의 정신이다.

첫째, 삼국유사를 토대로 민족의 근원을 고찰할 때, 우리는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이 공존하다가 하늘의 자손으로 자부하는 높은 문명인의 도래를 만났으며, 여기서 환웅의 천손족과 웅녀의 곰족이 연맹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정부가 구성되었고 호랑이족은 핵심계층이 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곰을 조상으로 여기고 신성시하는 토템은 유라시아 대륙 곳곳에 퍼져있었으므로 우리 민족의 유전자 속에는 유라시아 초원을 누비던 대륙적인 기질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유전자를 타고난 신라는 장안과 천축으로 공부하러 갔고 실크로드를 넘어 이스탄불까지 교역하였다. 물론 낙천적이면서도 하늘을 공경하고 하늘과 일체가 되려는 환웅족의 천인합일사상도 민족유전자의 핵심일 것이다.

둘째, 풍류(風流)와 신도(神道)의 전통이다. 진흥왕이 풍월도를 세워야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화랑도를 창설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다. 풍월도는 곧 풍류도이니, 바람 불고 물 흐르듯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살아가라는 사상이요 실천철학으로서 미륵선화와 영랑, 술랑, 남석랑, 안상랑의 신라사선으로 대표된다. 게다가 하늘과 땅과 인간을 연결하는 고리에 신명(神明)이라는 존재를 인정하여, 매사 신도(神道)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좋다는 믿음도 공유하였다. 삼국유사 기이편은 이 같은 민중신앙의 실태를 박혁거세와 알영부인, 김수로왕과 김알지의 탄생에 설화적으로 묘사한다. 선도성모(仙桃聖母)의 경우는 도교류의 신도로 적고 있으며, 의해편과 신통편에는 인간의 생각과 능력을 초월하는 고승들의 일화와 신이한 사적을 많이 수록하고 있다. 오어사의 혜공과 원효의 설화, 공중을 걷는 의상과 그 제자들, 문두루법으로 당나라 50만 군을 물리치는 명랑법사의 이야기 등 그 사례는 많다. 풍류신도는 화랑도로 재탄생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당나라를 물리치는 등, 튼튼한 신라를 건설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고려이후 사선악부(四仙樂部)와 팔관회 등으로 계승되다가 무속으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경북인과 우리민족 내면의 집단무의식에는 하늘과 천지신명을 공경하고 대자연과 닮으려는 풍류의 정신이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하겠다.

셋째, 찬란한 신라문화를 건설한 문화인자가 우리에게 있다. 김범부 선생이 갈파했듯이, 신라는 풍류정신을 토대로 고도의 정신문화를 곷피웠다. 유교, 불교, 도교와 화랑도의 보급과 실천은 김응렴의 견문(見聞) 삼미(三美)에 나타나듯 높은 도덕사회를 구현하였고 성덕대왕신종과 만파식적, 황룡사구층탑과 장육존불, 불국사와 석굴암 등 천인묘합(天人妙合)의 경지에 이른 예술품을 창조하였다. 삼국유사는 전성기의 서라벌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제49대 헌강왕(憲康王)대에는 집과 담장이 잇닿아 있고 초가집이 하나도 없었으며, 피리와 노래소리가 길거리에 가득하여 끊이질 않았다.”

경제적 풍요로움 속에 문화와 예술이 꽃피고 있다. 격조 높은 향가가 애창되었고 가무백희(歌舞百戱)가 공연되었다. 이 문화예술의 소질이 경북의 정체성의 하나로 내려온다고 믿어진다.

넷째는 순수하고 정의로운 신라인의 인품이다. 삼국유사의 여러 설화, 특히 향가에 나타나는 신라인의 모습은 참으로 인간적이다. 화랑오계를 실천하는 화랑과 그 낭도들이 사회분위기를 주도하였을 것이며 대자대비의 가르침이 마을마다 넘쳤을 것이요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모든 분쟁을 화해시키는 무애(無碍)와 화쟁의 상징인 원효는 사람들의 경모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신라인은 자애롭고 슬기롭고 겸손하고 용감하며 정의로웠다. 그러면서도 창의성이 뛰어나고 예술감각이 풍부했으며 개방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순수하였다. 비록 불교라는 종교의 색채를 띠고 있지만, 달달박박과 노힐부득의 수행담, 여종의 몸으로 성불한 욱면낭자의 정성어린 염불은 순수 그 자체다. 일오천 냇물에 비치는 달빛 같았다는 기파랑의 풍도, 제망매가에 나타나는 월명의 시정(詩情)과 인간애, 아내를 빼앗은 역신을 점잖게 나무라는 처용의 도량은 인간미의 극치로 보인다. 이처럼 순수했던 신라인의 얼굴은 남산의 바위에 새겨진 여러 불보살의 자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의 불상은 한결같이 자애롭고 미묘하다. 이 전통이 남았는지, 경북인들은 지금도 변덕이 적고 순박한 성품을 지녔다.

다섯째로 삼국유사가 전해주는 경북의 정체성은 충효의 정신이다. 삼국유사의 편제는 왕력(王歷)이 제일 먼저고 다음으로 제왕의 역사를 다룬 기이편(紀異篇)이다. 그리고 불교의 역사와 설화를 소개하는 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편(避隱篇)이 전개되고 효선편(孝善篇)으로 마무리된다. 나라를 세우는 일로 시작하여 가정의 효행으로 마치는 것이다. 이처럼 나라를 위하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충효는 삼국유사의 수미를 이루며 많은 이야기가 담겨진다. 구한(九韓)을 내조(來朝)하게 한다는 황룡사구층탑과 호국의 성지 사천왕사, 호국룡이 된 문무대왕과 나라와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만파식적, 헌다공양(獻茶供養)하고 돌아가는 길에 임금의 부탁에 의하여 즉석에 지은 충담스님의 안민가(安民歌)’는 그 사례들이다. 

▲ 윤용섭 삼국유사목판사업본부장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국왕, 대신과 화랑, 그리고 승려들과 일반백성이 일심으로 화합하고 굳게 뭉쳐 나라를 지키는 모습은, 북한의 위협에 처한 우리 사회의 경우와 너무나 대조적이다. 출가의 몸이면서도 늙은 어머니를 봉양한 일연은, 효도를 개인이 지닐 가장 소중한 가치라고 여겨, ‘손순매아(孫順埋兒)’를 비롯한 효행담을 기술했다. 경북이 자랑하는 전통문화인 의병과 구국의 활동, 경로(敬老) 효친(孝親)과 봉제사의 미풍은 그 유래가 길다 하겠다. 


이상, 삼국유사에 담긴 경북의 정체성을 다섯 가지로 고찰하였지만, 이는 삼국유사가 경북의 정체성에 제공하는 깊은 내용의 일부를 개관한 것이고 이 위대한 고전은 경북과 한국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하여 무궁무진한 답변을 해 줄 것이다.

첨승대
경주 남산 불곡 감실부처님
군위 인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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