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른 절벽위에 서 있는 죽서루. 오십천 푸른 강물과 어울어져 관동 팔경 중 제 1경으로 꼽힌다.
삼척 오십천은 삼척시와 태백시의 경계인 백병산(1,259m)에서 발원한다. 삼척시가지를 지나 동해안으로 흘러들며 강으로서의 생을 마감한다. 길이가 48.8km로 비교적 짧지만 하천의 곡류가 매우 심해 하류에서 상류까지 가려면 물을 50번은 건너야 한다고 해서 이름이 오십천이다. 하천 협곡의 암벽은 중생대 백악기에 생성된 뒤 오랜 기간 하천 작용으로 퇴적되고 변형돼 곳곳에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삼척부사였던 이성조가 쓴 죽서루 현판
죽서루는 오십천 협곡이 끝나는 지점, 카르스트 지형의 절벽과 길게 늘어진 송림, 태백산지가 어우러지는 오십천 최고의 절경지에 자리 잡고 있다. 눈이 부시게 푸른 강물, 강물 속에서 솟아 오른 듯한 절벽은 도끼로 찍어 내린 장작의 결을 닮았다. 수직의 절벽 허리와 꼭대기에 울창하게 어깨를 맞댄 나무에 단풍이 곱게 들었다. 노랗게 물들고 빨갛게 물든 나무 사이에 늘 푸른 소나무가 섞여 울긋불긋 꽃대궐 쇼가 펼쳐진다. 그 사이에 엎드려 있는 죽서루는 엄숙하고 고졸하다. 보물 제213호 죽서루에 가을이 한창이다.

죽서루 안에서 내려본 오십천

죽서루는 삼척시 성내동에 있다. 관동 8경 중 제1경으로 꼽힌다. 조선시대 삼척부의 객사였던 진주관의 부속건물이었다. 지방에 파견된 중앙관리들이 묵던 숙소의 부속건물로서 접대와 향연이 펼쳐지던 곳이다. 죽서루의 이름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옛날에 죽장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누각이 절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또 죽죽(竹竹仙) 이라는 아름다운 기생이 살던 집의 서쪽에 있어서 그렇게 이름했다고도 한다.

죽서루가 언제 창건됐는지는 알 수 없다. 고려 명종대(1171~1197)의 문인인 김극기의 시 중에 죽서루 관련 시가 전해오는 것으로 봐서 12세기 후반에 창건됐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또 이승휴 안성 김구용 정추 등이 죽서루 관련 시를 남긴 것으로 봐서 죽서루는 14말까지는 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죽서루는 버려졌다가 조선 태종 3년(1403) 당시 삼척부사였던 김효손의 의해 복원됐다.

죽서루는 고려와 조선을 관통하면서 1,000년 동안 당대 최고의 시인과 묵객이 줄줄이 찾아와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린 명소다. 죽서루 정자 내부에는 당시의 스타급 학자 시인들의 기문과 시판이 빼곡하다. 관동지역의 경승을 얘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정철이다. 정철은 45세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그는 내금강과 외금강, 관동팔경을 유람한 뒤 조선가사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관동별곡〉을 지었다. 죽서루에 올라 시를 남겼다.

▲ 송강정철 가사의 터 표석

진주관 죽서루 오십천 내린 물이

태백산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가니
차라리 한강의 목멱에 대고 싶구나
왕정이 유한하고 풍경이 싫지 않으니
그윽한 회포도 많기도 하구나
나그네의 설움도 둘 데 없다




고려시대 민족의 대서사시인 ‘제왕운기’를 썼던 이승휴는 ‘높은 하늘 고운 색채 높고 험준함을 더하는데 / 햇빛 가린 구름 조각 용마루와 기둥에서 춤추는 구나/ 푸른 바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날아가는 고니 바라보니/ 붉은 난간 잡고 내려다보며 노니는 물고기 헤아려보네/ 산은 들판을 빙 둘러싸 둥그런 경계를 만들었는데/ 이 고을은 높은 누각 때문에 매우 유명해졌구나/ 문득 벼슬을 버리고 노년을 편안하게 보내고 싶지만/ 작은 힘이나마 보태 임금이 현명해지지를 바라네’-‘안집사 병부시랑 진자사를 모시고 진주부 서루에 올라 판의 시를 차운하다’라고 썼다. 죽서루를 이승휴가 세웠다는 설도 있다.

율곡 이이는 ‘죽서루에서 시를 차운하다’라는 시에서 ‘누가 하늘을 도와 이 아름다운 누각을 세웠는가/ 그 지나온 세월 얼마인지 알 수가 없구나/ 들판 저 멀리 산 봉우리에는 감푸른 빛 서려 있고 / 모래사장 부근에는 차가운 물 고여있네 / 시인은 본래 남모르는 한이 많다지만 / 깨끗한 이 곳에서 어찌 나그네의 근심을 일으켜야만 하리요 / 온갖 인연 모두 떨쳐버리고 긴 낚싯대 들고는 / 푸른 절벽 서쪽 물가에서 졸고 있는 갈매기와 놀아보리’라고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조선 숙종과 정조도 관동의 아름다운 경관에 푹 빠졌다. 왕들은 화원이 그려온 죽서루의 그림을 보고 흥취에 겨워 어제시를 지었다. 정자에는 숙종의 어제시판과 정조의 어제시판이 걸려있다. 정조는 김홍도를 시켜 금강산 일대 4개군의 명승지를 그리게 했는데 이 그림첩이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이다. 이 화첩이 포함하는 지역은 4개 군뿐만 아니라 남으로 평해 월송정에서 북으로 안변 가학정 그리고 금강산 접경지역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이 화첩에 죽서루가 있다. 정조는 김홍도가 그린 죽서루의 그림을 보고 시를 남겼던 것이다.

죽서루의 또 다른 명물은 현판이다. 5개의 현판이 있는데 누각 정면에 있는 ‘죽서루’와 ‘관동제일루’는 숙종 36년 삼척부사 이성조가 쓴 글씨다. 누각의 동쪽 내부에 있는 ‘해선유희지소(바다신선이 노니는 곳)’는 헌종 3년 삼척부사 이규헌이 썼다. 남쪽에 있는 ‘죽서루’ 현판은 누가 썼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미수 허목이 쓴 죽서루 안 ‘제일계정’ 현판. 전서체의 대가인 그가 쓴 유일한 행초체 현판이다.
누각 내부 서쪽의 현판, 강이 내려다 보이는 쪽에 걸려있는 ‘제일계정(시냇가에 있는 정자로는 제일)’ 현판은 미수 허목이 쓴 글이다. 허목은 그림과 글씨 문장에 능했는데 전서체로는 동방의 1인자로 꼽힌다. 그의 전서체는 ‘미수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독특하고 독보적이다. 그런 그가 ‘제일계정’ 현판을 유일하다시피 한 행초체로 써 눈길을 끈다. 날아갈 듯이 미끈하고 호쾌한 필법이다. 네 장의 판자를 붙이고 테두리를 둘렀다.
죽서루는 자연 암반에 세워진 독특한 누각이다.

허목이 삼척부사로 부임해왔던 때는 그의 나이 68세였다. 남인의 영수였던 그는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의 ‘1차 예송논쟁’에서 패배해 삼척부사로 좌천됐다. 그는 삼척에서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썼고 ‘척주동해비’를 세워 오십천으로 넘나들던 동해의 파도를 잠재웠다. 그는 삼척 생활을 즐겼던 것 같다. 죽서루에 남긴 기문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동계에는 경치가 뛰어난 곳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곳이 여덟 곳 있으니 곧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와 해산정, 수성의 영랑호,양양의 낙산사, 명주의 경포대, 척주의 죽서루, 평해의 월송포다. 그런데 이러한 곳을 유람해 본 자들이 단연코 죽서루를 제일이라 하니 무엇 때문인가.(중략) 서쪽에는 두타산과 태백산이 있으니 높고 험준하여 푸른 기운이 짙게 감돌고 바위로 된 골짜기는 그윽하고 아둑하다. 또 하천이 굽이쳐 50개의 여울을 이루는데 그 사이사이에는 무성한 숲과 마을이 자리 잡고 있으며 죽서루 아래에 이르면 푸른 층암 절벽이 매우 높이 솟아 있는데 맑고 깊은 소의 물이 여울을 이룬다. 유람자들도 역시 이러한 경치를 좋아하여 죽서루가 제일이라고 하였던 것일까?”
죽서루의 남쪽 괴석군에서 올라가는 계단

허목은 2차 예송논쟁에서 남인이 승기를 잡음에 따라 삼척생활을 끝내고 다시 조정으로 나와 대사헌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삼척으로서는 예송논쟁 덕에 제일계정, 척주동해비 같은 귀중한 문화재를 얻게 됐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김동완 칼럼리스트.jpg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죽서루는 주춧돌 대신 자연암반과 자연 초석을 이용하여 세운 2층 누각 형태의 독특한 건축물이다. 자연 상태를 최대한 활용하다 보니 위층의 기둥은 20개인데 비해 아래층의 기둥은 17개이고 기둥의 길이도 각기 다르다. 양쪽 측면의 칸 수도 다르다. 죽서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인데 이는 북쪽에서 봤을 때 그렇고 남쪽에서 보면 측면이 3칸이다. 기둥이 하나 더 있다. 앞서 말했듯이 자연암반 위에 누각을 세우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한다. 또 주 출입구를 남쪽 면으로 하기 위해서 의도한 것이라고도 한다. 좌우 누각의 천연암반을 활용해 2층 누각에 필수적으로 있어야 할 사다리가 없다는 것도 특징이다.





김동완 자유기고가
서선미 기자 meeyan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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