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경씨, 제3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이성근 작.
봄이 와버렸다. 고층 아파트 단지들을 에워싼 산이 흐리멍덩한 색조로 뒤덮여 숨이 막힐 것만 같다. 팔차선 도로 사이로 대단지 아파트들이 설계모형들처럼 조신하게 늘어서 있는 H 신도시. 이 도시 전체가 봄이 몰고 온 달착지근한 기운에 술렁이고 있는 낌새를 나는 감지할 수 있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도로변에 덜 자란 가로수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고, 번들번들 광나는 자가용들이 부연 봄볕을 헤치며 달려간다. 엄마들은 중심가 쇼핑몰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브런치, 블라우스, 블라인드……. 자동차들을 좇으며 단어들을 떠올리는데 현기증이 핑 돌며 시야가 노랗게 흔들린다. 봄볕이 너무 뜨겁다. 교실 창문 앞에 앉아 한참 동안 밖을 내다보고 있었더니 머릿속이 아지랑이가 스며든 듯 어지럽다.

종례시간이 되어도 담임이 오지 않자 애들이 날뛰고 있다. 서른 명이 동시에 목청껏 떠들어대는 소리로 교실이 들썩인다. 텔레비전 리모컨을 잘못 건드려서 볼륨이 엄청나게 커졌을 때처럼 귓속이 윙윙댄다. 목구멍까지 종이를 구겨 넣은 듯 가슴이 답답하다. 대체 담임은 왜 안 오는 건지 짜증이 치민다. 얼른 담배나 한 대 빨았으면 좋겠다.

지겨운 삼일 간의 중간고사가 끝난 2학년 6반 교실에는 비등점에 달한 아이들의 스트레스가 끓고 있다. 경쟁하듯 내뿜는 고함소리가 넘쳐흐른다. 늘 그렇듯 애들은 학교에서 스트레스를 푼다. 그들이 마음 놓고 아이의 모습을 연기(演技)할 수 있는 공간이 학교뿐이기 때문이다. 학교만 벗어나면 엄마가 짜놓은 시간표 속에 자신을 구겨 넣어야 하는 아이들에게 생각은 금지다. 생각은 엄마들이 한다. 에고를 뻐꾸기 둥지 위로 추방시켜야만 해가 지고 밤하늘에 별이 뜬다.

시험이 끝나서일까, 오늘따라 애들 행동이 우스꽝스럽다. 고등학교가 아니라 초등학교 같다. 남자애들 여럿이 바닥을 쿵쾅거리며 뛰어다닌다. 이유는 알고 싶지도 않다. 서너 명의 녀석들이 소리를 지르며 게임 씨디를 공중으로 던지며 주고 받는다. 씨디를 뺏긴 왜소한 녀석은 징징거리며 좇아 다닌다. 악취 풍기는 동물원 우리 안에서 앙앙거리는 아프리카 원숭이가 떠오른다. 당연한 절차인 듯 결국 씨디가 벽에 부딪쳐 박살났고 쌍소리가 오갔다. 야, 새꺄. 임마, 네가 잘못했잖아. 뭐? 저 새끼 졸라 웃기네. 반장인 두빈이의 낮은 저음이 끼어든다. 야, 거기, 조용히 해. 두빈이의 말 한마디가 원숭이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우뚝 서는 것만 같다. 녀석들이 슬금슬금 물러나 제자리에 앉는다.

이상하게 여자애들은 호들갑을 떨어도 남자애들처럼 우스꽝스럽진 않다. 여럿이 둘러앉아 잡지나 화보 따위를 펼쳐놓고 까르륵 까르륵 금속성 웃음소리를 토해낸다.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으로 적과 동지를 구분하고 저희들끼리 모인다. 그리곤 마치 신성한 종교집회라도 여는 양 비밀스럽게 수군거리며, 열광적으로, 때론 엄숙한 얼굴로 자매애를 다진다.

여자애들이 수다스런 척하고 남자애들이 애써 거친 척하는 행동은 재미없는 웹툰을 들여다볼 때처럼 내겐 싱겁고 뻔하다. 그러나 그들의 서툰 몸짓이 타인에 대한 보호색이자, 동시에 자신을 위한 자위행위라는 사실을 나는 진작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에겐 코미디 프로에 삽입된 가짜 웃음소리처럼 어설픈 싸구려 냄새가 난다.

종례가 끝나자 아이들이 우우 몰려나간다. 가방을 메고 있는데 두빈이가 어깨를 툭 친다. 시험 잘 봤어? 뭐 그냥 그런대로. 넌? 나도 뭐 대충. 녀석의 ‘대충’이라는 말은 언제나처럼 일등을 할 것 같다는 뜻이다.

과학관은 교실과 교무실이 있는 건물과 가장 동떨어진 곳에 있다. 우리 학교가 시교육청 지정 과학 모범 학교가 된 후 짓기 시작해 최근에 완공한 건물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쓰다 남은 목재더미와 깨진 타일 조각 따위들이 널브러져 있고 마무리 공사로 인부들이 들락거렸기 때문에 아이들은 얼씬거리지 않는 장소였다. 과학관 뒤편 어슴푸레한 공터는 깊은 밤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길목처럼 느른하고 눅진하다. 시멘트 담벼락에 철책을 두르고 있지만 기슭이 토막난 야산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 와서 담배연기가 빠르게 흩어졌다.

우리는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지고 털썩 주저앉았다. 건물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담배를 물고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이번 시험 일등 놓치면 내 꼴 우습게 되겠지. 두빈이가 흥얼거리듯 말했지만 상황을 알고 있던 나는 잠자코 있었다. 작년 겨울 성형외과 의사인 두빈이 아버지는 성적이 떨어졌다고 잔소리를 하다가 두빈이가 대들자 거실에 장식처럼 세워둔 최고급 골프채로 아들을 때렸다. 한밤중에 앰뷸런스가 출동해서 아파트 단지에 소문이 퍼졌고, 901호 여자가 끔찍하다며 엄마에게 소곤대는 말을 나도 들었다. 병원을 찾아간 내게 두빈이는 제정신이 아닌 아버지가 멍청하게도 두서 없이 무기를 휘둘렀다며 웃었다. 그때 나는 군인인 아버지와 떨어져 산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밤하늘 별님에게 감사의 기도라도 올리고 싶었다.

야, 골빈당. 호들갑 떨지 마. 너만 그런 것도 아니잖아. 내가 위로랍시고 한 말에 비누처럼 맨질맨질한 두빈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쓴 미소가 올라온다. 무슨 말인지 너도 알잖아. 할 말이 없어 나는 입에 담배 한 개비를 더 문다. 오늘따라 뒷산에서 바람도 불지 않았다. 두빈이 역시 새로 담배를 입으로만 물고는 기다란 양팔을 힘없이 무릎 위에 걸친다. 우리 둘의 담배 연기가 공중에서 휘청거린다.

오늘은 학원 안가도 되고, 과외 선생도 없으니까 우리 집에 가자. 집 비었어. 뭐 하게? 알면서 뭘 묻냐? 어렵게 다운받아 놓은 야동을 보자는 것이다. 일 년 전 녀석이 아버지 서재에서 두꺼운 의학 백과사전 케이스에 든 씨디를 발견했을 때, 씨디에 알파벳 S가 적혀 있었다며 자명종처럼 숨넘어갈 듯 웃던 두빈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골빈당은 아버지를 저주하기 위해 포르노를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그러고 싶긴 하지만 마미 때문에 어렵겠다. 우리 마미가 어떤지 알잖아. 학교에서 학원가는 데 십오 분, 학원에서 집에 오는 데 이십 분, 이런 식이잖아. 지금도 아마 시간 분해하다가 담임한데 전화했을지도 몰라. 우리 마민 특별해. 지긋지긋하지.

그런 엄마를 상대하려고 잔머리를 잘못 굴리면 오히려 당하는 수가 있다. 이럴 땐 고분고분한 척하면서 모성애를 역이용하는 게 차라리 낫다. 따지고 드는 엄마에게 핑계를 늘어놓는 것보다 아이처럼 말하는 게 유리하다는 뜻이다. 왜 삼십 분이나 늦었냐고 하면 배가 너무 고파서 떡볶이를 먹었다고 하는 게 최상이다. 엉뚱하게 둘러대는 것보다 천진난만한 척 응수하는 것이 먹힌다는 것이다. 아직 엄마가 얼마든지 컨트롤 할 수 있는 어린애로 남는 것이 신상에 편하다. 내가 정작 두려운 것은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이다. 꿰뚫을 듯한 엄마의 눈에서 센서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나는 이유 없이 주눅이 들었다. 만들어서라도 잘못을 읊어대야 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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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근 작
한 달에 한번씩 미쳐도 되는 날이 있었으면 좋겠어. 기집애들은 핏덩이를 몸 밖으로 배출하니까 시원하겠지. 두빈이 녀석이 별 싱거운 소리라는 듯 피식 웃고 만다. 여자애들은 생리를 시작하면 평소엔 짹짹거리던 입을 닫는다. 단단한 조개껍질처럼 입술을 앙다물고 있어서 머릿속으로 무슨 음모를 꾸미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여자애들이 엄마가 되는 것이다.

나이키 운동화 뒤축으로 꽁초를 뭉개고 침을 뱉었다. 끈적한 타액 옆으로 우동 가락만한 굵은 지렁이가 지나간다. 나와 두빈이는 쭈그리고 앉아 한참동안 지렁이가 다갈색 몸통을 꼬물거리며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야들야들한 표피에 잎맥처럼 새겨진 몸테가 그 여자의 입술 주름을 떠올리게 했다.

901호 여자가 나를 남자로 느낀다는 사실을 엘리베이터 안에서 알게 되었다. 며칠 전 일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외출하고 돌아온 여자와 맞닥뜨렸다. 삼십 대 초반인 여자는 속이 언뜻 비치는 마요네즈색 캐미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냥 고개만 까딱할 수밖에 없었다. 꿈 속의 얼굴 없는 여자들의 모습과 오버랩돼서 쳐다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오는 모양이구나. 여자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달콤하고 쌉싸름한 목소리. 여자의 카푸치노 같은 목소리를 마시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여자는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다리가 약간 후들거리는 것을 느끼며 따라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안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는 여자의 등 뒤로 다가가 꼭 한 뼘 거리를 두고 서 버렸다. 무슨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 엘리베이터 안에서 생각이란 놈은 있을 수가 없었다.

문이 닫히자 갑자기 공기가 팽팽해지고 긴장감이 버적 죄어들었다. 단단히 말아올린 여자의 머리 아래, 가늘고 투명한 목덜미에 빳빳하게 힘줄들이 일어서고 좁은 어깨가 움찔거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고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내가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라 남자라는 것을 여자가 본능적으로 깨달은 순간이었다. 물구나무를 선 것처럼 피가 쏠렸다.

이상하게 그 순간 나는 통쾌했다. 마치 기포가 톡톡 쏘는 콜라를 단숨에 들이켰을 때처럼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시간은 십 여초에 지나지 않았다. 진실은 십 초 이내의 영역에 깃들어 있다. 그 후엔 가짜다. 십 일 초부터 마음의 각질이 두꺼운 인간은 위선의 껍질을 두르고 얇은 인간은 연기(演技)라는 속이 뻔히 비치는 반투명 옷을 걸친다. 우리 반 아이들처럼.

마주보고 있는 901호는 우리 집과 같은 같은 평형에 방의 배치와 거실이나 화장실, 부엌 따위의 내부구조도 같다. 이렇게 똑같은 구조라고 해도 집집마다 분위기가 다르기 마련인데, 901호는 우리 집과 분위기가 너무 비슷했다. 지난 가을 처음으로 옆집에 들어갔을 때 느껴지던 분위기에 사실 조금 놀랐고 어쩐지 서글프기까지 했다.

엄마가 집에서 모임을 갖는다고 출장 뷔페가지 불러다 법석을 떨던 날이었다. 긴 탁자 위에 음식들이 늘어서 있고 십 여 명의 아줌마들이 한꺼번에 떠들고 있었다. 여자들은 입으로 음식을 먹으면서 동시에 지껄이고 웃어댔다. 나는 정신도 없고 그 자리가 불편했다. 게다가 아줌마들이 하나씩 돌아가며 해대는 아무 뜻도 없는 흰소리는 정말 짜증스러웠다. 어머, 자기 아들 잘 생겼네. 공부도 잘하게 생겼고. …… 키도 크고, 훤칠하니, 자긴 정말 좋겠다. 여자 친구도 있겠는 걸……. 눈치 빠른 엄마가 내 표정을 살피곤, 음식을 주섬주섬 챙겨서 901호에 갖다 주고 두빈이네 가서 한 시간만 놀다 오라고 했다. 엄마는 전교 일등인 두빈이가 완벽한 모범생이라고 여겼다. 나는 다행이다 싶어 거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아줌마들을 향해 수줍은 척 엉거주춤 고개를 꾸벅 숙였다.

901호 초인종을 두 번이나 눌렀지만 답이 없었다. 세 번째는 벨을 오랫동안 눌렀다. 누구세요. 거실에서 문을 향해 말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동굴 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낮게 울렸다. 저어, 902혼데요. 버튼 해제음이 울렸다. 내가 들어섰을 때 실내는 터무니없이 어두웠다. 한낮에서 갑자기 한밤중으로 건너뛴 것 같았다. 눈을 몇 번 껌뻑이자 익숙한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전등이 모두 꺼져 있고 암막커튼으로 햇빛을 가린 모양이었다. 일요일이지만 남편은 없는 모양이었다. 괜찮아, 어서 들어와. 여자가 다시 말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실내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 상황은 이따금 꾸는 꿈속 분위기와 흡사했다.

어둡게 있고 싶은데, 불 안켜도 괜찮지. 여자는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눅눅한 어둠 속에 술냄새가 향내처럼 퍼져 있었다. 거실 바닥엔 소주병과 머그잔이 놓여 있었고 레깅스를 입은 여자의 가느다란 다리가 힘없어 늘어져 있었다. 너한테 이런 모습을 보여서 어쩌지. 어른들은 술 마시고 싶을 때가 있단다. 여자는 고꾸라진 머리를 힘겹게 일으켜세우고 나를 바라보았지만 초점이 맞지 않자 다시 머리를 떨구고 술을 마셨다. 낮에 술 취한다고 잘못은 아니잖아, 아냐, 너도 술마시고 싶을 때가 있을 거 아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확 취해버리고 싶을 때가 있을 거잖아, 안 그래? 당연한 거 아닌가요. 나는 짐짓 목소리를 깔았다. 여자가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 게 싫었다. 난 말야, 너어무 따분해. 여자가 손을 들어 공중을 휘휘 저었다. 여긴 너무 조용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 바람도 안 불어. 여자가 설핏 웃는 것도 같았다. 너와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은 썩어가고 있어. 알아? 고인 물이 썩듯이 우리가 썩고 있다고, 알아? 나는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무슨 말인지 잘은 모르지만 그냥 느낌으로 알 것 같았다. 적어도 썩어간다는 것, 우리 모두가 썩어간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거멓게 고여 있는 어둠 속에서 여자와 내 눈빛이 뒤엉켰다. 여자의 흐리멍덩한 눈이 내게 애원하는 말을 들었다. 나를 휘저어줘, 제발. 다리가 팽팽해졌다. 놀라고 당황해서 나는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날 나는 두빈이도 만나지 않고 혼자 쏘다녔다.

나른한 꿈속에 여자가 출현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새벽에 팬티가 젖은 것을 깨닫고 잠이 깼을 땐 이상하게도 몽정 속 여자의 얼굴이 901호 여자라는 확신이 사라져버렸다. 분비물이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 순간 얼굴이 증발해버리는 것 같았다.

일년 전 엄마와 나는 이곳 H 신도시로 이사했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학군을 염두에 둔 엄마의 선택이었다. 육군 대령인 아버지 때문에 여러 도시를 옮겨다녔던 나는 이번만큼은 정착하기를 바랐다. 아버지와 떨어져 살게 되면서 엄마는 나를 더욱 닦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없으니까 더 신경쓸 수밖에 없다고 엄마가 푸념하듯 늘어놓곤 했지만, 내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얼뜨기는 아니다. 엄마는 늘 아버지의 표정을 살폈고 매사 아버지의 허락을 받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가 엄마를 대하듯 아버지를 대했다. 순진한 척, 여린 척 연기를 일삼았다.

내가 없는 낮 동안 엄마가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호기심이라기보다 불만에 가까웠다. 내 행동 반경에 대해 꿰고 있는 엄마에 비해 엄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울화통이 치민 적도 있었다. 엄마의 사생활을 알아내려면 상상력이 필요했다. 이곳으로 이사온 후로 엄마는 항상 바빴다. 모임만 해도 열 개가 넘었고, 친구들과 여행도 다녔고, 주말이면 아버지에게 다녀와야 했다. 거실에서 들리는 통화 내용을 엿듣고 엄마의 시간표를 퍼즐 조각 맞추듯 끼워넣곤 했지만 채워지지 않는 빈칸은 항상 남았다.

그리고 엄마는 언제나 나를 앞질렀다. 친구들과 게임을 하다가 모임에서 엄마가 돌아올 시간을 넉넉히 계산하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보란 듯이 현관에 서 있곤 했다. 식초처럼 시큼한 눈빛으로. 한 마디 한 마디 단어들을 물 속 깊이 침전시키는 듯한 말투,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어깨, 언제나 실리를 계산하는 듯한 악착 같은 표정. 그런 엄마를 보고 있으면 말할 수 없는 피로를 느낀다.

엄마와 901호 여자는 지난 겨울 일본 여행을 다녀혼 후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아버지와 며칠 동안 통화한 후 나를 외가에 맡기기로 합의를 보고 엄마는 어렵게 허락을 받아냈다. 어른들은 왕왕 아이들을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 취급을 한다. 자기 맘대로 가지고 놀다가 다른 관심거리가 생기면 드러내놓고 귀찮아한다. 아버지를 떼버리고 여행가고 싶어 안달난 엄마도 그랬다.

901호 여자 역시 며칠 동안 남편을 힘들게 설득해서 겨우 합류한 모양이었다. 엄마는 901호 여자와 통화한 후 융통성 없이 꽉 막힌 사내라고 혼잣말을 했다. 여자의 남편이라는 작자는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 부딪쳐서 대충 분위기를 알만 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기계 부품 업체를 운영한다는 남자에게선 이제 겨우 삼십 대 중반의 나이인데도 벌써 중년의 비릿한 냄새가 났다. 회색 계통 양복을 자주 입는 살집 좋은 사내를 볼 때면 항상 떠오르는 것이 있다. 먹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비집고 들어오는 길거리의 피둥피둥 살찐 회색 비둘기.

살찐 비둘기를 쫓아버리고 여자는 엄마와 여행을 떠났다. 그 후로 둘이 남편 욕을 하면서 더 가까워졌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늦은 오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조용한 복도엔 엄마와 901호 여자의 기름진 중국음식 냄새처럼 통속적인 웃음소리가 복도에 진동하고 있었다.

엄마는 외모에 딱히 변화가 없었지만 여자는 화려하게 변신했다. 번데기를 벗고 변태를 거듭한 여자는 봄이 되자 한 마리 부전나비가 되었다. 날개를 세우고 봄날 내리쬐는 햇빛의 애무를 받는 나비. 화려한 색조, 하늘하늘한 몸짓. 여자가 변했다는 것은 나의 더듬이가 감지했지만, 미려한 나비가 적의 시선을 교란하기 위해 날개의 비늘가루를 열심히 비벼대는 본능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오늘도 엄마는 언제나처럼 피곤해 보인다. 엄마의 예상 시간보다 삼십 분이나 늦었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좀 이상하다. 엄마의 눈에서 작동하는 센서도 오프돼 있다. 시험 잘 봤느냐고 묻는 목소리도 착 가라앉아 있다. 네, 보통 때랑 비슷할 거 같아요. 믿어도 되지? 그렇다니깐요. 단호한 말투로 대답하면서 엄마의 얼굴을 살폈다. 아버지한테 전화해야겠구나. 아버지가 기다리실 거야. 긴장감이 풀린 듯 엄마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당분간 아버지에게 전화가 걸려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엄마가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으니까. 나 없다고 게임하지 말고 그동안 진도 못 나간 중국어회화 하고 있어. 엄만 볼일 좀 보고 올 거야. 늦어도 일곱 시까지 올 거니까 딴짓 하지 말고. 엄마는 준비한 대답을 꺼내놓듯 말과 말 사이를 일정한 톤으로 쉼 없이 이어간다.

식탁에서 엄마가 차려준 늦은 점심을 먹고 있을 때 외출 준비를 마친 엄마가 안방에서 나왔다. 일 년 전 내 성적이 가장 좋았을 때 아버지가 선물한 베이지색 정장을 입은 엄마는 현관을 나서다 말고 나를 돌아보았다. 엄마가 밖에서 수시로 확인 전화할 거야. 외출할 때마다 잊지 않고 덧붙이는 말이라 특별할 게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고 엄마도 없는 특별한 오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내내 채팅을 하고 성인 사이트를 돌아다녔다. 허리가 아파 의자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고 밖을 쳐다봤다. 어느새 복병처럼 어둠이 깔려 있었다. 음산한 밤하늘에 붉은 복선이 스멀스멀 퍼져갔다. 붉은 노을을 바라볼 때면 뜨악한 기분이 들곤 했다. 엄마가 베갯솜에 넣어둔 부적을 처음 봤을 때처럼. 그러고 보니 엄마가 돌아오기로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집으로 전화도 걸려 오지 않았다. 내가 혼자 있을 때 엄마가 확인 전화를 안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의외이긴 했다. 그렇지만 상관없었다.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거실로 나가 집안의 실내등을 모두 꺼버렸다.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영화나 볼까 하고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가 관둬버렸다. 그냥 이대로 어둠 속에 고요히 있고 싶었다. 완전히 깜깜하지는 않았다. 맞은편 아파트의 저녁 불빛이 베란다를 통해 들어와 거실을 안온하게 적신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평화인 것만 같다. 머릿속이 텅 비어가고 뻑뻑한 육체가 담배 연기처럼 허공에 풀어져 버리는 듯한 감각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가 길게 이어지는 초인종 소리에 깼다. 엄마가 돌아왔나 보다. 검은 피아노 위에 놓인 시계를 보니 8시 42분을 가리키는 야광 숫자가 번들거리고 있다. 시간에 철저한 엄마에겐 꽤 예외적인 날이다. 누구세요? 습관적으로 문을 향해 묻는다. 어어, 나 901호야. 여러 개의 잠금 장치와 걸쇠를 벗기는 동안 바깥의 여자는 아무 말이 없다. 어둠이 시간을 길게 늘어뜨리는 것 같다. 꿈 속처럼 나른한 긴장감이 맴돈다.

현관에 들어선 여자가 불 꺼진 실내를 둘러본다. 엄마 지금 안 계세요. 목에서 잠이 덜 깬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알고 있어. 엄마가 집에 전화했는데 네가 없는 거 같다고 가보라고 하셨어. 여자가 현관 앞에 놓인 실내용 꽃무늬 슬리퍼를 신으며 말한다. 그게 언젠가요? 글쎄, 한 시간쯤 됐나? 엄마가 저한테 전화했는데 제가 집에 없었다구요? 전 계속 집에 있었어요. 벌써 아홉 시가 다 됐네. 남편 저녁 준비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여자가 말을 얼버무린다. 나는 여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 여자가 왜 거짓말까지 하면서 우리 집에 왔을까 궁금해진다. 여자는 엄마가 집에 없다는 것을, 내가 어둠 속에 혼자 있다는 것을, 그 모든 정황을 알고 있었다. 한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후텁지근한 침묵이 꽉 들어찼다. …… 어두운 데 왜 불도 안 켜고 있니? 스위치가 어딨더라……, 불 켜지 마! 나는 이렇게 말할 뻔했다. 불 켜지 마세요. 다시 잘 거예요. 턱없이 퉁명스럽게 말해버리곤 화난 사람처럼 소파에 털썩 주저 않았다. 그래, 피곤하면 다시 자. 그리고 엄마 늦는댔어. 참, 저녁은 먹었니? 여자는 두서없이 떠듬거린다. 내가 고갯짓으로 가리킨 테이블 위에 컵 라면 용기와 반찬 그릇 따위가 널려 있다. 여자가 그것들을 하나씩 부엌으로 옮긴다. 실내용 슬리퍼를 신었는데도 여자에게선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다. 부엌으로 옮겨지는 그릇들에서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고 어둠 속에 여자의 실루엣만이 어렴풋이 보인다.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초조한 마음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마치 조명이 꺼진 연극무대 위에서 세트가 옮겨지는 약속된 속임수를 보면서, 다음 장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질 것인지를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무대를 바라보는 암전(暗轉) 속 관객처럼.

부엌에서 마른 수건을 가져다 테이블을 닦는 여자의 손가락들이 어둠 속에서 오물거린다. 나는 무대의 약속을 깨기 위해 천천히 일어나 다리에 힘을 주고 여자의 등 뒤로 다가갔다. 여자가 몸을 돌리려는 찰나, 여자의 몸을 완전히 틀어잡고 다른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는 입술을 눌러버렸다. 놀란 여자가 딸꾹질을 했다. 온몸에 힘을 실어 여자를 바닥에 넘어뜨리려 했다. 그러나 여자의 몸은 의외로 단단했다. 한순간 움찔하던 여자는 거센 힘으로 나를 밀쳐냈다. 어둠 속에서 증오를 담은 차가운 두 개의 눈동자를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짓이야! 도대체, 니가, 니가……. 여자는 흥분해서 말을 잇지 못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여자의 목에서 치매환자의 헛소리 같은 웅얼거림이 흘러나온다. 아아, 어떻게, 뭐 때문에 ……, 나한테……. 원하던 거 아니었어요? 따분하다면서요. 내숭떨지 말아요. 당신에게서 그런 냄새를 맡았을 뿐이니까. 나는 입에 씹히는대로 뱉어버렸다. 뜻밖에 여자는 프픗 가뿐하게 웃어버린다. 뭐? 너 아주 당돌하구나? 감히 어디서, 어린 게 겁도 없이. 넌 어린애일 뿐이야. 여자의 마지막 말이 내 입에 재갈을 물렸다. 여자는 아주 어른스런 말투로 말하고는 침착하게 거실을 걸어나갔다.

여자가 현관문을 나서려던 순간 적절한 타이밍을 가다렸다는 듯 요란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거실 테이블에 둔 여자의 것이었다. 여자는 빠른 몸짓으로 다시 걸어 들어온다. 여보세요. 네, …… 지금 없어요, 말씀하세요. 여자가 소파에 있는 내게서 등을 돌린다. 네? 지금? …… 뭐라구요? 잠시만. 여자가 스위치를 찾느라 허둥대다가 무언가 쿵 하고 떨어졌다. 아버지가 아끼는 드론이었다. 불행히도 깨지진 않았다. 드론이 깨져서 이 여자도, 엄마도 곤란해지는 게 좋은데 말이다. 여자는 드론을 집어 다시 피아노 위에 올려 놓고는 손에 잡히는 빨간 펜을 들고 손바닥에 상대가 불러주는 것을 받아 적는다. 나는 재빨리 번호를 외웠다. 상대와 의사소통이 어려운지 여자가 짜증스런 음성으로 대꾸한다. 아, 거기, 알아요. 한 시간 정도 걸릴 거예요, 우선은 그냥 그대로 있어요.

이 모든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어둡던 실내에 켜진 밝은 불빛에 눈이 익숙해지는 정도의 시간이랄까. 여자는 현관을 나서기 전에 나를 돌아보았다. 여자의 표정이 밤하늘 구름처럼 움직였다. 내 머릿속도 전등처럼 팽팽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여자가 나가자마자 외워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지역번호로 봐선 한 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M시인 것 같았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저쪽 응답이 나온다. 네, 리버사이드입니다. 전화를 끊었다. 분명 러브호텔 따위의 이름인데 검색해봐도 홈피 따윈 없다. 거길 찾아갈 방법을 빨리 알아내야 한다.

901호 문에 귀를 대본다. 여자는 아직 출발하지 않은 게 틀림없다. 9시 뉴스 사이로 여자의 남편이 여자에게 고함치는 소리가 얼핏 들린다. 여자는 살찐 비둘기가 쪼아대는 소리를 한참 더 들어야 할 것이다.

아파트 입구에 대기하고 있는 중형차에 탔다. 운전석에 두빈이가 앉아 있었다. 두빈이는 시키는 대로 외제차가 아닌 좀 낡은 차를 끌고 나왔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좋았다. 녀석은 미국 살 때도 답답해서 아버지 차를 몰고 밤새 도로를 달리곤 했다. 녀석이 모는 차에 한번 동승해본 적이 있지만, 녀석의 운전 실력은 믿을만했다. 야, 뭐야. 이 밤에 어딜 가자는 거야. 녀석이 재밌다는 듯 씩 웃는다. 뭐 신나는 일 있냐. 택시 안에서 상황 설명을 하자, 두빈이가 낄낄 웃어댔다. 우와, 재밌겠다. 추격, 스릴러에 로맨스까지 믹스된 거로군. 동영상이라도 찍어놓을까. 맘대로 해.

잠시 후 여자의 흰색 차가 나타났다. 늦은 시각이라 도로는 한적했고 여자가 속력을 내지 않아 따라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두빈이를 시켜 전화로 장소를 확인했다. 굵고 낮은 목소리로 녀석은 느긋하게 정확한 위치와 길 안내까지 받아냈다. 뭔가 원하는대로 돼가는 기분이었다. 마침 두빈이 아버지도 모임에 나가서 새벽에야 돌아올 거라 시간 여유도 있었다. 우리 꼰대 한 달에 한번 가는 의사들 모임인데, 뭔가 썩은내가 풀풀 나.

M시 외곽지대로 가는 국도로 접어들자 한치 앞을 가리는 안개처럼 어둠이 덮쳐왔다. 어둠에 웅크리고 있는 야산과 검은 나무들이 박제된 산짐승들처럼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아무런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멀리 앞서가는 여자의 흰색 소나타가 비추는 희미한 불빛에 우리가 끄달려가는 것만 같았다. 두빈이와 나는 어느 순간부터 말을 잊었다. 흡사 최면에 빠지듯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상상도 할 수 없는 세계로 가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도착했을 때 여자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없었고 흰색 소나타만이 건물에서 새어 나오는 여린 조명을 받고 있었다. 산 같지도 않은 산과 강 같지도 않은 강을 배경으로 러브호텔들이 늘어서 있었고, 음식점으로 보이는 허름한 식당 두어 개 말고 주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불빛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시동을 끈 채 입구 쪽으로 시선을 두고는 조용히 무언가를,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도 여자에게선 소식이 없었다. 귤빛 알전구가 드리워진 흰색 건물은 어둠 가운데 무대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환각처럼 떠올라 있었다. 주위엔 검은 적막만이 감돌았다. 소변 마려울 때와 같은 간질간질한 조바심이 몸을 타고 올라왔다.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두빈이가 입을 열었다. 뭐야,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 아버지 오기 전에 들어가야 하는데…….

입구로 하얀 봉고차가 들어선다. 봉고 차체에 ‘중앙병원’이라는 검은 글자가 붙어 있다. 두 명의 남자가 차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저건 또 뭐야? 구급차잖아. 누가 또 나처럼 좆나게 맞았나 보지. 두빈이는 구급차에 과민반응을 보인다. 처음 여기로 올 땐 여자의 얼굴이 뭉개지는 것을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여자에게 당한 것처럼. 꿈도 아니고 환상도 아닌, 컬러의 현실 속으로 흑백의 비현실감이 파고들어 목덜미가 서늘해진다.

다시 시간이 꽤 흘렀다. 두빈이는 휴대폰을 동영상 촬영모드로 해놓은 채 좌석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자동차 안 내비게이션에서 퍼진 희미한 불빛을 좇아 나방 한 마리가 차창에 몸을 툭툭 부딪는다. 희끄무레하고 두툼한 나방이 죽을 듯이 검은 유리에 제 몸을 치는 소리뿐, 바깥은 정적에 휩싸였다.

드디어 나타나셨군. 여자가 호텔 입구로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의 양팔에 가방 두 개가 들려 있다. 눈에 익은 가방이었다. 이어 민간 구급대원 둘이 밀고 나오는 침상 위에 사람 하나가 누워 있다. 몸집이 작고 머리카락이 긴 것으로 보아 여자인 듯한데 어두워서 분간할 수가 없다. 이거 장르가 로맨스에서 미스테리 스릴러로 바뀌었군. 두들겨 맞은 거 같은데, 저 여잔 대체 뭐지? 남자가 누워 있어야 이야기가 떨어지는데, 여자란 말이지. 게다가 901호 여자도 아닌 제 삼의 여자. 이야기가 무지 흥미로워지는데. 얼굴을 당겨볼까. 푸르뎅뎅한 얼굴이라 알아볼 수가 ……. 녀석이 촬영을 중단하고 입을 다물었다. 녀석의 휴대폰을 빼앗아 퍼렇게 멍들고 찢어지고 부어오른 얼굴을 확인했다. 불쌍한 그 얼굴은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내가 언제나 낌새를 살피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멍해 있는 사이, 구급차는 사이렌을 울리며 그곳을 빠져나갔다. 901호 여자도 병원까지 따라간 모양이었다. 두빈이는 묻지도 않고 급히 차를 돌렸다. 한참 동안 어둡고 휑덩그렁 한 공간을 달렸다. 어두운 나무와 어두운 집과 어두운 길이 있는, 아무것도 아니어서 꿈속 같은 공간이었다. 꿈속의 내가 속삭였다. 볼 건 다 보았다고.

국도로 들어선 후부터 두빈이는 늦었다가는 무슨 꼴 당할지도 모른다며 속력을 냈다. 그리곤 한참 동안 꼰대 욕을 해댔다. 부드러운 미소의 군주, 예의바른 이중인격자, 친절한 사이코패스. 나는 두빈이가 나를 위로하기 위해 과장되게 떠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동영상을 내 휴대폰으로 전송하고 녀석의 휴대폰에 든 것을 지웠다. 두빈이를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매사 깔끔한 게 서로에게 좋은 법이다. 이 동영상으로 뭘 어떻게 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보다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예의바르고 친절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자정이 가까운 국도엔 차가 별로 없다. 한참 동안 두빈이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달렸다. 어둠 속 저 멀리 차들이 정차해 있었다. 국도에서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갈림길이 있는 지점이었다. 고속도로로 진입하던 과속 차량들 간에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다른 길은 없었다. 꼼짝없이 길게 늘어선 차들 사이에 갇히자 두빈이가 투덜대며 차창을 열어 바깥 상황을 둘러보았다. 바깥 바람을 쐬고 싶어 나도 차창을 내렸다.

무심결에 옆 차선의 검은 차를 본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소형 드론을 본 것도 같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차량 뒷유리 쪽에서 보이도록, 드론을 안전대에 올려 놓곤 했다. 아버지의 취미였다. 견인 차량들이 사고 차량들을 끌고 간 후 움직이지도 못하던 차들이 미끌리듯 조금씩 움직였다. 검은 세단이 선명하게 보였다. 드론의 모습도 뚜렷해지고, 번호판도 보였다. 아버지의 차가 틀림없었다. 아버지는 이곳으로부터 200km 떨어진 부대에 있어야 했다. 엄마가 있던 러브호텔에서 십 여 분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아버지의 검은 세단. 복잡한 퍼즐이 아니었다. 나는 얼른 차창을 올리고 다시 얼굴을 감췄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 당선 소감

이미경씨= 개천문학상 수필 부문 대상, 신라문학상 소설 부문 대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과정 재학.
어느 날 문득 글을 쓰게 되었고, 어쩌다보니 멈추지 않고 쓰고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무릎에 아름다움을 앉혔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녀는 맛이 썼다.

랭보의 비탄입니다. 쓰는 일뿐만 아니라 살아간다는 일이 그럴 겁니다.

멀리 여행에서 돌아온 후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깊은 밤 문득 낯선 신에게 올린 기도를 떠올립니다.

밝고 날렵한 정신으로 하루를 살기 위해 애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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