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위기의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기까지

김유신
유신과 춘추는 실과 바늘이다. 이들과 함께하는 동시대의 두 여왕이 있었으니 선덕과 진덕이 바로 그들이다. 이 두 쌍의 조합은 7세기 신라와 삼국시대를 파란만장 스토리텔링의 보고로 만든 주인공들이다.

공교롭게 이들은 모두 김씨이다. 춘추와 선덕, 진덕 두 여왕은 신라 김알지의 후손인 신라 김씨였지만 김유신만은 다른 김씨였으니 바로 가야 김수로왕의 후손 가야 김씨였다. 유신의 일생은 가야멸망으로 가야계 신라인이 되었지만 정통 신라인으로 인정을 받기까지의 눈물겨운 장편 대서사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라 김씨 선덕과 진덕은 최고 지위에 오른 왕이 되었다지만 그렇다면 춘추는 승승장구하기만 했을까. 춘추의 아버지는 용춘(또는 용수)이다. 어머니는 26대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이고 그의 할아버지는 25대 진지왕이다, 이러한 막강 성골의 후예로 태어났지만 진지왕은 황음했든 정치적 파워 게임에서 졌든 재위 4년 만에 강제로 폐위된다. 춘추는 성골에서 진골로 강등되어 영원히 왕이 될 수 없는 불운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가야계 신진세력 유신과 의기투합하자 춘추는 결국 왕위에 올라 무열왕이 되고 유신은 왕위의 왕으로 흥무대왕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된다. 무엇 때문인가. 이 둘이야말로 풍전등화와 같던 두 여왕시대에 신라 위기를 삼국의 통일로 전화위복시킨 통일 신라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신과 춘추에게 선덕과 진덕을 떼어 놓고 그들의 활약상을 기대할 수 없다. 7세기 4인 1조의 드라마틱한 신라의 정체성을 찾아 떠나기로 한다.

△유신과 춘추의 출생과 환상의 평생지기

그들의 출생부터 살펴보자. 김유신은 595년생(진평왕 17), 김춘추는 603년생(진평왕 25)으로 유신이 8살이 많으나 평생 의기투합하였다. 원효(617~686)와 의상(625~702)도 여덟살 차이였지만 두 번의 당나라 유학 시도 등 평생도반으로서 7세기 신라불교의 주역이었다.

유신은 673(문무왕 13)년까지 78세를 살았고 춘추는 661년(문무왕 1) 58세까지 살아 김유신이 20년을 더 살았다. 김유신은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한 사람인데 당시로써는 꽤 장수한 셈이다.

7세기에는 정말 걸출한 인물들이 별처럼 동시대를 수놓았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그리고 김춘추 무열왕, 그의 아들 문무왕이 통치했다. 원효, 의상, 자장 등 신라를 대표하는 스님들뿐 아니라 김유신과 그의 동생 김흠순, 김춘추의 아들 김인문(629~694)도 신라 삼보라 불리울 만큼 신라 삼국통일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들이다. 이들에 대한 재조명도 필요한 시점이다.

선덕여왕 시절 신라는 그야말로 절대 절명의 위기였다. 당나라는 나당연합군으로 도와주는 척하며 결국 신라를 넘보고 선덕을 여왕이라는 이유로 향기없는 모란꽃이니 당 태종의 친척을 보내 대신 다스려주겠다는 조롱 외교를 일삼았다. 한 해도 끊이지 않는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 거기에 신라 최고 관직을 차지한 상대등 비담의 내란까지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절정을 달리던 시대였다. 진덕의 시대는 어떤가. 선덕이 647년 정월에 비담과 염종의 반란 속에 서거하고 그 유언에 따라 왕이 된 진덕은 김유신의 기지로 즉위 7일 만에 난을 평정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백제의 침략과 고구려까지 가세한 어려운 상황을 맞자 춘추를 당에 보내 나당 외교를 통해 실리를 얻는다. 8년이라는 짧은 즉위 기간 동안 진덕도 바람 잘 날 없는 신라의 왕 노릇을 하였지만, 그 위기를 반전의 기회로 멋지게 성공시켜 삼국통일을 이룬 주역들이 이들이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기 마련이다. 그 어렵고 험난한 질곡의 시절이 있기에 이들의 용맹과 지략이 더욱 우뚝한 것이다.

△이름에 담겨있는 신라왕실의 정체성

선덕여왕의 이름은 덕만이다. 덕만은 열반경에 나오는 ‘덕만우바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자로 태어난 보살의 이름이다. 선덕(善德)은 수미산의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을 주재하는 천신 선덕바라문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선덕을 덕만우바이와 동일시했다면 진덕은 부처의 인가를 받아 승만경을 설한 승만과 동일시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진덕의 이름이 곧 승만이다. ‘승만경’의 주인공은 파사닉왕과 마리부인의 딸로 아유타국에 시집간 공주이자 여성재가불자로 유일하게 대승불교 경전을 설한 주인공의 이름이다.

신라는 법흥왕 때 불교를 공인한 후 철저히 인도 석가모니의 계층, 가문, 이름 등을 그대로 수용하여 신라 왕족을 석가모니의 가문과 동일시하는 신라불국토를 지향하였다. 자장이 당나라에 유학 가서 문수보살로부터 선덕이 석가모니와 같은 찰제리종(크샤트리아 계급)라는 수기를 받게 되는 진종설이 바로 그것이다. 진골 출신으로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자장은 대국통(大國統)에 취임하여, 진종설과 전륜성왕 등을 신라 왕실과 결부시키는 왕권 강화 체제를 구축하였다. 자장은 ‘가섭불-석가불-문수사리’로 이어지는 과거와 현재 시대의 신앙을 내세워서, 신라를 부처, 보살과 결부짓는 ‘불국토(佛國土)’를 주창하였다.

진흥왕에 이르러 그는 전륜성왕의 네 바퀴(금륜, 은륜, 동륜, 철륜)에서 따와서 자식들을 금륜태자, 동륜태자로 이름 짓는다. 그리하여 진평왕에 이르러서는 석가모니의 부모와 이름이 같아지는 것이다. 곧 진평은 백정(白淨)이며 왕비는 마야부인인데, 이는 석가모니의 아버지 슈도다나(백정왕 또는 정반왕의 뜻)와 어머니 마야부인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진평왕의 아우 백반(伯飯)과 국반(國飯) 역시 석가모니의 숙부의 이름이다. 그 진평의 딸이 선덕이고 그 사촌 동생이 진덕과 자장이 되는 것이다.

석가모니와 같은 선덕, 부처라는 수기를 받은 승만 진덕에게 필요한 것은 신라를 명실상부한 불국토로 세우는 작업이었다. 여기서 선덕의 사촌인 자장이 황룡사 9층탑을 세워 불국토 하드웨어를 구축하고 통도사 계단을 세워 계율을 정립하는 안성맞춤의 역할을 맡았다. 내우외환으로 어려울수록 덕(德)으로 최상의 국가를 지향하는 진(眞)과 선(善)의 신라 불국토가 그들의 이상이었다.

태종무열왕 영정 김기창
△선덕의 예지력 있는 통치와 남성 조력자들

선덕은 예지력이 뛰어난 왕으로 정평이 나 있다. 백제군의 잠입 격퇴에는 여근곡, 옥문지 등의 다소 민망하고 직설적인 지명을 여성성으로 품어내 물리치고 당 태종의 향기없는 모란꽃 선물에는 즉위 3년 만에 향기로운 여왕의 절 ‘분황사(芬皇寺)’를 지어 은은한 모란의 향기로 멋지게 화답한다. 통치 16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던 백제와 고구려의 수많은 전쟁과 위기 속에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선덕에게는 많은 남성 조력자들이 있었다. ‘화랑세기’에는 두 남편으로 지칭되는 진지왕의 아들이자 숙부였던 용수 용춘 형제와 대신 을제를 남편으로 적시하고 있다. 역사상 전무후무했던 공식적인 신라 첫 여왕 선덕에게 남편의 이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선덕의 든든한 지지세력이자 정치 참모들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조카이자, 용춘과 여동생 천명의 아들 김춘추는 목숨걸고 고구려와 당나라에 가서 외교를 펼쳐 선덕이 닦아놓은 삼국통일 기반 위에서 태종 무열왕이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김유신은 김춘추를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시켜 가야와 신라부터 통일하고 무열왕으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춘추를 ‘태종’ 무열왕이라 하여 ‘당태종’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은 것 또한 김유신과 같은 신하를 두었기 때문이라고 설득하여 중국도 승복했던 일화가 전한다. 그는 삼국통일의 실질적 주체이고 왕과 왕실의 보호자같은 존재였다. 선덕에게는 백제가 침략해올 때마다 세 번씩 집에도 못 들르고 다시 전장터로 뛰어나갔던 신라의 수호신장과 같은 존재였다. 그의 신라에 대한 우국충정은 죽어서까지 이어져 삼국유사 미추왕 죽엽군 조에서는 혜공왕이 그 후손에게 했던 소홀한 대접을 백배사죄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진덕의 신라를 위한 십대서원과 태평가

한편 진덕은 승만경의 승만부인이 부처 앞에서 설법을 하고, 부처가 승만의 설법 내용이 옳다고 인가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부처와 동격으로 불국토 신라를 지향하였다. 진덕은 몸매가 풍만하고 아름다웠고 7척 장신에 팔이 무릎까지 내려온다(姿質豊麗, 長七尺, 垂手過膝)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진덕은 21세기에 태어났어도 만인의 선망을 받을 이상적인 체격을 가졌던 것 같다. 키 또한 6척이 넘는 2미터 가량의 장신이었다는데 부처의 32상 80종호에 상응하는 큰 키와 팔의 길이는 승만과 같이 재가불자 부처로 격상시키려하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러한 진덕은 647년 왕으로 즉위하여 승만경의 십대서원과 삼대원에 충실한 정치철학을 보여준다.

‘오늘부터 보리에 이르기까지’로 시작되는 승만경의 십대서원(十大誓願)은 다음과 같다.
① 계(戒)를 범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나이다.
② 존장(尊長)에 대하여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나이다.
③ 사람에 대하여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나이다.
④ 타인의 재산이나 지위에 대하여 질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나이다.
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아끼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나이다.
⑥ 나 자신을 위해서 재산을 모으는 일을 하지 않겠나이다.
⑦ 사섭법(四攝法:布施·愛語·利行·同事)에 의하여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일을 하되,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하지 않겠나이다.
⑧ 고독한 사람, 감금되어 있는 사람,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 재난을 당한 사람, 빈곤한 사람을 보고 그냥 버려두지 않겠나이다.
⑨ 새나 짐승을 잡아서 파는 사람, 길러서 잡는 사람, 부처의 계에 어긋난 사람을 보면 놓치지 않고 조복시키겠나이다.
⑩ 정법을 잘 지키고 그것을 잊어버리는 일을 하지 않겠나이다.

지금 바로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법이다. 진덕이 신라의 승만이라면 이 열가지를 모두 몸과 마음에 새기며 성장하여 그것을 정사에 옮기고자 했을 것이다.

진덕은 또한 현명했다. 이 10대원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면 신라와 백성을 위하여 무슨 일은 못 할까.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 속에 당과 화친을 맺기 위한 정략으로 진덕은 비단을 짜고 거기에 당고종에게 태평송을 지어 문무왕이 될 춘추의 아들 법민을 시켜 선물한다. 시 또한 잘 지어서 당나라의 태평성대를 기리는 ‘태평가’로 고고웅혼(高古雄渾:고상하고 예스러우며 웅장하고 막힘이 없음)하다는 평을 들었다.

위대한 당 나라 왕업을 열었으니
높고도 높은 황제의 계획 창성하리라.
전쟁이 끝나고 천하가 안정되니
학문을 닦아 백대에 이어지리라.
하늘의 뜻 이어받아 은혜를 베풀고
만물을 다스리며 깊은 덕 간직하네.
깊은 인(仁)은 해와 달과 짝하고
국운이 요순시대와 같다네.
나부끼는 깃발은 어찌 이리도 빛나며
징소리 북소리는 어찌 그리도 웅장한가.
나라 밖 오랑캐 황제 명령 거역하면,
하늘의 재앙으로 멸망하리라.
순박한 풍속은 온 세상에 펼쳐지고
멀리서 가까이서 좋은 일 다투어 일어나네.
빛나고 밝은 조화 사계절과 어울리고,
일월과 오행이 만방을 돌고 있다네.
산악의 정기는 보좌할 재상을 내리시고
황제는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를 임명한다네.
삼황과 오제의 덕이 하나가 되어
우리 당나라를 밝게 비추리로다.


이 시를 누군가는 너무 사대적인 것이 흠이라고 하나 진덕의 염원은 ‘당나라’로 쓰고 ‘신라’로 읽는 태평가였을 것이다. 잠시 그 이름을 바꾸어 당의 지원을 얻어 백제,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내 신라의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목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승만경의 ① 정법의 지혜를 구하고, ② 일체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며, ③ 정법을 획득하겠다는 삼대원을 나타내는 진덕의 통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닌 남을 위하여 나는 무엇을 어디까지 해본적이 있던가. 진덕에게는 남편과 자식에 대한 기록이 없다. 여성은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말은 만고의 진리이다. 신라가 남편이고 백성을 자식으로 생각한다면 전쟁에 피폐해진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비단에 글씨를 수놓는 일쯤이야 무엇이 어려우랴. 결국 당고종이 이 글을 아름답게 여기고, 법민에게 대부경을 제수하여 돌려 보내고 처음으로 중국의 연호인 영휘를 사용하게 하였다. 진덕의 전략은 성공했다.

8년이라지만 7년2개월의 짧은 왕노릇을 한 진덕이 승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신라와 백성을 위해 작은 자존심 내려놓고 큰 자존심을 지켜낸 것이라 해석할 대목이다. 그 결과 다음 왕인 김춘추가 삼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이룰 수 있도록 물려주었다. 삼국유사 여인의 기상이며 신라 여왕의 기본 품새인 것이다. 언니의 후광에 가려 또는 유신과 춘추의 활약으로 허수아비 왕노릇을 했다는 편견에 가려져 있는 진덕여왕, 우리는 진덕의 면면을 사금파리 주워 그릇을 복원하는 마음으로 찬찬히 찾아내야 할 것이다.

정진원 동국대 연구교수
7세기 신라의 별들을 바라보며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고 눈부신 경제성장과 한류로 파급된 한국문화에 자긍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름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여왕대신 왕이 되어 신라를 다스리고자 했던 상대등 비담인가, 가야와 신라를 결합하고 그 신라의 힘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통일한 유신인가, 성골에서 진골로 강등되어 영원한 아웃사이더로 전락한 삶을 박차고 분골쇄신 기필코 진지왕의 왕위를 이은 춘추인가, 당나라 소정방의 암호를 풀어 전쟁승리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원효인가, 당나라의 침략 정보를 알아내 급히 귀국하는 의상인가, 선덕을 도와 신라를 둘러싼 9개의 호시탐탐 적국을 진압하기 위해 황룡사9층탑을 세우는 자장인가. 각자의 대의명분과 밑바탕에 흐르는 애국심으로 일생을 보냈을 그들이지만 누군가는 시대의 영웅으로 누군가는 9족을 멸한 반란자로 기억되고 있다. 다시 묻는다. 7세기 삼국유사의 기록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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