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헌정사상 두 번째로 국회의 탄핵을 받았다.

지난달 24일 문건유출 의혹을 담은 ‘최순실 태블릿 PC’ 보도 이후 46일 만에 국가원수이자 정부 수반으로서의 권한 행사가 정지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정계에 진입해 1998년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에 당선된 후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와 박정의 전 대통령의 후광이라는 정치적 자산을 토대로 2013년 2월 우리나라 첫 여성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나 이번 탄핵으로 18년 정치 생활이 오명으로 얼룩지게 됐다.

박 대통령은 집권 4년 차에 터진 ‘최순실 사태’는 박 대통령을 전임 대통령의 일반적인 레임덕 수준을 넘어 국민으로부터 즉각 하야 요구를 받는 초유의 상황으로 내몰렸다.

박 대통령이 사상유례없는 사인(私人) 최 씨에게 발목이 잡혀 더 손써볼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1979년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 칩거생활을 해오다 1997년 11월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에 입당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1998년 4월 박 대통령은 대구 달성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뒤 정치인으로 본격 데뷔, 19대 때까지 5선 의원을 지냈다.

한 때 이회창 총재 체제에 반기를 들고 미래연합을 창당했다가 2004년 ‘차떼기’로 상징되는 불법 대선자금 사건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으로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의 구원투수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이때부터 박 대통령은 2년 3개월 동안 당 대표를 지내며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와 지방선거 등에서 당시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40대 0’이라는 완승을 거둬 유력 대권 주자로 발돋움, 2007년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다. 하지만 서울시장 출신의 이명박 후보와 접전 끝에 패배했다.

이후 박 대통령은 17대 대선과 18대 총선을 거치며 당내 비주류로 전락한 친박(친박근혜)계를 이끌었고, 2009∼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 때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원안을 고수해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키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이때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더욱 확고하게 지고 특히 충청권 지역의 득표에 힘 입어 2012년 대선 승리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집권 4년 차에 터진 최순실 파문은 박 대통령의 18년 정치 인생은 물론 우리 정치에 치명타를 가했다. 풍문으로 나돌던 박 대통령과 최 씨와의 돈독한 관계가 ‘국정농단’ ‘공동정권’이라는 의혹과 조롱으로 국정은 만신차이 됐다.

박 대통령은 그간 1,2,3차례 담화를 통해 반전을 시도했지만 타이밍을 놓치고 정국수습에 실패했다. 박 대통령은 “1998년 정치 시작부터 오늘까지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마음으로 모든 노력을 다해왔다.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호소했으나 분노한 촛불민심은 대통령 즉각 퇴진을 요구했다.

국회 탄핵으로 모든 권한을 상실한 박 대통령은 정치에서 실패하고 법에 한 가닥 희망을 거는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마지막 회생 기회가 될지 주목된다.


김정모 기자
김정모 기자 kjm@kyongbuk.com

서울취재본부장으로 대통령실, 국회, 정당, 경제계, 중앙부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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