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 발발, 루이 16세와 함께 파리에 유폐된 앙투아네트는 친정인 오스트리아 왕국과 연락, 국외 탈출을 시도했다. 앙투아네트는 탈출 준비를 자신의 정부인 페르젠 백작에게 맡겼다. 탈출계획을 면밀하게 세운 페르젠 백작은 탈출로를 물색하던 중 한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자신이 왕비 앙투아네트와 몰래 만나기 위해 드나들던 비밀의 문을 이용, 성을 빠져나가기 위한 도피로로 채택했다. 탈출을 돕던 측근들은 마차의 규모도 줄이고, 싣고 갈 짐도 줄여 속도가 빠른 말을 쓸 것을 권했다. 하지만 천성이 왕비병환자로 호화 사치 생활을 누려온 앙투아네트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와중에도 왕비의 품위에 맞는 탈출을 고집했다.
12마리의 말이 끄는 육중한 4륜 마차를 준비하도록 했다. 마차 내부는 식량, 포도주 저장소와 큰 화장실도 갖추도록 했다. 고급 화장품 등 짐도 가득 실었다. 탈출용 마차가 누구의 눈에도 쉽게 띌 수 있는 왕이 시찰 때 타고 다니던 화려한 마차 같았다. 덩치가 크고 짐이 무거운 마차는 빨리 달릴 수가 없었다. 루이 16세는 궁중 하인으로 변장했지만 얼마 못 가 두루에라는 역장에 의해 발각됐다. 농민들이 몰려와 왕과 왕비를 체포, 파리로 이송했다.
루이 16세가 처형된 2년 뒤 앙투아네트는 혁명재판을 받고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죽음 앞에서는 왕비의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의연하고 당당한 태도를 지켰지만 자신의 언행에 대해 반성하거나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저는 지금 막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당신의 오빠 루이16세와 마찬가지로 저는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앙트아네트가 죽기 몇 시간 전 자신의 시누이에게 쓴 편지다.
앙투아네트의 비극은 세월호 참사 당일 그 황망 중에 미용사를 청와대로 불러 올림머리를 손질한 박근혜 대통령을 생각케 한다. 그것이 여자의 마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