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기반 민족해방·노동운동에 헌신한 낯선 이름…'이일재'

남조선해방전량당 사건으로 사형을 당한 고 권재혁 선생의 장남 권병덕 씨(맨 좌측)가 2012년 마석 모란공원에서 열린 43기 추도회 중 유가족을 대표하여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한국 역사상 노동자가 노동한 만큼 대우받는 평범한 세상을 위해 헌신한 이로 전태일과 이일제의 비중이 적지 않다.

이일재는 많은 이들에게 낯선 이름이지만 당시 한국의 중요 사건이었던 10월 항쟁의 정체성을 규명하기 위해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한 인물을 통해 당시 사회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923년 대구에서 태어났고 혜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독립운동 자금을 댄 할아버지의 삶에 큰 영향을 받아 사회의식에 눈떴다. 청소년기에 창씨개명 된 문패들을 친구들과 함께 뜯어내다가 수배되어 고령으로 피신하기도 하고 공장 다닐 때는 일본 육군 대구사령부 폭파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징병 날짜 하루 전날 해방을 맞은 이일재는 ‘노동자 해방과 독립 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위해 온몸을 바치기로 한다.

자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맨 먼저 찾은 조직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다. 항일운동에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들로 북적인 건준은 그에게 낯설었다. 해방 전에 다니던 삼륜화학에 재취업한다. 여전히 무대는 대구다. 해방 뒤 새로운 관리인으로 온 조선인과 죽이 잘 맞아 노동자들이 공장을 자주관리 했다. 80여명이 함께 일했다. 이 시기 노동자평의회를 통한 자주관리 활동 경험은 이일재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자연스레 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활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경북 전평 간부를 맡게 된다.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에 참여한 게 죄가 되어 옥살이를 하고 문경탄광 파업 주도 혐의로 또 한 차례 구속되고 석방된 뒤엔 빨치산 활동을 한다.
1969년 당시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 재판장 [출처: 이일재선생추모사업회]

50년대 말과 4·19직후엔 노동운동에 참여한다. 군사정권 등장으로 모든 게 허사가 되고 옥에 두 달 동안 갇히게 된다. 66년부터 전국적 노동자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중 반국가사범으로 몰린다. 53일 간 고문을 받았다. 결국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공작금과 난수표를 받은 것으로 발표된다. 69년 간첩단 사건이 3개나 발표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이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간 복역한 뒤 1988년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된다.

석방된 직후 대구에서 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을 맡아 현장 투쟁을 지원하고 상담을 하기도 한다. 2002년엔 사회주의정치연합, 한국노동정책이론연구소에 참여해서 정치사상운동도 열심히 한다. 2012년 여든아홉으로 세상 떠난 지 3년 뒤에 대법원 무죄판결을 받는다.

시위가 확산되자 미 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무장 경찰이 도로변 주택가를 뒤지며 주동자 체포에 나서고 있다.

한국민족은 일제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스스로 통치조직을 건설해 나간다. 1년 동안 비밀 결사 활동을 해온 조선건국동맹의 여운형은 일본이 항복한 8월 15일 아침 조선총독부와 협상을 통해 행정기관, 방송국, 신문사 등을 접수하여 행정권과 치안권을 행사한다. 건국동맹은 조직을 건국준비위원회로 전환시키고 치안대와 지역별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독립적인 통치기구를 발전시켜 나간다. 8월말 건준 지부가 전국에 145개에 이른다. 9월 6일 각계각층이 참여한 조선인민공화국 선포해 독립 정부 건설을 표명했다.

9월 8일 조선에 상륙한 미군은 발표한 포고령 1호를 통해 ‘점령조항’을 발표한다. 1조에서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정부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나의 관할을 받는다”고 말해 한국민족이 만든 어떤 통치기구도 인정하지 않았다. 독자적인 정부 건립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미군정은 한국인들이 일본인들 소유의 공장과 사업장을 ‘자주관리’ 하는 ‘새로운 질서’를 부정하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관리인 선임을 강요한 까닭에 한국민족과 마찰을 빚게 된다.

미군정은 친일 경찰과 관료를 중용하고 이들을 앞잡이로 내세웠기 때문에 한국민중의 큰 저항을 불렀다. 특히 쌀과 보리 강제 매입 방침은 분노를 폭발시켰다. 쌀값은 7개월 만에 10배 이상 폭등하는 등 민중들의 삶은 완전 파탄이 났다.

1946년 9월 초 미군정이 운수노동자 25% 해고, 월급제의 일급제 전환 방침을 발표하자 전평은 해고 및 일급제 철회, 쌀 배급 확대, 노동법시행, 임금인상, 민주인사 석방, 토지개혁, 공장폐쇄 반대, 조선독립인정 등을 요구한다. 미군정은 단호히 거부한다. 9월 23일 7,000명이 참여한 부산 철도노동자의 파업을 시작으로 철도노동자 5만명이 참여했다. 전국적인 총파업으로 이어진다. 대구민중들은 미군정의 추곡 및 하곡 강제매입과 ‘식량 사찰’에 대해 저항했다.

9월 23일 대구에서도 철도파업을 시작으로 총파업의 불길이 타올랐다. 대구에서 미군정은 경찰, 대한노총, 우익청년단을 동원해 파업본부를 진압하고 노동자 1,200명을 검거했다. 30일 경찰이 남조선총파업대구시 투쟁위원회를 해산시키기 위해 간판을 떼어 내려하자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다. 10월 1일 오후 15,000명의 노동자와 시민이 대구역에 모였다. 불행히도 이 날 경찰이 군중들에게 발포해서 두 명이 사망했다. 항쟁에 기름을 부었다. 10월 2일 시위군중은 아침부터 불어나 대구역 앞에만 1만명이 모였다. 근처에 있는 사람도까지 합치면 2만명이 넘었다. 이일재는 충돌을 막기 위해 경찰을 상대로 연설을 했다. 몇몇 경찰이 스스로 무장해제하기도 해서 진정되는가 싶었는데 일부 군중이 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다. 이때도 진정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때 갑자기 총소리와 함께 곳곳에 비명소리가 들리면서 아수라장이 되었다.

10월 2일 계엄령이 떨어진 뒤 대구는 소강상태로 변화되었지만 항쟁은 경북, 경남, 전라도 지역에 이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2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했다. 거대한 항쟁으로 발전된 이유는 ‘민중을 위한 해방조선’의 좌절, 민족 자긍심 훼손, 극심한 민생고 때문이다.

이일제가 청년 시절 활동했던 해방 정국 당시 10월 항쟁은 현대한국의 최초의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을 종식시킨 3.15와 4.19혁명과 유신정권을 종식시킨 부마민주항쟁 이전에 대규모 민중항쟁이다

10월항쟁이 전평이나 남로당의 지도로 전개된 ‘폭동’이 아니라 친일 경찰과 권력에 대해 쌓이고 쌓인 원한이 폭발한 것이고 기아선상에 놓였던 민중의 처절한 외침이라는 것이다. 진상이 규명되고 역사적으로 재평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 최창우 사회운동가
해방 전후 대구는 사회주의 세력이 강한 곳이고 노동운동이 활발히 전개된 혁신(진보)의 심

장부였다. 박정희의 셋 째 형인 박상희도 사회주의자다. 일제 때 신간회 활동을 했고 해방 전후엔 조선건국동맹과 조선건국준비위, 인민위원회 활동을 했다. 10월항쟁이 벌어지는 중에 총격을 당해 사망했다.

한국 노동운동 관련해 빠질 수 없는 전태일의 고향이 당시 경상북도 대구시다. 전태일은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헌신한 투사다. 최근 들어 대구에서 전태일을 기억하기 위한 활동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 건 바람직한 일이다. 긍정의 역사를 되살려 내는 건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책임이다.


최창우씨는 전북 정읍 출신으로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후 혁신(진보)계 민족민주운동 단체인 사회민주주의청년연맹(사민청) 의장을 지냈다. 현재 안전사회시민연대 대표,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위원장 등 활발한 시민운동을 하고 있다. 이글은 심지연의 ‘10월 인민항쟁 연구’, 정해구의 ‘10월인민항쟁의 전개과정과 성격에 관한 연구’, 안재성의 ‘이일재, 최후의 코뮤니스트’, 이일재 선생 인터뷰(남궁원) 인터넷 블로그 등을 참조했다고 밝혀왔다. 



김정모 기자
김정모 기자 kjm@kyongbuk.com

서울취재본부장으로 대통령실, 국회, 정당, 경제계, 중앙부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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