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돈 경북대 교수
한 지역이나 국가의 정체성은 오랜 기간에 걸쳐 주어진 자연 환경과 여건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정체성의 실체는 물론 한마디로 표현하기도 어렵거니와 그 시원이나 뿌리는 더 더욱 잘라 말하기가 힘든 대상이다. 가까이는 근대사회의 전개 과정 속에서, 멀리는 신라를 포함한 전통사회 속에서 꾸준히 배태되고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처럼 오랜 기간에 걸쳐 차근차근하게 축적된 문화의 총체로서 이루어진 것을 정체성이란 이름을 붙인다면 그 뿌리는 분명하게 찾아내기는 한층 더 곤란한 일이겠다.

흔히 이 지역의 주민의 성격을 보수성으로 단정하고 그 근원을 신라시대까지 소급해서 찾으려는 경향성도 보인다. 사실 그런 시도가 정당한 인식이라고는 말하기 곤란할 듯 싶다. 왜냐하면 그 뒤에도 수많은 정치사회적 변동 속에서 새로운 문화를 접촉, 흡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주민 이동과 흡수 및 교류도 있었고 그것이 기존의 체계를 바꾸는 데 일정하게 기능하였을 터이기 때문이다. 다만, 농경사회는 유목사회와는 달리 한번 토착화 하게 되면 웬만하면 다른 곳으로 잘 옮겨가지 않는 속성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경상도지역은 백두대간이란 산맥으로 둘러싸인 까닭에 바깥 세계나 그 주민들과는 소통이 그리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면 지역 주민이 가진 본질적 특성이 상당 부분 그대로 유지되어졌을 수도 있겠다.

일반적으로 신라인, 신라문화의 성격을 재단할 때 한반도의 동남쪽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지리적인 특성이 거론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 등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후발주자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으로 언제나 후진성을 면치 못한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그런 측면을 증명해 주는 대표적 사례로서는 불교 수용을 손꼽았다.

삼국에 불교가 수용ㆍ공인된 사실만을 놓고 본다면 신라는 두 경쟁국과 비교해 전통성을 무조건 고수하려는 보수적 입장을 강하게 견지하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구려와 백제에는 불교가 정치적인 목적성을 지니고서 중국으로부터 국왕을 매개로 해서 전해진 것이었다. 이들은 수용의 과정에서 별다른 내부적 갈등과 반발을 겪었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아마 불교 수용 과정에서 전통성과는 적절한 조화를 이룬 셈이었다.

그렇지만 신라의 경우는 그와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였다. 불교가 중앙의 왕경이나 왕실에 전해지기 이전에 이미 오늘날 선산(구미)와 같은 변두리 지역에 먼저 전해져 주변 지역으로 점점 번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5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왕경, 왕실에까지 전해지기에 이르렀다. 신라 지배층 사이에서는 불교 수용 문제를 놓고 점점 갈등을 빚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불교를 적극 받아들이려는 일파와 반대하는 일파 사이의 대립이 표출되었다. 사실 주변 상황을 고려하면 수용이 대세였지만 전통성을 지켜내려는 일파의 반발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5세기 말 이후 수용 문제를 둘러싸고 몇 차례에 걸쳐서 노골적인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한 가운데 불교를 수용하려는 쪽이 점점 주도권을 잡아갔다. 마침내 불교 수용을 적극 추진한 법흥왕은 527년 전통신앙을 상징하는 천경림(天鏡林)의 숲을 베어내고 거기다가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興輪寺)의 창건을 시도함으로써 공인의 입장을 강경하게 드러내었다. 이로 말미암아 흥륜사 건립을 반대하는 일파들이 반발함으로써 한바탕 싸움이 일어났다. 법흥왕의 근신 이차돈(이차돈)의 순교라는 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마침내 수용파가 승리함으로써 불교는 신라의 국가적 종교로 자리잡게 되었다. 사실 신라에서는 불교의 수용과 공인의 과정에서는 엄청난 고난의 과정을 거쳤지만 일단 공인된 이후에는 마치 봇물이 터지듯 일시에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어 갔다. 왕명을 불교식으로 짓기까지 할 정도로 불교는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아 갔다. 신라는 불교를 국가 종교로서 뒤늦게 받아들였지만 파급 속도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처럼 신라는 전통성을 고수하려 하였다는 측면에서 보수성을 지니기는 하였지만 공인된 이후에는 엄청난 적극성을 보였던 것이다. 불교가 어느 정도 자리잡게 된 7세기에는 신라 승려들의 구법 활동은 대단하였다. 십여 명에 달하는 승려들이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까지 나아가 구법활동을 펼치는 적극성을 보였던 것이다. 뒷날 바닷길을 따라 인도에 갔다가 중앙아시아의 서역 지방을 거쳐 육로로 당나라에 들어왔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죽었던 혜초도 그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한 보수성의 뒤에는 엄청난 진취성과 적극성을 내재하고 있었을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다. 무조건 보수성만을 갖고 신라인 신라문화의 본질적 성격을 진단할 일은 아니라 하겠다.

사실 보수성이라 하여 마냥 새로운 문화에 대해 배타성만을 견지한 것은 아니었다. 포용성과 함께 개방성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경주분지의 한 가운데에 관광객들이 널리 찾는 대릉원이라는 곳에는 큰 규모의 봉분을 가진 무덤 백 수십 기가 산재해 있다. 이들은 흔히 적석목곽분이라 부르거니와 이는 다른 직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라인이 창안한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그 기원을 둘러싸고서는 논란이 되어 있지만 신라인, 신라문화의 보수성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요소이다. 아마도 전통성 속에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 무덤에서는 피장자의 생전 위세를 자랑하는 엄청난 금공품(金工品)이 매장되어 있거니와 그 가운데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로만글라스란 존재이다. 로만글라스는 번성하던 로마제국 시기의 영역에서 만들어진 형형색색의 다종다양한 유리그릇을 총칭한다. 현재까지 30여점 이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그러한 유리그릇은 아직 신라에서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들의 원산지는 한 곳이 아닌 여러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원산지에서 여러 경로를 거쳐서 마침내 신라에까지 들어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신라인을 보수성을 재단하려는 주요한 근거의 하나는 골품제라는 독특한 신분제에 있다. 골품제는 오직 왕경인만을 대상으로 삼은 신분제란 점, 신분 상승이 불가능하도록 철저하게 차단한 점을 주요한 특징을 한다. 따라서 거기에 들어 못한 지방민은 물론 외부세계로부터

유입된 인물들에게도 일정하게 제약을 가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폐쇄적인 형태로 운영된 신분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마냥 그렇게만 운용되어서는 삼국 통합의 주역이 되기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수백년 동안 신라사회를 유지해 나가기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는 우리의 골품제에 대한 이해 방식에 어떤 근본적 문제가 내재되어 있었음을 뜻하는 사실이다. 그 점을 보여 주는 것이 원성왕릉(元聖王陵)으로 추정되는 괘릉(掛陵)과 흥덕왕릉(興德王陵)의 입구에 턱하니 버티고 선 무인상이다. 이들은 생김새나 옷매무새로 보아 신라인이 아닌 서역인 계통인임이 확실하다. 그밖에 몇몇 무덤 속에서 출토된 흙으로 빚은 토용(土俑) 가운데서도 서역인의 모습이 보인다. 이는 외래인들이 적지 않게 신라에 들어와 살기도 하였음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다. 게다가 그들은 군관이나 관료로까지 진출할 수 있었음을 방증해 주는 사실이다. 9세기 말 울산을 거쳐 경주에까지 들어온 처용이 서영 상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도 그런 측면에서 충분히 용인되는 사실이다. 뒷날 세계인으로 활약한 장보고가 나올 수 있는 것도 이해가 가능한 일이다.

이상과 같이 신라인의 정체성은 적극성, 진취성과 아울러 포용성까지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대 국론 분열된 국론을 통합하고 더 나아가 남북 통일을 위해서는 신라의 정체성에 뿌리를 찾는 것도 어긋나는 판단은 아니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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