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사랑이 손짓하는 바다…누가 저 사랑의 자물쇠를 열수 있을까?

▲ 신라 충신 박제상 부부의 애틋한 사연을 모티브로 한 경주시 양남면 하서항 방파제 끝에 세워진 사랑의 자물쇠. 단단히 잠긴 자물쇠가 억급 세월 변하지 않는 사랑을 보여주는 듯하다. 윤관식 기자
동해안 여행을 해파랑길 경북 첫 코스인 경주시 양남면의 주상절리에서 시작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 하서항 입구에 서자 빨갛고 파란 하트 모양의 예쁜 이정표가 마음을 잡아당긴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바다라는 문구가 이채롭다. 방파제 끝에 우뚝 서 있는 대형 자물쇠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하나의 항구에 세 개의 이름을 쓰고 있어 헷갈렸다. 하서항이라 알고 찾아왔는데 이정표에는 율포진리항이라 기록되어 있다. 잘못 찾아왔나 싶었는데 찾긴 제대로 찾았다. 알고 보니 옛 지명과 현재 지명, 동네 이름을 모두 사용하고 있다. 여행 초보자는 조금 혼란스러울 수 있겠다.

해파랑 경주시 구간
포구와 하트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싶어 사랑의 자물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왼편 방파제 벽면에 멋들어진 흘림체로 쓰인 ‘물빛 사랑 마을’과 큐피드 화살이 있는 곳을 지날 땐 설레기조차 했다. 파동이 이는 마음을 진정시키다 보니 어느새 거대한 자물쇠가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 지점에 도착해 있다. 이 자물쇠는 누구도 함부로 열 수 없을 것 같다. 열쇠를 가진 사람은 누굴까.

방파제 벽면에 신라 충신인 박제상(朴堤上)에 관한 일화가 짧게 언급되어 있다. 이곳이 왜 사랑이 이루어지는 바다인지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삼국시대 초기 신라는 국제무대에서 아주 힘이 약했다. 주변 국가에 많이 휘둘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실성왕 때는 내물왕의 왕자인 미사흔을 왜국에 볼모로 보내야 했고 내물왕의 왕자 복호는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는 뼈아픈 수모를 겪었다. 그로 인해 내물왕에 이어 왕 위에 오른 눌지왕은 늘 슬픔에 젖어 있었다. 그 마음을 아는 박제상이 복호를 구출해 온 뒤 다시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 왜국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그의 아내가 율포항으로 달려왔을 땐 이미 배는 항구를 뜨고 있었다. 무사히 잘 다녀오라는 아내의 피맺힌 절
하서항 사랑의 자물쇠. 윤관식기자
규를 뱃전에 선 박제상도 들었다. 그는 슬픔을 삼키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사랑의 자물쇠는 부부의 애틋한 사랑과 재회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세워졌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라는 광고 카피도 있지만 억겁의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랑도 있지 않을까. 예쁜 사랑을 꿈꾸는 커플들이 작은 자물쇠를 대롱대롱 걸어놓은 방파제 한쪽 테트라포드 위에는 낚싯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앉은 강태공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가 낚으려는 게 혹 사랑은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읍천항 전경. 노동을 내려놓은 어선들이 물결에 잠시 몸을 맡긴 채 서로의 어깨를 치며 햇빛바라기를 하고 있다. 윤관식기자
율포진리항을 뒤로하고 다시 길 위에 섰다. 기울어진 주상절리라 표시된 화살표에서 오른쪽으론 바다, 왼쪽으로는 펜션과 동네 카페를 끼고 돌자 곧바로 주상절리가 눈앞에 펼쳐진다. 절묘한 풍경에 순간 아찔해진다. 경이로운 시선으로 햇살이 은가루처럼 뿌려진 바다를 눈부시게 바라본다. 섣부른 감탄사나 탄성은 결례가 될 것 같다. 이런 걸 두고 자연이 만들어 낸 보석이라 하는 모양이다. 경주 주상절리는 발달 규모나 형태가 남다르다더니 그 말이 맞다. 크기와 다양성에 있어서도 뚜렷한 차별성을 띠고 있다. 기울어진 주상절리를 지나면 누워 있는 주상절리가 나타나고 곧이어 위로 솟은 주상절리가 나타난다. 푸른 바다와 주상절리의 절묘한 조화 앞에서 마음은 하얀 포말이 되어 밀려왔다 밀려간다.

경주 주상절리는 기울어져 있거나, 누워 있거나, 솟구친 모양 등 다양하다. 부채꼴 모양의 주상절리가 이채롭다. 윤관식기자

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길 따라 지난 시간의 흔적이 또렷하다. 신생대 말기 마그마의 분화 작용으로 지각변동이 일어났을 당시의 이곳을 상상해 본다. 주상(柱狀)은 기둥을, 절리(節理)는 틈을 뜻한다. 분출한 용암이 지표면으로 솟구치다가 찬 공기를 만나 수축하는 순간, 그 찰나에 육각 또는 오각형의 기둥 모양이 만들어졌다. 우리네 삶도 때때로 1천℃ 이상의 뜨거운 용암처럼 들끓었다가 빠르게 냉각되기도 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한다. 삶의 모습은 각기 다르지만 비슷한 형태의 모양과 틈을 가진 채 살아간다. 혹 아는가. 수백 년 뒤 미라로 발견되어 학계에 중요한 연구 자료로 쓰일지, 터무니없는 상상도 여행의 또 다른 묘미다. 다시 길을 재촉한다.


흙길을 밟고 고불고불한 샛길을 지나자 길가에 봉분이 내려앉아 죽음조차 희미해진 무덤이 보인다. 들어가지 못하게 작은 푯말을 세우고 줄을 쳐 두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참 허술하다. 양지바른 곳의 야생화는 물이 올라 파릇하다. 긴 잠에서 깨어난 자연이 하품하는 소리가 들린다. 바다 역시 봄 햇살을 받아 오후가 될수록 더 반짝인다. 이곳에도 강태공은 있다. 그들은 어떤 날씨 건 어느 시간 때든 바다와의 접속을 원하는 것 같다.

남녀노소 즐길수 있는 파도소리길. 윤관식기자
푸른 바다를 개인의 정원으로 사용 중인 주상절리 휴게소에 도착했다. 집 떠난 나그네에게 쉼터는 반가운 장소다. 1층에 편의점이 있고 간단한 간식거리도 판다. 씨앗호떡과 각종 특산물은 물론 주상절리 빵도 있다. 모양이 부채꼴이다. 휴게소 2층은 커피집이다. 느긋하게 앉아 커피 한 잔 마시며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카페는 이곳 외에도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올망졸망 걸려 있다. 해양경관 조망타워는 막바지 공사 중이다. 그 때문에 살짝 우회해야 한다. 2016년 9월 완공 목표였는데 조금 늦어진 모양이다. 조망타워와 동해안 지질공원 거점센터가 완공되면 역사문화 유적지에 관한 일반인의 관심도가 더 높아질 것 같다.

율포진리항에서 나아 해변까지(1.9㎞)는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파도 소리를 마음껏 감상하며 걸을 수 있다. 이 구간 전체가 완만해서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여행객이 더러 눈에 띈다. 드디어 부채꼴 주상절리가 보이는 전망대 위에 선다. 주름치마니 꽃봉오리 같다느니 하는 표현이 다 맞는 것 같다. 아름답다, 신기하다, 도도하다, 뭐 이런 수식어들이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 천혜의 지질 박물관이라는 지칭이 과하지 않다. 최수종이 출연한 ‘대왕의 꿈’이 이곳에서 촬영된 후 더 많이 알려졌다. 하긴 2009년 이전에는 군사지역이라 들어가 볼 수도 없었다.

주상절리빵. 윤관식기자
돌아서 나오려는데 느리게 가는 우체통이 옷자락을 슬며시 잡는다. 지금 써서 우체통에 넣으면 여름이나 가을, 어쩌면 겨울에 수취인에게 도착할 지 모른다. 계절이 바뀐 다음에 받아 읽는 재미도 쏠쏠하지 싶다. 비록 짧지만 친필의 엽서를 받아 드는 기분이 이메일이나 문자와 어찌 같을까. 굳이 비교하자면 식당밥과 집밥의 차이랄까. 엽서 받을 사람의 환한 얼굴을 생각하며 우체통 옆에 설치된 엽서 보관함을 열었다. 이런, 빈 통이다. 설마 우체통이 날마다 굶주려 있는 건 아니겠지.

아쉬움을 남긴 채 다시 길 위에 선다. 해안을 따라 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좁은 길, 언덕길, 야생화길, 나무 계단을 고루 걷고 나면 하룻밤 묵고 싶을 만큼 예쁜 펜션이 나온다. 오늘 바다는 하늘색과 같다. 무엇보다 순하다. 노송과 어우러진 푸름에 마음을 뺏기다 보면 읍천등대가 나온다. 아무런 치장 없는 그냥 하얀 등대다. 주변이 워낙 휑한 데다 단단한 시멘트 바닥을 딛고 저 혼자 멀찍이 떨어져 있어 퍽이나 머쓱해 보인다. 근처 해안엔 노동을 내려놓은 어선이 물결에 잠시 몸을 맡긴 채 서로의 어깨를 치며 햇빛바라기를 하고 있다. 이곳이 읍천 갤러리다. 담벼락마다 온갖 그림이 그려져 있다. 매화가 활짝 핀 집도 보이고 파도가 넘실대는 집도 지난다.

길가 나무 의자에 초로의 노인 두 분이 앉아 있다. 이곳에서 나아 해변까지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었다.

“30분은 걸리는데 거 까지 뭐 할라꼬 가노. 여기가 좋제. 담비락마다 그림도 칠해있고.”

주름을 접으며 웃는다.

주상절리 조망대. 윤관식기자
아메리카노 한 잔을 테이크아웃해서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둥그스름하게 이어진 해변 저편에 월성원자력발전소가 보인다. 10코스의 끝 지점이자 11코스의 시작점이기도 한 나아 해변이다. 고요하고 한적하다. 자갈 해변에 갈매기 떼가 하얗게 내려앉아 일광욕을 하고 있다. 그 속으로 걸어간다. 낯선 이의 등장에 끼룩대며 날아오르는 갈매기. 걷다가 돌아보면 빠진 깃털과 배설물이 즐비한 자리에 눈치 보며 도로 내려앉는다. 사그락사그락 파도에 자갈 쓸리는 소리를 들으며 정자로 올라와 아이처럼 수첩에 하파랑길 스탬프를 찍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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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진 소설·수필가

◇여행자을 위한 팁
△도보 : 율포진리항-양남주상절리-파도소리길-읍천항-나아해변(1.9㎞). 카페와 조망이 뛰어난 카페가 많고 길이 완만해 트레킹하기에 더없이 즐겁다. 문의·안내 : 경주시 해양수산과(054-779-6320).
△대중교통 : 경주시나 경주고속버스터미널 맞은편에서→ 읍천항 파도소리길(06시30분 첫차, 150번 버스), 보문단지 경유(첫차 08시, 150-1번) 소요시간 : 1시간에서 1시간 10분(보문단지 경유 기준), 양남→경주 막차는 20시 50분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임수진 작가
조현석 기자 cho@kyongbuk.com

디지털국장입니다. 인터넷신문과 영상뉴스 분야를 맡고 있습니다. 제보 010-5811-4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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