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선(경주초등 교사)

청도 가는 길은 온통 초록 물결이다. 구불구불 이어진 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운문댐이 나오고, 칡넝쿨 우거진 길을 돌아들면 우뚝 솟은 산과 산 사이에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경주에서 청도까지 불과 한 시간 반 남짓한 거리다. 그런데 머릿속 지도는 줄곧 먼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길 가에 즐비한 감나무 밭과 대추나무 밭이 청도에 온 것을 실감케 한다.

시골학교가 있는 작은 마을을 지나칠 때면 절로 고개가 돌아가곤 한다. 한 번 쯤 다녀가고 싶고, 근무하고 싶은 곳이다. 청도는 그 이름만으로도 아름답고 입 안에 싱싱함이 괴어오르는 푸른 고장이다. 운문사 쪽으로 빠지는 길을 두고 자장면이 맛있다는 동곡을 지나 매전면에 위치한 야영장으로 길을 꺾어든다. 차창을 넘나드는 바람이 우기로 접어들었음을 알린다.

아득한 그 옛날에도 이 길을 말을 달려 넘나든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높은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가장 나중에야 신라에 복속되었다는 이서국. 며칠 뒤면 이 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2박 3일간의 야영수련활동이 있을 것이다. 그 옛날 신라의 화랑과 원화가 심신수련을 위해 원정을 나온 것처럼 곧 있을 낯선 곳에서의 일정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예부터 삶의 터전이었음을 말하듯 청도의 너른 들녘엔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이 즐비하고, 예술적인 미를 간직한 조선 시대 석빙고의 흔적이 남아있다. 한두 번 다녀간 기억을 더듬어보면 청도는 이름처럼 푸르른 길이 열려 있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삶의 고단함이야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 더위를 피해 나온 사람들이 살평상에 누워 있는 모습이 목가적이다. 청도에 와 천년이 가도 끄떡없을 넉넉한 자연의 품을 보고 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 속에 발을 담그면 천연염색을 하듯 누군가 큰 손으로 초록물감을 들여 줄 것만 같다. 사람은 가도 자연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가고 오는 것들을 보내고 또 맞고 있다. 입 속에 한 사람의 이름을 가만히 굴려본다. 한 사람의 가슴에 징표를 남기는 일도 이리 어려운데, 무엇으로 이 세상 다녀간 흔적을 남길까?

밭두렁을 따라 길게 늘어선 푸른 옥수숫대가 벌써 긴 수염을 늘어뜨리고 있다. 수많은 열매를 맺었지만 모두 다 거둘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듯 감나무는 제 발 아래 무수한 풋감을 떨어뜨려 놓았다. 자연은 끊임없이 무언의 눈짓을 보내고 있다. 잡으려고 놓쳐버린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길이다.

아득히 먼 길은 오늘처럼 천 년 전 이서국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길일 것이다. 어디에 문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 잠금장치가 잘 된 사람 앞에 서면 나는 그만 아득해지는 것이다. 한 여름 더위는 모든 문을 열게 하지만 사람이 만들어놓은 마음의 문은 열지 못하는 듯하다.

풀도 나무도 문을 열고 제 빛깔을 말하는 계절이 와도 어떤 사람 앞에 서면 나는 그만 입이 얼어붙는다. 사람의 생각이 얼어붙으면 눈짓이 얼어붙고 말이 얼어붙어 나오질 않는다.

온 몸을 욱신거리게 하던 꽃 피는 봄날이 가고, 내내 내 것인 줄만 알았던 젊음이 미나리 향기와도 같이 지나가고 있다. 먹을 만하면 이내 억세어져 먹을 수 없게 되어버리지만 그래도 그 향기는 두고두고 음미할 만하다. 돌아보면 초라하다고 생각했던 젊은 날들이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다. 너무 늦게 알아채어 놓쳐버린 것들이 무엇인지 이제야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떫은 감물이 얼룩처럼 남은 마음의 빈 자리를 돌아보며 이제는 빛깔을 내보여도 좋을 만큼 세월이 지나갔음을 깨닫는다. 내내 떫을 것만 같았던 내 사랑도 이제 절이 삭는 모양이다. 한재 미나리를 찾아 넘어가던 봄날이 어제인 듯한데 어느새 또 다른 여름의 가운데 서 있다. 오늘 넘어가는 이 길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추억의 장이 될 것이다.

층층나무처럼 나이는 층층이라도 동 학년 동료들의 마음이 다들 한 빛깔이라서 즐겁다. 날씨가 우중충하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생각이 한 쪽으로 쏠리지 않고 구심점을 향해 있어 그 또한 다행이다. 사공은 많지만 선장이 수십 년 노하우를 쌓은 베테랑이니 길을 잃을 염려를 하지 않아서 좋고,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일은 없을 듯하다. 올 한 해 아름다운 동행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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