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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성일 행정사회부 부국장
겨울을 가로질러 질주하던 탄핵열차가 마침내 종착역에 도착했다.

열차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긴 기적을 울리며 플랫폼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열차에 몸을 실은 승객들은 호기심과 우려의 눈길이 교차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분노의 겨울을 통과한 열차는 곳곳에 상처투성이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주고받았던 가시 돋친 언어들은 마음의 상처로 남았다.

저마다 종착역은 자신들만을 반겨주리라고 굳게 믿었다.

유난히 어수선하고 혼란했던 지난겨울과 봄을 탄핵열차에서 보낸 승객들은 피곤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종착역에 내렸다.

누구는 환한 표정으로 희망을 얘기하고, 누군가는 또 다른 분노를 곱씹으며 역사를 하나, 둘 빠져나간다.

역사를 나서는 순간 펼쳐진 풍경은 모두에게 고대하던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탄핵열차에서 꿈꿨던 것이 그 무엇이었든 간에 모두를 만족하진 못했다.

일부는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 자기편이라는 환상에 들떠있고, 또 다른 이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원했던 모습이 아니라고 실망을 넘어 절망을 얘기했다.

가슴 한가득 들뜬 환상을 품은 이들은 보이는 모든 것들이 마치 자기들만의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승리의 전리품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상대에게 입은 상처의 보상심리 이리라.

또 다른 이들은 세상이 종말에 다다른 것처럼 절망의 한숨을 땅이 꺼져라 쏟아낸다. 손등엔 복수의 시퍼런 핏줄이 꿈틀대고, 눈엔 분노의 핏발이 점령했다.

질주하는 열차에서 갑론을박에 휩싸이지 않고 침묵으로 중심을 잃지 않았던 사람들의 표정은 평온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에겐 시간은 시간일 뿐이고 희망과 절망은 오로지 마음속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얼굴이다.

종착역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 각기 다른 상상을 하고 있다. 풍경은 그 누구의 편도 아닌 풍경 그 자체일 뿐이다.

희망과 절망은 자신들의 마음이 지어내는 환상에 불과하다.

종착지는 유토피아도 아니고 절망의 땅도 아니다. 그저 출발역과 다름없다.

거기엔 특별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전의 평범한 시간만이 존재한다.

마치 누구에겐 달콤한 일상이 약속돼 있고 다른 이에겐 형극의 세월이 예비 돼 있다는 생각들인 것 같다.

일상은 일상일 뿐, 누구에게나 특별한 혜택은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지에 따라 시간의 질이 결정된다.

시간의 풍경은 각자의 마음에 따라 달리 보인다. 불경에서 말하는 ‘기억의 평균점수’인 ‘업’(業)의 투영과 같은 것일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는 ‘마음’이 만든 것이다.

이제 ‘희망’과 ‘절망’을, 아니면 ‘관조’를 하는 사람이건 함께 또다시 열차에 올라야 한다. 이는 대한민국이라는 열차에 함께 탄 사람들의 숙명이다.

좋다고 함께하고, 싫다고 배척할 수 없는 공동운명체이다.

열차는 ‘탄핵’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잠시 지친 몸을 추스른 후 다시 어디론가 달려가야 한다.

그 어딘가가, 그 어디일지라도 열차는 달려가야 한다. 그 누구도 승객을 선별할 권한은 없다. 열차의 주인은 열차이고 승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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