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포 출신 재일교포 기업인 황보기 회장

포항시 구룡포읍 성동리 출신인 재일교포 기업인 황보기 회장.

포항시 구룡포읍 성동리에서 태어나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 도일(渡日), 사업에 성공한 황보기(皇甫玘·79) 일본구성기업주식회사 회장은 재일동포로서 고향을 돕는 모범 사례로 손꼽힌다.

그의 고향 사랑과 조상 섬기는 마음은 남다르다. 더구나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으로 화를 당한 영의정 황보인 대감의 후손들인 이들은 서로를 더 각별히 보듬으며 조상을 위하는 마음도 유난히 돈독하다.

황보 회장은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액서원인 광남서원(廣南書院) 성역화 사업비로 수천만원을 냈고, 조상들의 묘소를 정비할 때나 황보씨 문중 일이 있을 때마다 거금을 희사해 오고 있다. 또한 후손들을 위한 장학기금으로 10억여원을 쾌척했고, 포항시장학회에도 1천만원을 출연한 숨은 애국자다. 그는 황보씨의 뿌리를 찾아보는 중국 시안 역사탐방을 계획하고 있는데, 경비 5천만원 전액을 부담할 예정이다.

교포로서 사업에 성공했다고 해서 고향을 위해 거금을 내놓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황보씨 일족들은 그의 이런 고향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그의 송덕비를 준비 중에 있다.

-일본에는 언제 가셨습니까?

"포항 구룡포 성동에서 태어나 세 살 때 부모님을 따라 갔습니다."

-철강사업을 하시는데?

"일본제철소, 니혼 강관주식회사에 20년간 근무했다가 퇴직하고, 다른 사업도 좀 하다가 전공을 살려 구성기업주식회사를 설립해서 운영한지 24년째 됩니다."

-일본인 회사에서 한국인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도 많으셨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렇지요. 수만명 되는 직원 중에 한국인은 나 뿐이었으니까요. 그들 보다 세배는 더 일해야 했습니다. 연구개발도 많이해 '필요한 존재'가 대야 했지요. 그러던 중 포항제철소 설립을 준비할 때 한국 실습생들이 기술 배우러 왔는데 그때 내가 통역을 했고, 그들의 태도도 달라졌어요."

-포스코와도 인연이 있으십니까?

"인연을 맺을 뻔했지요. 포항제철소 준비 당시 박태준씨가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부탁했는데, 아버지께서 반대하셔서 한국에 못왔지요. 그때 아버지는 조총련 고위 간부셨거든요. 나는 후에 민단으로 전향하고 다른 형제들은 북한으로 갔는데, 그쪽에서 고생하는 것 같아요. 물품을 보내면 절반도 전달되지 않았어요."

-전향을 결심하신 동기는 무엇인지요?

"김정일을 후계자로 정할 때였는데, 국민들 굶기면서 권력 세습하는 나라가 어디 있나 싶어 실망하고 탈퇴한 후 민단모국방문단에 따라왔고, 그 후 자주 왔지요. 오랜 세월 고향을 잊은 갚음으로 더 자주 오게 되는 것 같아요. 요즘은 조총련에서 민단으로 전향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한국에는 얼마나 자주 오시는지?

"한달에 한번 꼴은 옵니다. 파주에 있는 지봉(芝峯) 황보인 영의정 묘소 향사 때나 영천 조상묘소 묘사 때 오는 것 까지 하면 연간 스무번 정도 오지요. 본관이 영천인데, 저는 일본에서 영천광웅(永川光雄)이란 이름을 씁니다. 고향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지요."

-그 동안 우리나라가 많이 달라졌지요?

"그렇지요. 처음에 올 때는 한강에서 악취가 나서 코를 쥘 정도였는데 요즘은 우리나라 대단해졌어요. 교포들도 일본에서 자부심을 느끼고 삽니다. 일본인들도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요. 우리 전자제품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제일이 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열심히 일하는 한민족이에요. 황보씨들도 심한 수난의 역사를 겪었지만, 지금은 다들 잘 사는 것 같아요. 옛날보다 향사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많아져서 고향에 오면 기분이 좋습니다."

앞으로 하시고 싶은 일이 파주 선조 묘역이 산이 가팔라서 그 길을 다니기 쉽게 만들고 싶다고 하는 황보 회장. 그의 마음은 언제나 고향과 조상님들에게 열려 있고, 그런 마음은 일본이라는 타국에서 그를 일으켜 세우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황보 회장의 건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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