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I love 미술’ 마지막 칼럼에 석재 서병오(1862~1936)와 관련된 글을 적어본다. 올해가 지나는 현재,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2020서병오 특별전인 ‘석재를 바라보다-수묵의 확장’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어릴 때부터 서병오 선생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필자의 외가 쪽 일송 신석우 큰할아버지와 서병오 선생은 함께 일본에도 같이 여행할 정도의 친분을 가졌다. 오죽하면 어머니와 외삼촌의 이름을 선생께서 지어 주셨다고 했다. 초등학교 시절, 소아과 의사이며 서예가인 우송 신대식 당숙댁을 방문하면 항상 서병오 선생과 관련
현재 생존하는 한국인 미술가 중 가장 비싼 가격에 그림이 팔리는 작가는 현대미술가 이우환 화백이다. 며칠 전 KBS TV에 일본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에 거주하는 이우환 작가의 작품에 관하여 방영되었다. 2016년에도 언론에 알려져 공개된 것이라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 사실로 내용을 좀 더 심층 취재하여 다루었다. 전 국민들이 고가의 미술품 유통이 어떤 루트를 통하여 어떻게 거래 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동안 한국의 메이저 화랑이나 옥션을 통하여 여러 가지 소문이나 사실들이 이번 사건을 통하여 일부분이나마 팩트였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작년 늦가을쯤 에 두 종류의 미술관련 기사가 나란히 신문에 소개되었다. 하나는 한국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의 대표작 ‘우주’가 131억8천 750만원에 홍콩 크리스티경매에 낙찰되어 한국미술품 중 최고의 경매가를 기록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옆의 기사에는 대구 팔공산 옛 모습이 담긴 ‘시화첩’이 발견되었다고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 특별전에 관한 보도였다.전자는 자본시장에서의 현대미술작품의 경매가 관심사 소식이고 후자는 조선시대 민족미술인 시서화의 기록물인 시화첩의 발견과 공개에 관한 한국미술사의 중요한 스토리였다. 미술품이라는 같음과 다
지난 과거가 되살아난다. 1974년 3월, 필자는 대건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첫 미술시간이 되었다. 미술을 지도하는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하기도 하여 기다려지고 있었다.종이 울리고 50대 초반의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강우문.첫 수업은 기초 소묘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빛과 명암, 그림자, 역광 등으로 시작된 수업이었다. 변화된 왼쪽 손가락의 형태를 그리는 스케치 수업이 다음 시간에 이어졌다. 미술실 한쪽의 준비실에 가보니 강우문 선생이 제작하던 인물화의 큰 그림이 이젤에 세워져 있었다. 국전에 추천작
1970년대는 한옥과 국민주택이라고 불리 우는 한국식 양옥이 흔한 시절 이였다. 그러다 보니 약간의 여유가 있는 집은 유화나 수채화류의 서양화보다 동양화나 서예 문인화 작품을 몇 점씩 벽에 걸고 감상하는 것이 동양문화의 문사철(文史哲)에 대해 공감하고 과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대구시내에도 표구사나 작은 상업 화랑이 늘어 갈 때이다. 표구사에 가면 ‘지홍’이라고 수결한 수묵화를 볼 수 있었다. 멧돼지를 표현한 그림과 잉어그림을 특장으로 한 것이 많이 보였다. 그래서 그냥 붓의 용필이 능숙하고 고답적인 표현을 하는 작가의 동양화라고 생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오래된 사물과 시공간 속에 생활해왔다. 예를 들면 태어난 곳에서 한 동네에 지금도 살고 있다. 거주하는 곳도 삼십여 년이 지난 아파트 13층에 살지만 도심 속에 숲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곳이라 아주 만족하며 지내고 있다. 운전하고 다니는 자동차도 연식이 17년째인 올드카 이지만 성능이 뛰어나고 고장이 별로 없어 잘 버티고 있다.최근까지 운영한 학강미술관도 백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택이었다. 멋을 내기 위해 옷을 구입할 때도 고가의 제품보다 중저가를 선호했다. 한번 구입한 옷이나 생활용품은 마르고 닳도록 사용하며
현재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아트페어라는 미술시장이 많이 열린다. 대구도 2002년부터 대구아트엑스포 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어 본격적인 미술품 페어의 시대가 열렸다. 서울의 한국국제아트페어(KIAF), 부산아트페어와 더불어 3대 아트페어 중 하나인 대구아트페어는 미술시장으로서의 역할을 꾸준히 이어왔다.오래 전부터 대구경북은 타 지역에 비하여 미술품을 수장하던 콜렉터들이 많았다. 오죽하면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한국의 귀중한 유물들을 광복 후 바로 일본 동경으로 가져가 오구라 컬렉션을 만들었다. 무거운 석물들은 운반
중국과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기 전인 1982년에 대구의 미술가와 대만의 대중시 미술가들에 의한 한·중 국제교류전이 대만 현지에서 열렸다. 중국본토와 직접 외교관계가 성립되기 전이라 자유중국의 작가들과 대구의 소수 작가들이 참석하였다. 국제교류전이 흔치 않은 시대이기에 지역의 서예, 한국화, 서양화 등 평면미술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 시절 대만에는 국제적 명성을 가진 장대천(1899~1983)과 사종안(1907~1997)이라는 거장이 활동하고 있었다.20세기 대만 최고의 서법대가 사종안에게 품평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대구의 많은 작
1970년대 초 대구시 봉덕동에 위치한 효성여자대학교 미술과에 재직한 목랑(木朗) 최근배(崔根培)교수의 화명을 들어 보았다. 회화전공에는 최근배, 디자인전공에는 봉준호 감독의 부친인 봉상균 교수가 기억에 난다.십여 년 전 목랑 최근배 탄생 100주년 특별전이 수성아트피아 전시실에서 열렸다. 오픈식 날 전시장을 찾았다. 가족들이 수적의 작품들을 잘 보관하여 상태도 좋고 시대별로 정리가 잘되어 있었다. 1934년 일본유학 시절 유화작품부터 1940년대 조선미전에 출품하여 입선된 채색화 작품까지 전시 되어 있었다.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근
필자는 많은 소장품 중 이름부터 독특한 이복 이라는 분의 시화 작품을 가지고 있다. 선친께서 간직한 소품으로 대구의 시인 박훈산의 현대시에 이복이 한국전쟁의 참혹함을 추상표현으로 묘사한 강렬한 그림이다. 이복이라는 화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남산동에 위치한 대건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이다. 오래된 중세유럽풍의 미술실 벽면에 걸린 100호 크기의 추상화를 보았다. 화면 속에 구체적인 이미지는 생략하고 무형상의 회색과 갈색이 합하여 대범하게 표현된 덩어리 형태가 무릇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당시에 누가 그린 것이
1년 가까이 COVID-19와 함께 하였다. 처음에는 중국의 우한지역에서 시작되어 중국 내에서 그칠 것이라 생각한 분위기였다. 이어 급속도로 번져 전 세계가 경악과 공포 속에 죽음과 가까이하게 되었다. 우리지역 대구경북도 국제적 이목을 받은 곳이지만 잘 극복하여 세계의 부러움을 함께하게 되었다. 지금은 서구유럽이나 북미와 남미에 비하여 동아시아 국가들이 대체로 무난히 대처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그동안 서구의 모든 것이 선진국가로 가는 롤모델이라 여겼다. 서구의 사상과 생활방식 등 모든 것을 따라 하기에 바빴다. 허나 되돌아보면
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그 기준에 관한 장소는 계절과 날씨, 시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므로 보편적 사람들이 느끼는 감흥을 주는 장소의 시공간을 말하고 싶다.조선시대 대구의 인물 서거정(1420~1488)은 현재의 오봉산이라 명명된 침산의 정상에 서서 해가 서쪽으로 저무는 낙조를 바라다본 것을 대구10경 중 열 번째로 꼽았다. 조선시대에는 경상감영이 위치한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나아가면 신천과 금호강이 맞닿는 곳이 있다. 흰 모래사장에 다듬잇돌이 많아 침산이라 명명했다. 소가 누운 형상의 침산에는 시
서울의 열정 미술학도로부터 가끔 전화가 온다. “요즈음 신문의 칼럼을 잘 보고 있습니다.” “가을 날, 한국 초현실주의 미술가이신 대구의 박광호 작가에 대하여 관심을 주시면 합니다.” 그가 힘주어 말한 열정과 관심에 대하여 기초자료를 통하여 적어 보고자 한다.박광호(1932~2000)작가는 필자와 가깝게 지낸 적은 없지만 몇 번 만나본 적이 있는 관계로 기억을 더듬으며 회상한다. 1998년도 쯤 이다. DAC대구문화예술회관 내에 자리한 미술협회 사무실에서 박광호 교수를 만났다. 그해의 대구미술대전에 초대작가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간단
며칠 전 아내와 함께 대구 팔공산자락 초입에 위치한 봉무 공원으로 산책을 갔다. 오후 시간이라 느긋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지막한 산과 단산지라 불리 우는 호수가 탄성을 자아냈다. 나도 모르게 와! 하고 절로 감탄하였다. 불로동 고분군의 옛 무덤과 인접한 호수는 조금은 크다고 느낀 면적의 독특한 형태가 한눈에 호기심을 자아냈다.호수의 전체 생김새가 사람 손가락을 펼친 모양으로 못 둑 따라 걷는 길이 시시각각 변화와 새로움을 함께했다. 다른 호수들을 가봤을 때와는 또 다른 이곳의 체험은 상상 이상이었다. 천천히 걸으며 깊은
무더운 여름이 지나갔다. 고미술의 야담과 관련한 글을 연속 적어본다. 1990년 대 초, 저녁이면 가끔 들리는 화랑이 있었다. 오후 6시가 되면 몇몇 사람이 모여서 가벼운 술 한 잔의 시간을 자주 가졌다. 수장가, 거간상, 기업인, 미술가 등 여러 직종의 인사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었다.어느 날 대구 출신으로 서울의 유명한 원로화가에 대한 전설 같은 얘기를 들었다. 이 노화백은 고미술품 수집 중에서도 특별히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우리나라 석물에 유별난 사랑을 가졌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아는 전국의 거간상들은 오래된 화강암으로 된 석물이
2013년 봄, 관광차 대마도에 갔다가 낭패를 당했다. 부산에서 출발하여 이즈하라 항구에 도착하니 음식점이나 상점에 ‘한국인 출입금지’라고 되어있었다. 함께 간 일행들은 그 이유를 잘 몰랐지만 필자는 무엇 때문에 이런지 이곳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몇 달 전인 2012년 10월 초 새벽에 한국인 고미술품 절도범들이 대마도에 있는 3곳의 사찰과 신사에서 불상 2점과 대장경 1점을 훔쳤다. 대장경은 현지에서 버렸고 불상 2점만 후쿠오카로 가져갔다가 다시 부산항으로 들여와 부산·대구·서울에서 팔려고 모색하던 중 검거된 사건이 있었다. 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작 시비는 있어 왔다. 미술작품에 있어서도 예부터 심심찮게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도 글씨나 그림에서 대필이나 모작이 있었다. 조선말기 유명한 서화가들도 자신들 보다 앞선 시대의 대가인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고송유수관 이인문 등을 흉내 내어 가짜를 만들어 사대부에게 팔아서 며칠 동안 유흥을 즐겼다는 기록이 전한다. 근대에 와서도 가르치는 선생의 필치나 색채를 흉내 내어 방품의 서예나 회화작품이 많이 유통된 일이 있다.우리는 추사 김정희의 서예작품이 지금도 버젓이 메이저경매에 나오는 것을 보면 일
필자는 근현대 정치가 중 몽양 여운형의 행적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항일운동을 적극 펼치고 민족의 미래와 한민족의 평화공존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그였기에 해방 후 그가 남긴 미완의 족적에 아련한 아쉬움이 남았다. 10년 전 대구 남구의 고물경매장에서 뜻밖의 묵적으로 인연을 가졌다. 고물을 취급하는 지방의 상인이 가져온 오래된 파지에 초서체 ‘용(龍)’자가 쓰여 있었다. 옆에는 아주 희미하게 빛바랜 인주의 전서체와 예서체로 ‘여운형’ 성명인과 ‘몽양’ 아호인이 찍혀있었다. 기운생동 하는 필체가 범상치 않아 매입하게 되었다. 그때 아무
언제부터 이쾌대(1913~1965)라는 화가를 알고 있었고 세 번이나 놀라움과 감동을 가졌다. 이름부터 남달라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쾌’자가 들어가니 한 번 듣고는 머릿속에 새겨졌다. 이어 경북 칠곡이 고향이며 휴전 후 북으로 넘어갔다는 데 다시 놀랐다. 세 번째는 해금이후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본 그의 대표작 ‘군상’ 대작을 보고 크게 놀라움과 감동을 가졌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가 다시 환생하여 이 곳 대구경북에서 부활한 것 같았다.최근 뉴욕에서 영문으로 첫 발간된 한국근대미술사 서적에서 이쾌대의 자화상 회화작품이 한국 근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전시행사로 대구사진비엔날레가 있다. 그동안 대구는 대표 문화행사로 컬러풀페스티벌이 있지만 공연을 상징하는 행사는 ‘봄에는 뮤지컬, 가을에는 오페라’ 축제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대표 공연축제와 나란히 하는 국제 전시행사가 대구사진비엔날레이다. 하지만 2006년부터 시작된 사진비엔날레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시대의 문화적 키워드를 잘 담지 못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많았다.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를 가졌지만 한국 사진의 본향인 대구경북의 고유한 정신과 텍스트를 시대정신과 결합하여 살리지 못하였다는 비판의 목소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