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의 창립 50주년, 2018년 한 해가 저물어 간다. 반세기를 지탱해 온 포스코 정신(情神)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1968년 4월 1일 포항제철주식회사 창립 때의 이념이 ‘제철보국(製鐵報國·철을 만들어 나라에 보답한다)’이었다면 반세기가 지난 2018년, 최정우 회장체제 출범 이후 비전은 ‘더불어 함께 발전하는 기업시민’을 뜻하는 ‘위드 포스코(With POSCO)’로 바뀌었다. 포스코가 앞으로 100년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이념을 뛰어넘어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로 재무장해...
‘기업의 수명은 30년이다’라는 책이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그렇다. 인간의 수명은 100세 시대로 접어드는 등 점점 늘어나고 있으나 기업은 무한경쟁시대 환경변화로 대기업일수록 30년,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포스코는 올해 반세기를 맞았다. 그것도 청년의 경쟁력을 갖춘 미래지향적 상태에서 50년을 맞게 돼 기업태동의 지역주민들은 직원들만큼이나 감개무량하다. 1)포항과 광양, 지역공동체들의 선물 그래서 포스코 창립 50년을 맞는 2018년, 포항시민들은 많은 축하선물을 준비했었다...
‘제철보국(製鐵報國)’ 의 포스코 50년의 발자취를 되돌아 볼 때 포스코가 반세기동안 대한민국을 세워 온 힘의 원천은 “기술(技術)” 이다. 어깨 너머로 라도 배울 만한 ‘아무 것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오늘날 세계 최고수준의 철강기술력을 갖춘 것은 노력이나 테크닉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포스코만의 ‘정신력’과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할 수 없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50살 포스코, 지금은 명실상한 글로벌 철강사로 자리매김했지만, 설립 초기 영일만 거센 모래바람앞에서는 바람 앞의 작은 촛불. 포항제철소가 건설되기 전까...
포스코에서 기성(技聖)은 장인(匠人)의 표상이자 기술의 상징이다 포스코는 1975년9월, 인력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기능인력이 기능숙달에 정진하는 기풍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품질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기성제도를 도입했다. 기성은 해당분야 최고기능보유자로 기술개발능력과 생산성 향상에 구체적인 공로가 있고, 설비관리능력이 탁월한 근속 15년, 연령 45세 이상의 직원에서 선발된다. 기성의 자격은 퇴직이나 징계처분에 의하지 않고는 소멸 되지않고, 동일분야에 계속 종사하도록 하며, 정년연장등 처우와 신분을 보장했다. 포스코는 19...
1) 지역사회 전 분야에 걸친 협력 ‘돋보여’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 포항과 포스코는 50년 동안 함께 동행하면서 사명변경 등 일시적 갈등을 겪었을 때도 있었지만 반세기 동안의 여정은 대부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위로하고 끌어준 ‘동반자(同伴者)’ 관계였다. 사실 국내 어느 지역, 어떤 사례를 찾아봐도 포스코만큼 지역사회에 대한 협력에 적극적인 기업도 없다. 인근 울산의 경우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SK 등 굴지의 대기업이 지역협력의 짐을 나눠지고 있는 반면, 포항에서는 맏형인 포스코가 지역사회 협력사업 대부분의 역할...
◇회사 이름 바꾸려다 지역사회와 갈등. 2002년 3월 15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는 창사 이래 사용해 오던 회사 이름을 마침내 ‘주식회사 포스코‘ 로 바꾼다. 다음 순서에서 다루겠지만 사실 대한민국 어느 기업을 둘러봐도 포항제철(포스코)만큼 지역협력에 적극적인 기업도 없다. 그러나 오늘날 포스코는 50년, 반(半)세기를 제철소가 소재한 포항과 광양 지역사회와 동행하면서 불가피하게 갈등도 많았다. 바다 위에 제철소를 지어 시민거주지와 멀리 떨어진 광양제철소와 달리 포항의 경우 크게 손꼽아 볼 수 있는 것 ‘갈등’ 사례만 해도...
반석 위에 지어진 집처럼 태풍 불어도 미동도 않던 포항제철이 격동의 칼바람 앞에 서게 됐다. 1968년 4월 포항제철주식회사 창립 때부터 줄곧 포철의 사령탑을 맡아온 박태준 회장이 1992년 10월, 대한민국 철강 4반세기 대장정을 완성한 후 홀연히 회장직에서 물러난 직후부터 4년 4개월가량 포항제철은 정치적 외풍으로 롤러코스트를 탔다. 정확히는 1992년 10월 8일, 박태준의 회장직 사퇴 직후부터 그가 유랑 세월을 접고 다시 포항으로 돌아와 육거리 포항시민회관에서 제1호 포항명예시민증을 받으면서 정계에 복귀할 때 까지다.김...
1)대한민국 철강 4반세기 대장정의 완성 △1968년 4월 1일 포항제철 창립. △1970년 4월 1일 포항1기 종합준공. △1976년 5월 31일 포항2기 종합준공. △1978년 12월 8일 포항3기 종합준공. △1981년 2월 8일 포항4기 종합준공 (조강연산 850만톤 체제) △1987년 5월 7일 광양1기 종합준공. △1988년 7월 12일 광양2기 종합준공. △1990년 12월 4일 광양3기 종합준공. △1992년 10월 2일 4반세기 대역사 종합준공(조강연산 2100만톤 체제) 실로 숨 가쁜 여정이었다. 1992년 ...
2018년 올해가 포스코 창립 50주년이다.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988년, 당시 포항제철은 창립 20주년을 맞는 해. 국가적으로도 올림픽의 서울개최 등 크고 굵직한 일들이 많았지만 포항제철로서도 역사상 가장 많은 변화를 겪었다. 한마디로 다사다난했던 한해였다. 지도에 아예 나타나지 않던 바다 위에 광양제철소를 건설하던 포항제철은 1987년 5월 광양제철소 1기를 준공한 데 이어 여세를 몰아 이듬해 1988년 7월에 광양제철소 2기 종합준공의 감격을 맛본다. 그리고 광양 2기 준공 며칠 전인 1988년 6월 29일 노...
포항제철이 포항 영일만에서 갈고닦은 기술력과 뚝심으로 광양만 바다 위에 광양제철소를 한창 짓고 있을 무렵 포항에서는 새로운 거대 프로젝트에 대한 도전이 진행되고 있었다.철(鐵)로서 나라를 일으켜 세운 경험 위에, 교육으로서 국가에 보탬이 되겠다는 박태준 회장의 오랜 결심이 실천으로 옮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포항제철은 광양제철소 건설 직후부터 포항공과대학교 (포스텍)설립에 시동을 걸었다. 사실 포항제철이 포항지역에 4년제 대학 설립을 구상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 때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가 1980년 광양제철소건설 계획 때부터. 이...
고도성장기의 급증하는 국내 철강수요를 감당키 위해 정부가 추진한 제2제철 실수요자로 선정된 포스코는 영일만의 신화를 광양만으로 이어가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제2제철 실수요자로 지정되었지만 그 입지를 두고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1) 제2제철소 입지, 9년 만에 가로림만→아산만→광양만으로. 제2제철 입지는 1972년부터 시작돼 장장 9년 동안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경제적 효율성을 우선으로 한 수도권 입지와 비수도권 균형발전의 입지시각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제2제철 입지는 낙동강 하류로 결정되었다...
1) 포항 4기 설비 준공, 영일만 역사 마무리. 1980년에도 철강재 공급부족이 심화될 것이라는 전망 아래 포항종합제철은 4기 사업에 착수한다. 포스코는 당초 1975년 5월 3일 포항제철소를 850만톤 규모로 확장하기 위한 3기 사업계획을 작성하여 정부의 승인을 받은 바 있었는데, 1976년 이 사업계획을 수정하여 550만톤 규모는 3기 사업으로, 850만톤 규모는 4기 사업으로 분리했다.4기 건설은 연간 조강생산능력을 550만톤에서 850만톤 규모로 확장하는 사업으로 2차에 걸쳐 진행됐다. 4기 사업의 기본방향이 있었다....
단군이래 최대공사였던 포항제철소 3기 건설은 규모가 컸던 만큼 악전고투와 시련도 뒤따랐다. 특히 1976년 8월에 착공한 3기는 마침 중동 건설붐과 국내 건설시장 확대로 건설인력이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공기 지연이 속출했고 포항제철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건설 비상(非常)’ 선포 등 강력한 대책을 강구했다. 또 당시 정부의 1년 예산과 맞먹는 6,300억원이 투입됐고 매일 2만명이 넘는 인원이 동원됐다.포항제철소 3기 건설과 조업과정에서 발생한 1제강 공장 화재와 발전 송풍설비 부실시공의 폭파는 여러 가지 교훈을 남겼으며 “포...
1기 종합준공의 감격도 잠시, 포항종합제철은 제철소 설비를 점차 확장시켜가면서 조업도 해야 하는 ‘일면 건설, 일면 조업’의 환경에서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최우선사업’ 인 포항제철소 2기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했다. 1)포항제철소 2기의 착공과 준공 대한민국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인 1967년부터 1971년 까지 화학·철강·기계공업 등 공업생산에 역점을 두고 정책을 진행한 결과 연평균 9.6%라는 고도성장을 달성했다. 그 결과 국내 철강재 수요도 급증했다. 1972년 연간 조강수요는 252만 톤이었으나, 계속...
포항제철소는 7·3준공 후 1년 후에야 본격적인 대국민홍보와 함께 지역사회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일만에 빠져 죽자는 ‘우향우 정신’으로 무장한 채 앞만 보고 달려온 그들은 설비가 조업 시작 이후 1년이 지나도록 정상 가동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바깥세상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제철소는 1기 고로 완공 직후 한때 국민의 시선을 받았지만, 여전히 어떤 회사인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1) ‘넝쿨째 굴러들어 온 弘報 대박’ 꽃피는 팔도강산 포항제철 앞에는 1기 설비 준공 후 국민과 지역민을 대상으로 한 ...
1) 경부고속도로 건설비 3배의 제철소 1기, 첫해부터 ‘흑자’ ‘보라 하늘을 향해 치솟는 불꽃 / 여기는 잠자지 않는 일터 / 地軸을 흔드는 우렁찬 소리 / 파도보다 더 높은 젊은 의욕 / 우리는 땀과 양심과 성실을 바쳐 / 새 역사의 바퀴를 떠밀고 간다 / 조국과 인류의 영광을 위해’ 1973년 7월 3일 마침내 영일만에서 연산 103만톤 규모의 종합제철 공장이 준공된다. 포스코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7.3준공’이다. 1970년 4월 1일 착공해 3년 3개월 만에 준공한 이 대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포항종합제철이...
1) 오천 년 한민족 역사의 ‘첫 쇳물’ 1973년 6월 9일. 대한민국에서 용광로를 통해 첫 쇳물이 쏟아지던 날. 사실은 그 쇳물보다 그 역사적인 현장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사람들의 눈물이 먼저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첫 출선(出銑)은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에 이뤄졌다. 박태준 사장을 비롯 제철소 전 임직원은 시뻘건 쇳물을 보자마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불렀다. 물론 며칠 전부터 피 말리는 준비작업이 착착 진행되었다. 6월 7일 제철소 본관 앞 광장에서 박태준 사장은 태양...
1) 드디어 종합착공식, 영일만 가득 힘찬 굉음 울러 퍼져 1972년 본사를 포항으로 이전 1970년 4월 1일 오후 3시. 대한민국의 모든 시선이 포항종합제철소 1기 설비 종합착공식이 열리는 포항으로 집중됐다. 주빈으로 단상에 오른 박정희 대통령, 박태준 사장, 김학렬 부총리가 착공버튼을 누르는 순간, 영일만 가득 힘찬 굉음이 울러 퍼지고 오색찬란한 연기가 피어올랐으며, 잘살아보자는 결의가 大地를 뒤덮었다.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창립 이후 토지보상과 부지조성, 설비와 원료구매, 종합제철 인프라 구축 등 숨 돌릴 틈 없이 달려온...
1968년 4월 1일 창립 이후 1970년 4월 1일 제철소 종합착공까지 2년의 시간은 포항제철의 미래 운명을 결정할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1968년과 1969년은 부지와 기반시설 조성도 긴박했지만, 한편으로 본격가동에 대비한 제철소 설비와 안정적인 원료구매, 그리고 전국에서 몰려 올 근로자들이 안심하고 조업에 집중할 수 있는 숙소와 주택마련도 시급했다. 특히 설비구매는 쏟아지는 각종 외압을 철저히 방어해야 부실시공을 막을 수 있었다. 또한 제철소 창업요원들이 안심하고 대한민국의 大役事에 매진하기 위해서는 ‘보금자리’를 만드...
마침내 영일만 모래벌 종합제철소 건설부지에서 지축(地軸)을 울리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제철소 부지의 기초공사가 항만, 준설, 성토, 정지 이들 4가지 기초공사가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이루어졌는데 도저, 크레인, 페이로더, 덤프, 롤러, 해머…… 이런 중장비 중장비들은 230만 평 구석구석을 누비며 온갖 궂은일을 해냈다. 황무지에 제철소의 터를 닦은 역군이었다 자금조달과 부지확보의 산을 넘고 또 넘어 숨 가쁘게 달려오면서 수십 년에 걸친 대한민국 종합제철건설사업 숙원은 해결됐으나 실제 대역사(大役事)는 지금부터였다. 건설계획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