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경우에는내가 이 세상 앞에서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어떤 경우에는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어떤 경우에도우리는 한 사람이고한 세상이다.[감상] 경우(境遇)와 비슷한 말은 때, 처지, 형편, 사정, 도리가 있다. ‘경우가 아니다’, ‘이것과 저것은 경우가 다르다’처럼 쓰인다. 1연의 ‘경우’와 2연의 ‘경우’, 3연의 ‘경우’는 무엇이 다를까? 시인은 저 시를 시장통에서 주웠다며, 거의 매일 지나다니는 골목의 입간판에 쓰여 있는 글귀를 2연까지는 그대로 옮기고 마지막 연을 추가했다고 한다. “내가 어느 한
휘영청이라는 말 참 좋다어머니 세상 뜨고 집 나간 말누구 제삿날이나 되어 깨끗하게 소제한 하늘에어머니가 걸어놓던 휘영청휘영청이라는 말내가 촌구석이 싫다고 몰래 집 떠날 때지붕위에 걸터앉아짐승처럼 내려다보던 그 달어머니가 글을 몰라 어디다 적어놓지는 않았지만휘영청이란 말 여태 환하다오늘도 누군가를 기다리다고개를 숙이고 돌아오는데마음의 타관객지를 지나 떠오르는 저 휘영청말 한마디 못하고 떠나보낸 계집애의 입 속처럼아직도 붉디붉은 달휘영청이라는 말[감상] ‘휘영청’은 달빛 따위가 몹시 밝은 모양을 나타내는 의태어다. ‘휘+영+청’ 저마다
풀잎은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우리가 ‘풀잎’하고 그를 부를 때에는우리들의 입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그러나 풀잎은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우리가 ‘풀잎’, ‘풀잎’하고 자꾸 부르면,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덧푸른 풀잎이 돼 버리거든요.[감상] 올해 개교한 어느 신설 학교로부터 교가 작사 의뢰를 받았다. 고민 끝에 수락했고, 여러 학교의 교가를 살펴보는 중이다. 7, 80년대식 교가 가사의 가장 큰 특징은 학
뒤뜰 풀섶몇 발짝 앞의 아득한초록을 밟고키다리 명아주 목덜미에 핀메꽃 한 점건너다보다문득저렇게,있어도 좋고없어도 무방한것이내 안에 또한 아득하여,키다리 명아주 목덜미를 한 번쯤없는 듯 꽃 밝히기를바래어 보는 것이다[감상] 나팔꽃이 선명한 포스터라면 메꽃은 은은한 수채화다. 나팔꽃은 아침에 피지만, 메꽃은 한낮에 핀다. 나팔꽃은 잎사귀가 둥근 하트 모양이고, 메꽃 잎사귀는 방패처럼 생겼다. 나팔꽃은 일년생 식물이지만, 메꽃은 여러해살이풀이다. 메꽃은 버릴 게 없다. 나물로도 먹고 밥에 찌거나 구워 먹기도 한다. 특히 메꽃 뿌리는 혈압
산천(山川)은 지뢰밭인가봄이 밟고 간 땅마다 온통지뢰의 폭발로 수라장이다.대지를 뚫고 솟아오른, 푸르고 붉은꽃과 풀과 나무의 여린 새싹들,전선엔 하얀 연기 피어오르고아지랑이 손짓을 신호로은폐 중인 다람쥐, 너구리, 고슴도치, 꽃뱀…일제히 참호를 뛰쳐나온다.한 치의 땅, 한 뼘의 하늘을 점령하기 위한격돌,그 무참한 생존을 위하여봄은 잠깐의 휴전을 파기하고 다시전쟁의 포문을 연다.[감상] 봄을 전쟁에 빗댄 시다. 전쟁(戰爭)의 ‘전(戰)’은 새총 모양의 고대 사냥 도구와 무기인 창이 결합한 글자다. 고대에 사용했던 무기를 나열해 서로
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아이들은 다 안다.살아라,자라라,꽃피워라,꿈꾸어라,사랑하라,기뻐하라,새로운 충동을 느껴라.몸을 내맡겨라!삶을 두려워하지 말라!(하략)[감상] 전국 대표 벚꽃 축제인 진해군항제가 오늘 전야제를 시작으로 4월 1일까지 축제를 연다. 역대 가장 빠른 일정이다. 경주도 오늘부터 대릉원 돌담길 벚꽃 축제가 열린다. 전국이 봄꽃들의 맹렬한 북진에 아름답게 물들어 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헤세의 ‘봄의 언어’를 가슴에 새기면 어떨까.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살아라, 자라라, 꽃피워라, 꿈꾸어라, 사랑하라, 기뻐하라
사물들의 경이로운 진실이것이 내가 매일 하는 발견저마다 있는 그대로의 그것이것이 나를 얼마나 기쁘게 하는지 누군가에게 설명하기란 어렵다.이것만으로 얼마나 충분한지도.완전해지려면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중략)가끔은 돌 하나를 바라본다.돌이 느끼는가를 생각하지는 않는다.돌을 나의 누이라 부르며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는다.대신 나는 그것이 돌로 존재해서 기쁘다.그것이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서 좋다그것이 나와 아무런 관계도 아니어서 좋다때로는 바람이 지나가는 걸 듣는다.그리고 생각한다.바람이 지나가는 걸 듣는 것만으로도 태어날만한 가치가
장사가 끝나면식당 의자는식탁에 올라거꾸로잠이 드네비로소네 발 뻗고반듯한 꿈을 꾸네[감상] 평일 내 루틴은 이러하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 뒤 운동 겸 산책으로 매일 만 보를 걷는다. 영일대에서 마장지를 돌아 여성아이병원 철길숲, 롯데백화점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길 중간에 ‘학산 식당’이라고 닭요리 전문점이 있다. 현지인 맛집이다. 4인 테이블이 6개뿐인 작은 식당이다. 닭개장, 닭국수가 특히 맛있다. 어느 늦은 밤, 장사가 끝난 학산 식당을 지나다가 의자가 식탁에 거꾸로 올라가 있는 게 보였다. ‘식당 의
(상략)밤이 가면 지평은 밝아오고가문 땅은 빨리 물을 빨아들인다.왜 사느냐 그것은 따질 문제가 아니다.사는 그것에 열중하여오늘을 성의껏 사는 그 황홀한 맹목성.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은 자연의 섭리.적설 밑에서도 풀뿌리는 살아남고남쪽에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온다.마른 대궁이는 금년의 화초(花草)땅속에서는 내년의 뿌리[감상] 여섯 살 때 소아마비에 걸린 이후 70년 넘게 철제 산소통 안에서 살면서도 변호사, 작가, 인플루언서로 활동하면서 많은 이에게 희망을 줬던 미국인 ‘폴 알렉산더’가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는 “손이
꽃을 내려놓고죽을힘 다해 피워놓고꽃들을 발치에 내려놓고봄나무들은 짐짓 연초록이다.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 없다는맑은 노래가 있지만꽃 지고 나면 봄나무들제 이름까지 내려놓는다.산수유 진달래 철쭉 라일락 산벚꽃 내려놓은 나무들은신록일 따름 푸른 숲일 따름꽃이 피면 같이 웃어도꽃이 지면 같이 울지 못한다.꽃이 지면 우리는 너를 잊는 것이다.꽃 떨군 봄나무들이저마다 다시 꽃이라는 사실을저마다 더 큰 꽃으로 피어나는 사태를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꽃은 지지 않는다.나무는 꽃을 떨어뜨리고더 큰 꽃을 피워낸다.나무는 꽃이다.나무는 온몸으로
당신에게 엽서를 띄우기 위해 나는 멀리 떠나네 여행지에서 우리는 아름답고기묘한 엽서를 사 오곤 했는데 돌이켜보니 서로에게 엽서를 쓴 적은 없었네엽서에 나는 뒤늦은 사랑을 쓰면서 동시에 엽서에 대해 쓰네 오, 정말, 엽서에상처를 내는 펜촉, 상처를 내지 않고는 이 엽서를 다시 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아네 우리 안의 어딘가가 이미 죽어 있었다면 우리는 더 적절히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 서로에게 덜 기대하고 서로를 덜 파괴하면서 말이야 그러나 상처를 내지 않고는 사랑을 쓸 수 없네 부서져 새로 태어나지 않고는 말이야 슬프
혼자 밥 먹는 사람은 외로워서 강해 보인다기억의 부력은 놀라워서 언제든 기어이 떠오른다너무 오랜 낮잠으로 불어터진 얼굴을 짓이기며스쿠터가 슬리퍼를 끌 듯 지나간 게 전부인 오후다세계가 고요하면 긴장해야 한다목련의 실핏줄이 아프게 터지는 계절인데꽃말처럼 흩어지는 신파를 거두며찻물이 끓는 동안 입술이 식혀야 할 이름이 있다혼자 노래하는 사람은 쓸쓸해서 강해 보인다[감상] 한 일간지에 따르면, 한국에서 1인 가구가 가장 많은 지역은 서울특별시 관악구라고 한다. 지난해 우리나라 2170만 가구 중 1인 가구는 750만 가구로 34%를 넘었
양말이 두리번두리번자기 짝을 찾는다혼자서는 아무 데도 쓸모없으니구멍이 날 때까지 함께 가자고 한다자기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그런 건 다 까먹고오른발 왼발 상관없다고왼쪽 오른쪽 따질 일이 없다고서로가 서로를동그랗게 껴안는다[감상] 기원전 5000년, 동물의 가죽을 발목에 연결하거나 묶어 신발처럼 신던 것이 양말의 시작이라고 한다. 한자어 양말(洋襪)은 ‘서양식 버선’을 가리킨다. 양(洋)은 ‘서양식’, ‘서양의’라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옛날부터 버선을 신었는데, 이것을 ‘말(襪)’이라고 한다. 양말은 발을 보호하고 따뜻하게 유지하는 기
하늘에는 맑은 성좌땅에는 널브러진 피고름 역사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멀다엉금엉금 기어가는당신과 나의 바라밀다 까마득히하늘에는 꽃이 피고땅에는 꽃이 지고[감상] 기상학적으로 봄은 일 평균 기온이 5도 이상 9일간 유지될 때 그 첫날부터를 가리킨다. 내게 봄은 그해 목련을 처음 목격한 날부터다. 매화도 산수유도 개나리도 진달래도 아닌 목련이 꽃망울을 터뜨려야 내겐 봄인 것이다. 해마다 목련을 보며 시상(詩想)을 가다듬는다. 그래서 내게 목련은 숫돌이다. 목련 숫돌! 저 순백의 숫돌에 겨우내 무디어진 상상력과 은유의 칼을 간다. 이선 시
이번에 저 (이바라기 노리코)는(2006)년 (2)월 (17)일 (지주막하출혈)로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습니다.이것은 생전에 써둔 것입니다.내 의지로 장례, 영결식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앞으로 이 집에는 제가 살지 않으니조위품이나 꽃 같은 것들을 보내지 말아주세요.반송 못하는 무례를 더하게 됩니다.“그 사람이 떠났구나”하고 한순간, 단지 한순간생각해 주셨으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오랫동안 당신께서 베풀어주신 따뜻한 교제는보이지 않는 보석처럼, 내 가슴속을 채워서 빛을 발하고내 인생을 얼마만큼 풍부하게 해 주셨는지….깊은 감사와 함
날계란 한 판 속에는 한판의 침묵을 삼킨 부리들, 적막한 부리들이 물고 있는개나리 그늘 수십 평, 그늘 밑에서 심장을 데우는 씨앗의 안간힘, 안간힘으로알을 깨고 나온 김이 오르는 머리통, 보드랍고 촉촉한 머리통 아래에 잡힌 눈주름, 눈주름을 밀면 산초열매같이 반짝이는 까만 눈동자, 아직 어둠을 알아보지 못하는 순진무구한 눈망울 따라가면 말랑말랑하게 뜸이 들고 있는 구수한흙, 잘 익은 흙을 헤집고 싶은 발톱의 근질거림, 뻗대는 잔발들을 달래고 있는알곡의 조바심, 모락모락, 조잘조잘, 비릿비릿한, 갓 태어난 무른 것들을 모르는 척, 침
3월은 두 살 된 아기자빠질 듯 엎어질 듯뒤뚱뒤뚱 오고요4월은 네 살 된 여자 아이사뿐사뿐 생긋생긋웃으며 오지요봄도 봄도 요 때가제일 귀엽고 사랑스럽답니다[감상] 쉽고 단순하고 명료하고 재미있고 즐거워서 저절로 읽힌다. “봄도 봄도 요 때가/ 제일 귀엽고 사랑스럽답니다”는 머릿속에 멜로디가 그려질 정도다. 나도 모르게 몇 번이나 흥얼거리게 된다. 노래로 만들어 봄날, 벚나무 아래서 아이들과 귀엽게, 사랑스럽게 부르고 싶다. 3월은 “자빠질 듯 엎어질 듯/ 뒤뚱뒤뚱 오고요”와 4월은 “사뿐사뿐 생긋생긋/ 웃으며 오지요”를 읽다가 딸의
봄을 빨리 맞으라고2월은숫자 몇 개를 슬쩍 뺐다.봄꽃이더 많이 피라고3월은숫자를 꽉 채웠다.[감상] 올해 첫 동시가 있는 수요일이다. 많은 선생님이 동시가 있는 수요일을 보내달라고 해서 공유 중이다.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에게 시 읽어주는 날을 운영해 보면 어떨까. 매주 특정한 요일에 선생님이 시를 낭송해 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시를 좋아하게 된다. 시를 기다리게 된다. 시는 힘이 세다. 낭송과 암송, 시놀이까지 나아간다면 금상첨화다. 관심이 있는 선생님은 네이버 카페 ‘시와 노는 교실’을 찾으면 된다. 작년에 반 아이들과 서른
(중략)좋지 않은 일들이 한꺼번에 오고좋지 않은 자들이 봄을 밟고 와도눈 녹은 땅에 꽃씨를 심어요지구에서 보낸 한 생의 길에서곧고 선한 걸음으로 꽃을 피워온 그대사랑이 많아서 슬픔이 많았지요사랑이 많아서 상처도 많았지요그래도 좋은 사람에게 좋은 일이 오고어려움이 많은 마음에 좋은 날이 오고눈 녹은 땅에 씨 뿌려가는 걸음마다봄이 걸어오네요꽃이 걸어오네요[감상] 해마다 봄이 오면 꽃시장을 찾는다. 올해는 대구 불로화훼단지를 다녀왔다. 거실에 둘 덩치 큰 식물을 찾다가 역시나, 프리지어를 지나칠 수가 없었다. 프리지어의 꽃말은 ‘당신의
어차피 어차피3월은 오는구나오고야 마는구나2월을 이기고추위와 가난한 마음을 이기고넓은 마음이 돌아오는구나돌아와 우리 앞에풀잎과 꽃잎의 비단방석을 까는구나새들은 우리더러무슨 소리든 내보라 내보라고조르는구나시냇물 소리도 우리더러지껄이라 그러는구나아, 젊은 아이들은다시 한번 새 옷을 갈아입고새 가방을 들고새 배지를 달고우리 앞을 물결쳐스쳐 가겠지그러나 3월에도외로운 사람은 여전히 외롭고쓸쓸한 사람은 쓸쓸하겠지.[감상] 만물이 깨어나는 3월이다. 달력을 보니 경칩(驚蟄)이 내일이고 보름쯤 지나면 춘분(春分)이다. 오늘은 “새 옷”,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