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생(生)의여러 일에 쏠리는 마음을줄여야 한다는 것은,일상에서 해야 할 일을아주 단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삶의 파도에 따라어느 때는 뛸 듯이 기뻤다 우울해졌다 하고,어떤 일에 이득을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다가꼭 갖고 싶었던 무엇을 얻지 못하면당장 창밖으로 뛰어내릴 것처럼 속상해하는본능적인 마음을조심하라는 뜻입니다.이 생의 일들에 덜 몰두한다는 것은삶에서 높은 파도를 만나더라도넓고 깊은고요한 마음을 지킨다는 말입니다.[감상] 윤정은 작가의 『메리골드 마음 사진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가 행복한 순간을 사진으로 굳이 남기
우리이번 봄에는 비장해지지 않기로 해요처음도 아니잖아요아무 다짐도 하지 말아요서랍을 열면거기 얼마나 많은 다짐이 들어 있겠어요목표를 세우지 않기로 해요앞날에 대해 침묵해요작은 약속도 하지 말아요겨울이 와도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돌아보지 않기로 해요봄을 반성하지 않기로 해요봄이에요내가 그저 당신을 바라보는 봄금방 흘러가고 말 봄당신이 그저 나를 바라보는 봄짧디짧은 봄우리 그저 바라보기로 해요그뿐이라면이번 봄이 나쁘지 않을 거예요[감상] ‘봄’은 한 글자라서 이토록 짧은 걸까? 김소연 시인은 『한 글자 사전』에서 봄을 ‘우리가 가장
발명이 어렵다고?길을 접으니계단이 되고계단을 움직이니에스컬레이터가 되고에스컬레이터를 세우니엘리베이터 되었어사진기가 나오니전화기가 나오고컴퓨터도 나오고다 합치니핸드폰 되었어제각각인 줄 알았는데제각각이 아니네처음이 중요해생각을 살짝 바꾸면 돼[감상] 발명의 8계명이란 게 있다. 더하기, 빼기, 크기 바꾸기, 아이디어 빌리기, 모양 바꾸기, 용도 바꾸기, 거꾸로 생각하기, 재료 바꾸기가 그것이다. 이 시는 발명 기법 중에서 가장 많이 활용하는 ‘더하기’와 ‘바꾸기’의 예시다. 자원은 유한해도, 창의는 무한하듯이, 발명의 한계는 끝이 없다
참외를 먹다 벌레 먹은안쪽을 물었습니다.이런 슬픔은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뒤돌아선 그 사람을 불러 세워함께 뱉어내자고 말했는데아직 남겨진 참외를 바라보다가참회라는 말을 꿀꺽 삼키다가내게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먼 사람의 뒷모습은눈을 자꾸만 감게 하는지나를 완벽히 도려내는지사랑에도 뒷면이 있다면뒷문을 열고 들어가 묻고 싶었습니다.단맛이 났던 여름이 끝나고익을수록 속이 빈 그것이입가에서 끈적일 때사랑이라 믿어도 되냐고나는 참외 한 입을꽉 베어 물었습니다.[감상] 경북 성주는 전국 참외 생산량의 80%를 차지하는 국내 최대 참외 생산지다.
아내의 닳은 손등을오긋이 쥐고 걸었다옛날엔 캠퍼스 커플지금은 복지관 커플[감상] 시 「동행」은 대한노인회와 한국시인협회가 공동 주최한 제1회 ‘어르신의 재치와 유머’ 짧은 시 공모전 대상 수상작이다. 60세부터 98세까지 전국 각지에서 투고된 5,800여 편의 응모작 중에서 가려 뽑은 재치와 유머, 지혜가 가득한 100편의 짧은 시를 모은 『살아 있다는 것이 봄날』(문학세계사)이 최근 출간됐다. “누가 나 보고/ 너그러운 분이라 하네// 아내가 들으면/ 댁이 살아봤느냐 하겠지”(「남의 편」, 이송영), “여기는/ 오가는 이 하나 없
봄도 봄이지만영산홍은 말고진달래 꽃빛까지만진달래꽃 진 자리어린잎 돋듯거기까지만아쉽기는 해도더 짙어지기 전에사랑도거기까지만섭섭기는 해도 나의 봄은거기까지만[감상] ‘연두(軟豆)’라는 말이 참 예쁘다. ‘연(軟)’은 연하다, 보들보들하다, 부드럽다, ‘두(豆)’는 콩, 제기(祭器)라는 뜻이다. 완두콩의 빛깔과 같이 연한 초록색(빛)을 연두라고 한다. 그러니, ‘연두=완두콩’이다. 그제 경주 흥무공원에 벚꽃을 보러 갔더니 돌풍에 벚꽃잎이 하릴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쉽기도 해도/ 더 짙어지기 전에” 분홍(粉紅)을 마음에서 내려놓았다.
어느 날이었다.산 아래물가에 앉아 생각하였다.많은 일들이 있었고또 있겠지만,산같이 온순하고물같이 선하고바람같이 쉬운 시를 쓰고 싶다고,사랑의 아픔들을 겪으며여기까지 왔는데 바람의 괴로움을내 어찌 모르겠는가.나는 이런생각을 오래 하였다.[감상] 시인은 “삶이 복잡해지면서 시도 복잡해졌다. 그래서 나는 쉬운 시를 쓰고 싶다”라고 했다. “산같이 온순하고/ 물같이 선하고/ 바람같이 쉬운 시”는 어찌하면 쓸 수 있을까? 법정 스님은 “흙에서 멀어지면 병원과 가까워진다”라고 말씀하셨다. 산에서 물에서 흙에서 멀어지면 인간의 삶은 각박하고 삭
새들은 다른 삶과 섞일 수 있어서 날아간다커피잔 귀를 긁는 방은 혼자의 물과 날짜를 먹는다언제나 깍듯이 울어주는 벽시계가 또 멈춘다새소리가 구르는 기슭은 깊숙한 바위로 멈춘다저녁은 밀가루로 반죽하고 싶은 뒷모습양초의 불안을 강아지에게도 읽어준다묘비명은 언제나 깍듯이 초대장을 보낸다희끗하게 벗어놓은 새소리와 물소리가 겹친다새들은 바람과 창문으로 돌아가려고 한다[감상] 오늘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 날이다. 지역구 254명, 비례대표 46명을 뽑는다. 지난 5일부터 6일까지 진행된 22대 총선 사전투표 총투표율이 31.28%를
나뭇잎은벌레 먹어서 예쁘다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이 예쁘다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별처럼 아름답다[감상] 분임 토의 마지막 시간에 강사가 이 시를 낭송했다.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라는 시구에서 울컥했다. 누군가는 부모님을 떠올렸고 또 누군가는 가족, 친구, 동료를 떠올렸다. 벚꽃이 만개하고 연둣빛 잎사귀가 싱그러운 봄날이다. 저 혼자 푸를
어느 날 내 가슴이 불타면 어쩌나.내 사슴은 어쩌나.깡마른 사슴. 비 맞는 사슴. 눈물 맺힌 사슴. 다리 부러진 사슴. 멍 투성이 사슴. 땅에 파묻힌 사슴. 아빠 없는 사슴. 엄마 없는 사슴.폐에 바닷물이 찬 사슴. 바다가 된 사슴. 자식 잃은 사슴.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밤, 어김없이 마중 나온 사슴. 폴짝 내 가슴 속으로 뛰어드는 사슴. 잠 못 드는 사슴, 때문에 점점 커지는 가슴. 점점 자라는 사슴이사는 사람의 가슴.온몸에 멍이 든 알몸의 네 살배기 아이가 제 손을 과자처럼 선뜻 내민다. 사슴은 잘도 받아먹는다. 꽃잎보다도 작은
어느 날 문득 우리는 정류장에서 만날지 모른다.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는 버스표를 들고서,한번 끊으면 결코 되물릴 수 없는 인생의 티켓을 들고서,그리하여 우리들이 함께 보낸 절대적인 시간도,아침 나절에 피는 나팔꽃처럼 빛나던 우리들의 사랑도,다른 방향을 향해 떠나는 버스처럼 가버릴지 모른다.그리하여, 우리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랑을 하며먼 기억으로 너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네가 나에게, 내가 너에게 했던 수많은 약속을 생각하며소리없이 쓴 미소를 지을지 모른다.한때 그토록 가까웠던 우리가 남이 되었다니![감상] 1994년에 출간된
도란도란 속삭이는 물소리에나뭇잎이 살랑거리면울긋불긋 꽃향기 한입 물고새소리가 날아온다물소리에 마음 젖고꽃향기에 가슴 설레고나지막한 새소리에 시름 달래는여기가 바로 금오산이다[감상] 새내기가 되어 구미 금오산(金烏山) 자락에서 공부 중이다. 아침에는 금오산 명금폭포까지, 저녁에는 금오산 저수지 둘레길을 걷는다. 금오산이 참말 명산(名山)이라는 생각이 든다. 구석구석 보물들을 숨겨둔 산이다. 도선굴도 기이하지만, 기암절벽 속 절경을 품은 약사암도 장관이다. 금오산 정상인 현월봉을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할딱 고개에서 정말 숨이 꼴딱
봄나물이 가득한오일장-이거 얼마예요?-삼천만 원예!-저거는 얼마예요?-오천만 원예!-왜 이렇게 비싸요?-봄값 아잉교!삼천만 원짜리 냉이오천만 원짜리 달래한 봉지씩 사 들고 와냉이된장국, 달래 무침값비싼 봄맛을한 상 차린다봄 내음이 물씬봄값이 제값 한다[감상] 시장(市場)은 시장(詩場)이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시가 있다. 죽도 시장에 갔다가 봄나물 흥정을 했는데 상인이 “삼천만 원예!”, “오천만 원예!” 한다. 냉이 삼천 원, 달래 오천 원어치를 사고 만원을 건넸더니 “자, 거스름돈 이천만 원 받으소!” 한다. 재밌다. 시가
내가 비로 내려땅을 적시고 흙 속으로 들어가어두운 돌 속까지 스며들어당신께 갈 수 있다면당신이 가리킨 산목련 한 송이라도 피워줄 텐데스미는 대로 손을 내밀어얽힌 돌은 거두고 착한 흙은 모아서젖을수록 부드러운 땅을 내놓으면그곳에 따뜻한 햇살이 찾아오기도 할 텐데당신이 잠들면 나는 숨소리 고르며슬픔도 힘이 될 수 있다고토닥이는 빗소리라도 들려줄 텐데상처 없이 살아가기에는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미안하다고그렇게 말해 주며 같이 걸어갈 수 있을 텐데[감상] 배문성 시인이 누군가 싶어 이력을 찾아봤다. 82년 으로 등단한 뒤 89년 첫
벚꽃 그늘 아래 잠시생애를 벗어 놓아 보렴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 놓고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 놓고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 보렴직업도 이름도 벗어 놓고본적도 주소도 벗어 놓고구름처럼 하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저당 잡힌 내일이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알게 될 것이다(하략)[감상] 벚꽃이 개화하려면 600도의 기온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를 ‘600도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2월 1일 이후 일 최고기온 합계가 600도를 넘으면 벚꽃이 핀다는 것이다. 서울은 3월 26일(화)까지 일 최고기온
어떤 경우에는내가 이 세상 앞에서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어떤 경우에는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어떤 경우에도우리는 한 사람이고한 세상이다.[감상] 경우(境遇)와 비슷한 말은 때, 처지, 형편, 사정, 도리가 있다. ‘경우가 아니다’, ‘이것과 저것은 경우가 다르다’처럼 쓰인다. 1연의 ‘경우’와 2연의 ‘경우’, 3연의 ‘경우’는 무엇이 다를까? 시인은 저 시를 시장통에서 주웠다며, 거의 매일 지나다니는 골목의 입간판에 쓰여 있는 글귀를 2연까지는 그대로 옮기고 마지막 연을 추가했다고 한다. “내가 어느 한
휘영청이라는 말 참 좋다어머니 세상 뜨고 집 나간 말누구 제삿날이나 되어 깨끗하게 소제한 하늘에어머니가 걸어놓던 휘영청휘영청이라는 말내가 촌구석이 싫다고 몰래 집 떠날 때지붕위에 걸터앉아짐승처럼 내려다보던 그 달어머니가 글을 몰라 어디다 적어놓지는 않았지만휘영청이란 말 여태 환하다오늘도 누군가를 기다리다고개를 숙이고 돌아오는데마음의 타관객지를 지나 떠오르는 저 휘영청말 한마디 못하고 떠나보낸 계집애의 입 속처럼아직도 붉디붉은 달휘영청이라는 말[감상] ‘휘영청’은 달빛 따위가 몹시 밝은 모양을 나타내는 의태어다. ‘휘+영+청’ 저마다
풀잎은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우리가 ‘풀잎’하고 그를 부를 때에는우리들의 입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그러나 풀잎은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우리가 ‘풀잎’, ‘풀잎’하고 자꾸 부르면,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덧푸른 풀잎이 돼 버리거든요.[감상] 올해 개교한 어느 신설 학교로부터 교가 작사 의뢰를 받았다. 고민 끝에 수락했고, 여러 학교의 교가를 살펴보는 중이다. 7, 80년대식 교가 가사의 가장 큰 특징은 학
뒤뜰 풀섶몇 발짝 앞의 아득한초록을 밟고키다리 명아주 목덜미에 핀메꽃 한 점건너다보다문득저렇게,있어도 좋고없어도 무방한것이내 안에 또한 아득하여,키다리 명아주 목덜미를 한 번쯤없는 듯 꽃 밝히기를바래어 보는 것이다[감상] 나팔꽃이 선명한 포스터라면 메꽃은 은은한 수채화다. 나팔꽃은 아침에 피지만, 메꽃은 한낮에 핀다. 나팔꽃은 잎사귀가 둥근 하트 모양이고, 메꽃 잎사귀는 방패처럼 생겼다. 나팔꽃은 일년생 식물이지만, 메꽃은 여러해살이풀이다. 메꽃은 버릴 게 없다. 나물로도 먹고 밥에 찌거나 구워 먹기도 한다. 특히 메꽃 뿌리는 혈압
산천(山川)은 지뢰밭인가봄이 밟고 간 땅마다 온통지뢰의 폭발로 수라장이다.대지를 뚫고 솟아오른, 푸르고 붉은꽃과 풀과 나무의 여린 새싹들,전선엔 하얀 연기 피어오르고아지랑이 손짓을 신호로은폐 중인 다람쥐, 너구리, 고슴도치, 꽃뱀…일제히 참호를 뛰쳐나온다.한 치의 땅, 한 뼘의 하늘을 점령하기 위한격돌,그 무참한 생존을 위하여봄은 잠깐의 휴전을 파기하고 다시전쟁의 포문을 연다.[감상] 봄을 전쟁에 빗댄 시다. 전쟁(戰爭)의 ‘전(戰)’은 새총 모양의 고대 사냥 도구와 무기인 창이 결합한 글자다. 고대에 사용했던 무기를 나열해 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