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졸업한 시골 초등학교를 찾았다. 고향에 왔지만 부모가 떠나고 없는 빈집 같아 망연자실 서 있었다. 그래도 무언가 내가 거기 있었던 의미를 찾으려 안달이 났다. 맨드라미를 가꾸었던 화단, 동글동글한 열매가 떨어지던 늙은 플라타너스 나무. 쇠 종이 걸려 있었던 지붕의 처마 끝자락. 계란 귀신이 나온다 했던 목조 화장실의 삐걱대던 문…. 이런 자리들은 이미 다 허물어져, 흔적조차 없다. 더듬어볼 기억의 단서마저 흐물흐물. 그렇게 컸던 건물, 넓었던 운동장…. 이제 왜 그리도 왜소해졌는지. 나의 시간과 공간은 대부분 맥락을 잃고...
'사랑합니다. 고객님∼'. 여기저기 귀에 쏙쏙 드는 달콤한 말 천지이다. 듣기 좋은 말에 생각도 달콤하다. 그곳이 낙원이다. 아름다운 언어는 우리를 별세계로 안내한다. 내면 깊은 곳의 미적 영성을 만나게 한다. 피안은 결코 이 땅을 벗어나 있지 않다. 말 한 마디에도 도피안(到彼岸)이다. 언어가 아름다운만큼 내면의 미적 영토가 현현한다. 언어를 갈고 다듬는 일은 시인 문학가만의 일은 아니다. 누구나 살아있는 동안 자신만의 언어를 가꿀 수 있다. 자신만의 세계를 확보하는 일이다. 거기에 자신의 영혼을 단단히 정박시킬 수 있다. ...
카톡은 절간이나 교회처럼 멋있고 고귀해졌다. '까똑…까똑.…까까까까까똑…'하며 울어대는 소리는 천상의 목소리다. 다양한 이모티콘은 희노애락애오욕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미세한 느낌과 감정을 생생한 표정과 제스처로 금방 둔갑시켜준다. 그럴수록 눈앞의 바깥세상은 참 재미없다. 사람들은 별로 서로를 쳐다보려 하지 않는다. 앉으나 서나 거시기 생각뿐. 거시기가 손에서 멀어질까 안절부절. 일부러 만난 모임, 명사를 초청한 강연회에서도 그렇다. 모두 바깥을 눈 여겨 보지 않는다. 귀담아 듣지도 않는다. 그냥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각자 늘 ...
"…아아아 야속타 생각을 말자해도 이렇게 너를 너를 못잊어 운다…" 생각을 말자해도 생각은 난다. 막을 수가 없다. 생각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을 애써 끌고 올 필요는 없다. "그대 무얼 생각는가(問汝何所思)/생각나는 건 저 북쪽 바닷가(所思北海湄)/생각하면 오래 오래 더 그칠 줄 몰라(思之愈久愈不止)/까맣게 혼은 그저 타들어갈 뿐(然然銷魂而已矣)/혼은 이미 다 타버렸지만 다시 생각나(魂旣銷盡思不休)…." 조선 ...
초등학교 때 십리 길을 걸어 다니며 참 많은 고갱이를 뽑아댔다. 길가에 목을 빼든 풀들의 모가지를 비틀어 쏙쏙 뽑아댔으니 정말 참회할 일들이었다. 세상의 모든 고갱이는 살려고 바둥대는 몸부림. 생명의 간절한 뜻(意) 아닌가. 그런데 "세상 정치가 곡식 고갱이 뽑는 짓 아닌 것이 없지" '맹자'의 송인알묘(宋人苗) 대목을 두고 이렇게 내뱉은 사람도 있다. 함석헌이다. 주나라에 망한 은의 후예들이 살던 땅 송나라. 그래서 그들은 늘 바보 취급을 받았다. 덜 떨어진 인간들을 비유할 때 꼭 "송나라 놈들 같으니"란 딱지가 붙는다. 벼...
지금 상자 속에 갇힌 우울한 미스터 대한민국씨를 생각한다. 밖을 내다볼 수도 없고 전망을 상실한 그에게 나는 별 할 말이 없다. 한 마디로 서글프다. 눈만 뜨면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이라는 두 패거리 집단이 사흘이 멀다 찌지고 볶는다. 이런 양극의 사유에 갇힌 우리네 영혼들이 불쌍하다. 이상(李箱)은 소설 '날개'에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말을 내뱉었다. 일제강점기에 시, 소설, 수필 그리고 건축 설계 방면에까지 시선이 닿아 있던 융합적 작가 '이상(李箱)'은 필명이다. '상'은 '상자=박스'이니 '이 상...
가을의 서녘 하늘은 왠지 차가운 듯 따스하다. 아미타불(阿彌陀佛) 생각이 나서다. 무한한 목숨(無量壽)과 무한한 빛(無量光)인 그분은 오랫동안 수행하여 10겁(劫) 전에 이미 부처가 되어 서녘 저 '극락(안락)'이라 불리는 정토에서 설법을 하고 계신단다. 이분을 만나려면 지금 여기서 서쪽으로 십만 억(현대의 숫자 계산으로 친다면 십만 조) 개의 정토를 밟고 지나서야 닿을 수 있단다. 내 발로 걸어서 가기에는 너무 아득하다. 포기하는 것이 맞다. 아, 이런 식이라면 도대체 우리는 언제 가고 싶은 곳에 가 닿을 수 있으랴. 그러나...
資本主義已最高(자본주의 돈이 최고). 대전의 어느 유명대학 벽에 적힌 글귀이다. 누가 일부러 써놓은 것이다. 학생들은 한자를 잘 모르니 그냥 지나친다. 하지만 좀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금방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하필 이 글귀를 적은 이유는 무엇일까. 물어볼 데도 없고 혼자 며칠을 생각해 보았다. 그래, 자본주의 시대에 돈이 최고이지.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오죽 세상이 돈에 목말랐으면 대학 건물의 벽에다 이런 글귀를 써두었겠나. 개인도 돈, 사회도 돈, 대학도 돈, 모두 '돈, 돈, 돈'이다. 어차피 돈 버는 방법...
신청마감, 청약마감, 원서마감, 원고마감…. 휴,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듣는 말이 '마감'이다. 한자로는 '磨勘'이라 쓴다. '갈다'는 뜻의 마(磨) 자와 '헤아리다/조사하여 따지다'는 뜻의 감(勘) 자를 합친 것이다. 옛날 중국에서 '관리의 근무 성적을 심사하는 것' 또는 '향시(鄕試)·회시(會試)의 답안을 재심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마감의 뜻을 찬찬히 헤아려 보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선 마감은 '더 이상은 넘어갈 수 없는 한계선' 즉 '데드라인(deadline)'을 뜻한다. 글 쓰는 사람들은 늘 빚쟁이처럼 마감 ...
"내 인생의 반은 그대에게 있어요. 그 나머지도 나의 것은 아니죠…." 민해경이 부른 '어느 소녀의 사랑이야기'를 부르며 시골의 가을 들판을 걷는다. 그렇다. 내 인생의 반은 이미 땅에 묻었다. 대지에 흩뿌렸다. 그 나머지는 허공속의 장난, 잡사에 바쳤다. 서정주 시인이 '아비는 8할이 바람'이었다고 하듯, 조선 땅의 수컷들은 가을이 더 슬프다. 수확물을 인간에 바치는 대지처럼, 등골을 빼 가족에게 다 바쳐왔다. "타관 땅 밟아서 돈지 십년 넘어 반평생…"처럼 지상의 모든 길손들은 이쯤에서 한풀 꺾인다. 무릎에 바람이 술술 새...
가만히 생각하면 참 재미있다. 어떤 사람은 평생 과거만을 캐면서 밥 벌어 먹는다. 또 어떤 사람은 평생 미래만 생각하며 산다. 또 어떤 사람은 현재에만 오로지 붙들려 있다. 모두들 참 딱하다. 동시대를 살아도 시선 두기는 다 다르다. 정치인들은 주로 과거나 현재 문제에 바빠 미래에 큰 관심이 없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마음은 이미 콩밭에. 정치적 생명 유지가 최우선이니 표 안 되는 미래엔 일단 관심 없다. 기업인들은 현재와 미래 문제에 바빠서 과거 따위에 관심이 없다. 돈 안 되는 일에 시간 투자할 리 없다. 좀 썰렁한 이야기지...
예전에는 자주 불렀던 것 같다. '삼포로 가는 길'. "바람 부는 저 들길 끝에는/삼포로 가는 길 있겠지/굽이굽이 산길 걷다 보면/한 발 두 발 한숨만 나오네…나도 따라 삼포로 간다고/사랑도 이젠 소용 없네/삼포로 나는 가야지" 그런데, 웬일인가. 며칠 전 이 노래를 흥얼대다가 나는 멈칫,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요즘 유행하는 '삼포세대'의 삼포라는 말이 오버랩 되어 너무 슬퍼졌기 때문이다. 사랑·결혼·출산이라는 인생사 핵심인 세 가지를 포기한다는 이른바 '삼포(三抛)'세대. 그들은 꿈도 희망도 접은 청춘들이다. "삼포로 ...
고향에 가도 고향은 없다. 나를 기른 어린 날의 개울도, 나무도, 들판도 서로가 서로를 몰라볼 만큼 달라졌다. 기억 속에서 더 정겨운 고향. 그곳에 가면 고향이 더 안 보인다. '눈 감으면 떠오르는 고향의 강'이란 노랫말처럼, 멀리서 눈을 감을 때 비로소 천천히 보이기 시작한다. '얼굴을 비추는 거울은 매우 많지만 마음을 보여주는 거울은 오직 자기 성찰뿐이다' 라고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말했듯이 '되돌아봄'이 고향을 비추는 거울이다. 고향의 아름다움은 상실감 속에 살아 있다. 망각과 그리움에 남아있다. 정작 들뜬 마음으로 고향 ...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싶은 말이지만 나는 가족들에게 늘 달 같은 존재이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그것도 월급을 바치는 동안만 빛나는 둥근달이다. 아무것도 가정에 가져다 주는 일이 없는 날 나는 달도 뭣도 아니리라. 빛을 잃은 흑암만이 감도는 찬 하늘이 되리라. 월급쟁이가 된다는 것은 의존적인 존재로 산다는 것이다. 갑이 아니라 을이 된다는 말이다. 태양이 아니라 달이 된다는 것이다. 월급을 받는 동안 나는 갑에 의해 은은히 빛나는 달이 되어 살아가야 한다. 가끔 해인 줄 착각하며 하늘에 썰렁 떠 있는 달. 월급은 ...
랭보의 시구는 아리다. "상처입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안 됐으나 가을은 상처에서 먼저 오는 것 같다. 더 버티기 힘든 것, 약한 것, 아픈 것들이 다른 것보다 먼저 물들고, 먼저 붉어진다. 그래서 결국 앞서서 뚝 하고 하직한다. 추석을 앞두고 벌초를 떠나는 행렬을 본다. 앵앵대는 예초기 소리에 알아차린다. '아, 또 가을이구나" 봉분과 그 주변으로 자라난 풀을 깎으며 조상을 생각하는 것. 그것은 내가 바로 '부모가 남긴 몸(父母之遺體)'임을 확인하는 일이리라.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을 지금 내 눈 앞에 다시 호출해 내...
예전의 '먹방'(먹는 방송)이 요즘에는 '쿡방'으로 진화하였다. 쿡방이란 '쿡(Cook·요리하다)'과 '방송'을 합성한 말이다. 단순히 먹는 것이 아니다. 직접 요리를 해보고 함께 즐길 수 있는 방송이다. 따분한 정치 이야기보다도 먹고 사는 즐거움에 푹 빠져가는 세상이 되어간다. 어딘지 모자라는 것 같기도 하나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보인다. 결국 고상한 척 해봤자 삶은 이념보다도 먹고 사는 현실로 향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나라가 나라다운 것은 식색(食色) 즉 음식남녀(飮食男女)를 해결해 주는 일이다. 먹고 마시는...
배호가 불렀던 노래 '황토십리길'을 생각한다. 여기에는 우리 삶 속에서 전해오는 '터벅터벅 걷기'의 형식이 보인다. 그 1절은 이렇다. '돌아오는 석양길에 황혼 빛이 타는데/집을 찾아 가는 길이 멀기도 하구나/올 때에도 십리길 갈 때에도 십리길/터벅터벅 걸어가는 수수밭길에/황소타고 넘는 고개 황토 십리길' 나의 '잃어버린 시간'들. 석양길, 황혼 빛, 십리길, 수수밭길, 황소. 지금 애써 찾아다녀도 만날 듯 말 듯, 아스라한 것들. 내친 김에 2절까지 듣자. '해바라기 그림자도 노을따라 물들고/밥을 짓는 저녁연기 곱기도 하구나...
요 며칠간 다시 그 말이 떠올랐다. 몇 해 전, 잘 아는 한 일본인 교수가 내뱉은 말 한 마디. "한국 사람들은 혼돈(카오스)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말이 자꾸 걸렸다. '혼돈을 두려워 하다니…?' 말이 나왔으니 우선 '어지럽다(어지럽히다)'로 읽는 '난(亂)'자부터 보자. 재미있게도 '다스리다(다스려지다)'는 정반대의 뜻도 갖는다. '아니, 뭐야'라고 할 수 있겠으나 생각해보면 둘 다 맞다. 마치 독(毒) 자에 '독(poison)'이라는 뜻과 함께 '기르다(키우다)'라...
한 때 나는 이미자의 '지평선은 말이 없다'는 노래에 끌렸다. 더 고백하자면 '지평선은 말이 없다. 대답이 없다'는 가사에 붙들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구절을 곱씹는 동안 나는 아득한 지평선 위에서, '과연 나는 무엇인가?'를 묻고 있었다. "나는 깨닫고 나서 열반에 이르기까지 한 마디 입을 뗀 적이 없다(不說一字)"는 석가모니의 고백처럼, 나를 허탕치게 만든 한 구절. 한 대 심하게 두들겨 맞고 멍해지듯, 지평선의 침묵에, 대지의 무언에 수시로 넋을 잃는다. 이것은 육중한 흙더미, 느슨한 초목들의 배치, 아득한 거리 ...
멍석 위, 할머니 곁에 누워 별을 헤던 때가 행복하였다. 길게 꼬리를 끌며 하늘 한편으로 스윽 사라지던 별똥별. 수도 없이 눈을 껌뻑거리다 그만 잠들던 이름 모를 잔별들. 그 보이지 않는 빛들이 내 유년의 눈동자를 길러 주었다. 어느 여름 밤, 문득 나는 하늘과 별 그 너머를 묻고 말았다. 나는 저 별까지 갈 수 있을까. 걸어서, 아니 자전거를 타고. 아니 버스나 기차를 타고. 물론 걸어서나 달려서도 닿을 수도 없는, 저 하늘 끝의 별들에게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리 묻고 저리 물어도 아득하여, 나는 그만 시무룩해져 쫑알대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