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는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탔던이웃집 재택이네 아저씨네마당 앞에 세워진기아 리갈 승용차를보면짬, 짜암하다한다.우리 고모는지금은정동 성 프란치스코 교육원지하 예배당에 있는어릴 적 집에 있던 붉은 피아노를보면짬, 짜암하다한다.나는작년에 전학 간 민우가내 책상 속에 두고 간노란 열쇠고리를보면짬, 짜암하다.[감상] 읽으면서 “짬, 짜암하다”는 ‘참, 짠하다’가 아닐까, 하고 읽었다. ‘짠하다’는 ‘마음이 안타깝게 뉘우쳐져 마음이 조금 언짢고 아프다’라는 뜻이다. 안타깝고 뉘우치고 후회하고 아프다는 뜻이 ‘짜암하다’, ‘짠하다’, ‘찐
오늘은 약을 안 먹기로 한다한 번쯤 안 먹으면 어때 하고포기했다가 혼난 일이 있지만그래도 오늘은환자가 아니고 싶고아무 약도 안 먹겠다는무모한 결심을 해 본다겉으론 태연한 척하지만약을 안 먹고 사는 이들이요즘은 제일 부럽네병원에 안 가도 되는 이들이정말로 부럽네그러나 이 한 번쯤이너무 오래가면 안 되겠지오늘 하루만내가 나를 용서하기로 한다[감상] 이해인 수녀는 2008년 대장암이 발견돼 수십 차례 항암치료를 받았다. 긴 시간을 투병하면서 충실하게 약을 먹는 게 쉽지 않아 주치의에게 자주 혼났다고 한다. “수도 생활을 50년 넘게 했어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요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지 않았어요나는 천 개의 바람이죠나는 불어오는 천 개의 바람이에요나는 눈 위에 빛나는 다이아몬드예요나는 무르익은 곡식 위에 내리는 햇볕이에요나는 부드러운 가을비예요당신이 아침의 고요 속에 깨어났을 때나는 둥근 원을 그리며 하늘로 비상하는 조용한 새예요나는 밤에 빛나는 부드러운 별이죠내 무덤 앞에 서서 울지 말아요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죽지 않았어요[감상] 참담하다. 끔찍하고 슬프다. 교사에게 학교는 무엇인가. 정녕 학교는 ‘꿈을 꾸는’ 곳, ‘희망을 노래하는’ 곳인가. 아직도
넝쿨장미가 담을 넘고 있다현행범이다활짝 웃는다아무도 잡을 생각 않고따라 웃는다왜 꽃의 월담은 죄가 아닌가?[감상]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은 웃는 사람의 것이다. 일소일소 일로일로(一笑一少 一怒一老),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화내면 한 번 늙는다, 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사람이 크게 웃을 때 엔케팔린이라는 호르몬이 나온다. 암 환자의 통증을 완화하는 모르핀보다 300배나 강하다고 한다. 웃음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억제하고 장수 호르몬인 엔도르핀을 분비한다. 억지로 웃어도 효과는 같다. 뇌는 실제 웃음과 가짜
잘 지내요,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내가 하는 말을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나 혼자 듣습니다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꿈속에선 자꾸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폰이시여,내 손안의 작은 왕국에서비밀번호와 패턴이 새로워질수록아무도 풀 수 없도록 하여 주소서카메라 줌이 급식실과 운동장을 잡아당기듯옆 반 그 아이 눈빛을 끌어당겨 주시고오늘 쓸 데이터가 모자라지 않게 하소서내 폰 떨어뜨린 짝꿍을 용서하기 싫으나이번 기회에 새로운 폰이 생긴다면야엄마 구박을 견딜 만한 힘을 주시고아빠 카드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다만 약정 끝날 날을 기다리느라휴대폰 가게 알림판만 보이나이다[감상] 문봄 시인의 첫 동시집 (상상 동시집 20)를 즐겁게 읽었다.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산을 오르다가내가 깨달은 것은산이 말이 없다는 사실이다말 많은 세상에부처님도 말이 없고절간을 드나드는사람도 말이 적고산을 내려오다가내가 깨달은 것은이들이 모두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말이 없는 세상에사람보다는부처님이 더 말을 하고부처님보다는산이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감상] 작년 여름에 혼자 지리산 천왕봉을 오른 적이 있다. 뚜벅뚜벅 오르고 휘청휘청 내려오는 동안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비가 쏟아져 계곡에서 미끄러지고 쥐가 나서 종아리를 움켜잡았지만, 지리산은 말이 없었다. “말 많은 세상”, 그 푸르디푸른 침묵이 그립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한 발 제겨디딜 곳조차 없다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감상] 2023 청포도 문화 축제에 다녀왔다. 이육사의 시 ‘청포도’가 탄생한 포항시 남구 청림동 일대는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포도밭, 삼륜포도원이 있던 곳이다. 1937년, 잦은 옥고로 건강이 나빠진 육사는 요양을 위해 포항 송도에 머무르던 중 삼륜포도원 바닷가 언덕에 자주 올라 영일만 바다를 바라보기 좋아했다고
바닷가에 매어 둔작은 고깃배날마다 출렁거린다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老人)이 되어서중얼거리려고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사노라면많은 기쁨이 있다고[감상] 시인들의 시인, 김종삼 시인의 전집을 읽는다. 김종삼 시인의 시는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읽힌다. 읽을수록 울림이 층위가 다르다. 클래식의 향기가 난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에서 울컥 눈물이 날 것 같다. 서강대 영문과 장영희 교수의 수필집
그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그러면 너는 나에게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 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 서로의 가슴이이를테면 사슴처럼 저 너른 우주의 밭을 돌아 서로에게로 갈 때,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감상] 시인의 시를 읽으며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고마운 ‘그때’가 언제였는지 되돌아본다. 시
나는내 못생긴 코가밉다.꽉 꼬집어 주고 싶도록밉다.그런데엄마는,일을 골똘히 할 때면콧등에 송송송 땀이 맺히는내 코가예쁘단다.꼭 꼬집어 주고 싶도록예쁘단다.[감상] 열등감이란 ‘자기를 남보다 못하거나 무가치한 사람으로 낮추어 평가하는 감정’을 말한다. 콤플렉스, 욕구불만, 강박관념으로도 볼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인간의 성장을 결정하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열등감을 스스로 극복하려는 의지”에 있다고 했다. ‘나’는 “내 못생긴 코”가 밉지만, 엄마는 그런 “내 코가 예쁘단다.” 영화
태풍에 무너진 담을 세우려 목수를 불렀다. 나이가 많은 목수였다. 일이 굼떴다. 답답해서 일은 어떻게 하나 지켜보는데 그는 손으로 오래도록 나무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못 하나를 박았다. 늙은 목수는 자신의 온기가나무에게 따뜻하게 전해진 다음 그 자리에 차가운 쇠못을 박았다. 그때 목수의손이 경전처럼 읽혔다. 아하, 그래서 木手구나. 생각해보니 나사렛의 그 사내도 목수였다. 나무는 가장 편안한 소리로 제 몸에 긴 쇠못을 받아들이고 있었다.[감상] 목공(木工)을 배우면서 집과 직장의 가구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가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바람이 불고비가 올 때도나는 저 유리창 밖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사랑은 가고과거는 남는 것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그 벤치 위에나뭇잎은 떨어지고나뭇잎은 흙이 되고나뭇잎에 덮여서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감상] 시(詩)는 본디 노래였다. 스웨덴 한림원은 밥 딜런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미국의 위대한 대중음악 전통 안에서 시적 표현을 창조했다. 그가 노래의 형태로
여름에는 한두 평 여름밭을 키운다재는 것 없이 막행막식하고 살고 싶을 때 있지그때 내 마음에도 한두 평 여름밭이 생겨난다그냥 둬 보자는 것이다고구마순은 내 발목보다는 조금 높고토란은 넓은 그늘 아래 호색한처럼 그 짓으로 알을 만들고참외는 장대비를 콱 물어삼켜 아랫배가 곪고억센 풀잎들은 숫돌에 막 갈아 나온 낫처럼스윽스윽 허공의 네 팔다리를 끊어놓고흙에 사는 벌레들은 구멍에서 굼실거리고저들마다 일꾼이고 저들마다 살림이고저들마다 막행막식하는 그런 밭날이 무명빛으로 잘 들어 내 귀는 밝고 눈은 맑다그러니 그냥 둬 보자는 것이다[감상] 2
사는 일이 강퍅하여우리도 가끔씩 살짝 돌아버릴 때가 있지만그래서 머릿골 속에 조금 맺힌 꽃봉오리가새벽달도 뜨기 전에 아주 시들어버리기도 하지만부용화나 능소화나 목백일홍 같은 것들은속내 같은 거 우회로 같은 거 은유 같은 거 빌리지 않고정면으로 핀다그래 나 미쳤다고 솔직하게 핀다한바탕 눈이 뒤집어진 게지심장이 발광하여 피가 역류한 거지거참, 풍성하다 싶어 만질라치면꽂은 것들을 몽땅 뽑아버리고 내뺄 것 같은예측 불허의파문 같은폭염 같은깔깔거림이작년의 광증이 재발하였다고파랗게 머리에 용접 불꽃이 인다고불쑥불쑥 병동을 뛰쳐나온 목젖 속에소
옛 신라 사람들은웃는 기와로 집을 짓고웃는 집에서 살았나 봅니다.기와 하나가처마 밑으로 떨어져얼굴 한 쪽이금 가고 깨졌지만웃음은 깨지지 않고나뭇잎 뒤에 숨은초승달처럼 웃고 있습니다.나도 누군가에게한 번 웃어 주면천 년을 가는그런 웃음을 남기고 싶어웃는 기와 흉내를 내 봅니다.[감상] 신라달빛기행을 다녀왔다. 월정교 남문에서 출발해 계림, 반월성, 첨성대 야경을 돌아보는 코스였다. 시원한 여름밤, 은은한 달빛, 별빛, 불빛 그리고 행복한 눈빛이 어우러져 여기저기서 웃음꽃이 피었다. ‘웃는 기와’의 소재는 경주 영묘사 터에서 나온 ‘얼
아들아, 나는 너에게 말하고 싶다인생은 내게 수정으로 된 계단이 아니었다는 것을계단에는 못도 떨어져 있었고 가시도 있었다바닥엔 양탄자도 깔려 있지 않았지그러나 나는 지금까지멈추지 않고 계단을 올라왔단다계단참에도 도달하고모퉁이도 돌고때로는 전깃불도 없는 캄캄한 곳을 올라야 했지아들아, 너도 뒤돌아보지 말고 계단을 오르렴주저앉지도 말고앞만 보고 올라가렴지금은 주저앉을 때가 아니란다쓰러질 때가 아니란다[감상] 20세기 미국 최고의 흑인 시인으로 꼽히는 랭스턴 휴즈는 1902년 미주리주에서 태어났다. 흑인으로서는 드물게 대학 교육까지 받은
바싹바싹 말라가는 마음을남 탓하지 마라스스로 물주기를 게을리해놓고서먹해진 사이를친구 탓하지 마라나긋한 마음을 잃은 건 누구인가일이 안 풀리는 걸친척 탓하지 마라이도 저도 서툴렀던 건 나인데초심 잃어가는 걸생계 탓하지 마라어차피 미약한 뜻에 지나지 않았다틀어진 모든 것을시대 탓하지 마라그나마 빛나는 존엄을 포기할 텐가자기 감수성 정도는스스로 지켜라이 바보야[감상] 7월이다. 달력 6장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마음은 바싹바싹 말라가고, 일은 안 풀리고, 초심은 흔들리고, 모든 게 틀어진 것 같다. 무뎌진 감수성은 외부 자극에 반응이 없다
강으로 내려가 본 적이 있는가새벽 두 시에 홀로강가에 앉아버림받은 기분에 젖어본 적이 있는가어머니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이미 돌아가신 어머니, 신이여 축복하소서사랑하는 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그녀가 태어나지 말았기를 바란 적이 있는가할렘강으로 나들이새벽 두 시한밤중홀로신이여, 나 죽고만 싶어요하지만 나 죽은들 누가 서운해 할까[감상] 랭스턴 휴즈(1902-1967)는 미국의 흑인 시인이다. ‘할렘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렸다. 휴즈는 “처음 시를 쓰면서 내가 시도하고자 했던 것은 블루스 리듬에 맞춰 내 마음속에 그에 걸맞
내가 만일 젊어서 죽거든비 오는 날 질퍽한 풀판 밑저 늙은 소나무 아래 묻어 달라!내 무덤 위에는 비석이 쓸데 없노라.나의 무덤 위에는꽃나무와 푸성귀가 성하리!꽃나무도 풀도 가시덩굴도 그대로 두어 달라!나의 무덤에는 다시 손질 마라!봄에는 꽃이 피고여름에 풀이 파릿파릿 빛나고가을에는 나뭇잎이 떨어지고오 겨울에는 가시가 남아 눈 속에 날카로우리![감상] 오늘은 포은중앙도서관에서 한흑구의 한국문학사적 위상과 업적 재조명사업으로 “한흑구의 나무 그늘에 모여앉아 삶과 문학을 이야기하다”라는 북 콘서트가 열리는 날이다. ‘일제강점기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