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동터 오는산등성이 아침보랏빛 도라지꽃늦잠을 자고 있다곁을 지나던 노루가보랏빛 꿈이 무얼까가만히 들여다보고 간다[감상] 송찬호는 시인은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는 동시”를 쓰고자 한다며, “동화적 상상력이 현실과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는 유효한 창(窓 )의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루가 도라지꽃의 “보랏빛 꿈이 무얼까”라며 호기심을 갖는 순간, 노루와 도라지꽃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그랬듯, 동화의 원심력 안으로 끌려 들어간다. 도라지꽃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다. 도라지 뿌리로 만든 약재를 ‘길경(桔梗
큰형 동생네 우리 식구가 모여어머니 수의를좋은 삼베로 미리 장만하자 상의하였다.다소 시적인 어머니 그 말씀 듣고는그 마음 다 알지만세상이 다 수읜데 그럴 필요 없단다.아침 새소리가 수의였고어젯밤 아버지가 다녀가신 어머니의 꿈이 수의였고그까짓 죽은 몸이 입고 가는 옷 한 벌보다헐벗은 마음이 곱게 입고 가는세상의 아름다운 기억 한 벌이세상 그 어떤 수의보다 더 좋은 수의라며여유가 있다면 마당에 꽃이나 더 심으라 하셨다.그 말씀 후 철마다 여름마당에 수국꽃 환한 수의가어머니 잠든 머리 곁에 곱게 놓여있다.[감상] 불두화(佛頭花) 지고 수
능소화는 그 절정에서제 몸을 던진다머물렀던 허공을 허공으로 돌려주고그 너머를 기약하지 않는다왔다 가는 것에 무슨 주석이냐는 듯씨앗도 남기지 않는 결백알리바이를 아예 두지 않는 결백떨어진 꽃 몇 개 주워 물항아리에 띄워보지만그 표정 모독이라는 것 같다꽃의 데스마스크폭염의 한낮을 다 피었다진다왔던 길 되짚어가고 싶지 않다는 듯수직으로 진다딱 거기까지만이라고 말하는 듯연명치료 거부하고 지장을 찍듯그 화인 붉다[감상] 밀양 ‘제니의 집’은 제종숙 님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다. 소를 키우던 외양간의 대들보와 서까래를 살리고 골동품과 빈티지풍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 태를 드리인 오랑캐의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백 년이 몇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오랑캐꽃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게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감상
내 눈 속에는 돌을 안고 가라앉는 사람이 있지누군가 내 눈꺼풀을 덮어주면흰 천에 덮인 채로 말라간다키에 맞는 나무상자가 곁에 있다목덜미를 끌고 가는 새벽나는 침대 밑에서 오래된 외투를 꺼낸다닿자마자 물크러지는 열매 같아연필로 그린 새가 날아가고창문을 열면 나무와 하늘과 여름이새의 무게만큼 비어 있다나를 엎지르면서 또 한 대의 기차가 지나가고발목을 끊고 그림자도 달아나버리고살짝살짝 어깨를 떨고 있는 고요나는 우산을 접으면서 작아진다[감상] 안희연 시인의 산문집 , ‘삽수’를 읽다가 평화로운 아침 독서 시간에 키득키득 웃었
장미 다발을 들고 비닐하우스에서 나오던 팜티마이 아줌마수학 문제를 설명하던 6학년 2반 이서연 선생님서류 가방을 들고 걸어가던 김유성 아저씨마을버스를 운전하던 박미양 기사님모두들 일하다 잠시 멈춰 서서먼 데 하늘을 보는11시 무렵[감상] 오늘은 학부모 공개 수업이 있는 날이다. 교사도 학부모도 아이도 모두 떨리고 설레고 긴장되는 날이다. 사전에 학부모에게 참관 신청서를 받아보니 3분의 2는 오겠다고 하고, 3분의 1은 사정이 여의찮아서 불참한다고 했다. 공개 수업에 부모님이 온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의 마음가짐은 무엇이 다를까?
매일을 걸어도 그 길이 좋은 것은무심(無心)히 그저 나를 보기 때문이다나무가 나를 바라보듯 볼 수 있다면어떤 옷을 입어도 어떤 신을 신어도무슨 짓을 한다 해도 그저 무심히 보는나무가 나를 바라보듯 볼 수 있다면[감상] 우울증 환자들에게 공통으로 처방되는 요법은 하루 30분 햇볕을 쬐는 산책이다. 몸을 움직이는 산책과 뇌 속 세로토닌을 분비하는 햇볕 쬐기의 조합은 이상적이다. 포항은 걷기 좋은 길이 많은데, 특히 ‘맨발로(路) 30선’이 인기다. ‘맨발로(路)’는 생활권과 가까운 도시숲, 수변공간 등 자연에 조성된 맨발 걷기가 가능한
다소곳한 문장 하나 되어천천히 걸어나오는 저물녘 도서관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말하는 거구나서가에 꽂힌 책들처럼 얌전히 닫힌 입애써 밑줄도 쳐보지만대출 받은 책처럼 정해진 기한까지성실히 읽고 깨끗이 반납한 뒤조용히 돌아서는 일이 삶과 다름없음을나만 외로웠던 건 아니었다는 위안혼자 걸어 들어갔었는데나올 땐 왠지 혼자인 것 같지 않은도서관[감상] 2023 서울국제도서전이 지난주 서울 코엑스에서 열렸다. 그런데 올해는 시작부터 뒤숭숭하다. ‘문학계 블랙리스트’ 관련 소설가를 홍보대사로 위촉한 것에 항의하던 문화예술인들이 황당하게도 대통령실
백록담이라는 말에는 하얀사슴이 살고 있다이곳의 사슴 다 잡아들여도 매해 연말이면 하늘에서 사슴이눈처럼 내려와 이듬해 다시번성하곤 했다는데이제 하얀 사슴은 백록담이라는 말속에만 살고벌써 백 년째 이곳은 지용의 『백록담』 표지에서사슴 모두 뛰쳐나가고 남은빈자리 같아그래도 이곳의 옛 선인들이 백록으로 담근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백록은 어쩌면 동물이 아니라기운에 가깝고뛰어다니기보다는 바람을 타고 퍼지는 것에 가까워백록담, 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백록담』 표지 밖에서 표지 안으로돌아오는 것도 같고하얀 사슴 몇 마리가 백록담 위
지난해 귀여운 딸을 잃었고올해는 또 사랑하는 아들이 떠났네.슬프고도 슬프다, 광릉의 땅이여두 무덤이 나란히 마주 보고 있구나.사시나무 가지에는 오슬오슬 바람이 일고숲속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지전 태우며 너의 넋을 부르며너의 무덤 앞에 술잔을 붓는다.안다, 안다. 어미가 너희들 넋이나마밤마다 만나 정답게 논다는 것.비록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하지만어찌 제대로 자라기나 바랄 것이냐.하염없이 슬픈 노래 부르며피눈물 슬픈 울음 혼자 삼키네.[감상] 난설헌 허초희 생가를 찾았다. 강릉 여행 중에 가장 오래 머문 곳이고 가장 가슴 시린 곳이었다
외할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두부가 500원에 세일하니사러 오라고엄마는 차비가 더 나온다고투덜거리다 전화를 끊었다엄마는 암호도 못 푸는 바보 딸이다두부 세일(보고 싶다)사러 와라(보고 싶다)지금쯤 외할머니는 다음 암호를 연구 중일 텐데걱정이다, 우리 엄마[감상] 신혜영 시인의 첫 동시집 (문학동네)을 읽고 느낀 전체적인 인상은 깨끗하고 깔끔하다는 것이다. 천진난만한 호기심이 엿보이고 건강한 목소리가 들렸다. 반 아이들에게 읽어주고 싶은 흐뭇한 동시가 많았다. 동시집 속의 ‘할머니’는 “화초 잘 키우기로 소문”난, “천 번
옛날에는 생각도 못한 초당을 알아서늘한 초당두부를 알아동짓날 밤선연한 선지를 썰 듯 썩둑썩둑 그것을 썰면어느새 등 뒤로는그 옛날 초당(草堂) 선생이 난을 칠 때면뒷목을 서늘케 하며 일어서던 대숲이 서고대숲을 흉흉히 돌아나가던 된바람이 서고그럴 때면 나는 초당 선생이 밀지(密旨)를 들려 보낸이제 갓 생리 시작한 삼베속곳 일자무식의 여복(女卜)이 된다때마침 개기월식하는 하늘 분위기로가슴에 꼬깃꼬깃 품은 종잇장과비린 열여섯 해를 바꿀 수도 있을 것 같고저잣거리의 육두문자도 오늘 밤만큼은 들리지 않는다 하고밤 종일 붙어 다니는 개새끼들에게
골짝 물소리가 희다아이가 아침의 피아노를 치고 있다연둣빛 고기떼들, 물살에 따라 휘어진다별은 뜨겁고 노래는 깊다갓 낳은 달걀 같은 하루가내 손을 잡는다노래가 있어 고맙다 네가 있어 고맙다노래는 생의 기쁨, 생의 고통별은 어둠이 있어야 빛나는 법짙은 눈썹의왜가리 한 마리먼 숲을 사무치게 바라보는 아침아이가 아침의 피아노를 치고 있다.[감상] 자연주의 피아니스트, 조지 윈스턴이 지난 4일 별세했다. 고등학교 때 그의 피아노곡 ‘‘쌩스기빙(Thanksgiving)’을 듣고 홀딱 반했다. ‘디셈버’(1982)는 내가 처음으로 ‘내돈내산’한
헤어진 사람하고도 그때 좋았을 당시에는 가슴에 프림처럼 감미로운 이야기를 풀어 저으며 따뜻한 눈빛 아래 한잔의 커피가 있었다 추억은 이제 벽에 걸린 찻잔 모양 물기가 마르고 오이씨처럼 풋풋한 눈물로 슬픔도 푸르게 자라던그 시절을 혼자 빠져나와 또 한잔의 커피 앞에 앉는다 갔다, 내가 붙들지 못한사랑의 발목 냉커피처럼 내 가슴을 식혀 놓고 흘러간 그 사람 우리 사이에 남은 쓴맛을 낮추기 위해 나는 처음으로 설탕을 듬뿍 떠 넣는다 이제 그의 이름만 떠올려도 옛 시간은 블랙커피처럼 쓰다 오래전 턱을 괴고 앉아 그를 기다릴 때 나는 무슨
거울이 말한다.보이는 것을 다 믿지는 마라.형광등이 말한다.말귀가 어두울수록 글눈이 밝은 법이다.두루마리 화장지가 말한다.술술 풀릴 때를 조심하라.수도꼭지가 말한다.물 쓰듯 쓰다가 물 건너간다.치약이 말한다.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변기가 말한다.끝났다고 생각한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라.[감상] 여행을 가면 ‘그곳’의 유명한 책방을 꼭 찾아본다. 강릉은 이 ‘그곳’이다. 규모가 꽤 큰 독립서점이었는데 개성 있는 큐레이션과 활발한 문화행사가 돋보였다. 5월, 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1위 칸에 오은 시인
저 빨랫줄 참 길게 눈부시다태양을 널었다가구름을 널었다가오징어 떼를 널었다가달밤이면 은빛으로 날아다니는 갈치 떼를 널었다가옛날에는 귀신고래도 너끈하게 널었다는그래도 아직 단 한 번 터진 적 없는저 빨랫줄한라산과 백두산이가운데쯤 독도를 바지랑대로 세워놓고이쪽, 저쪽에서 팽팽하게 당겨주는참 길게 눈부신저, 한국의 쪽빛 빨랫줄[감상] 한국천문연구원 누리집에 들어가서 생활천문관을 클릭하면 월력요항, 일출일몰 시각계산, 월별 천문현상 등 재미있는 것이 많다. 시민박명, 항해박명, 천문박명이 나오는데 ‘박명(薄明)’은 일출 전, 혹은 일몰 후
TV를 보는데 뉴스가 나왔다전쟁이 나서 폭탄이 터지고사람들이 도망가고애들이 울고연기가 하늘같이 올라가는데탱크가 달려오고난리 난리가 났다금세 장면이 바뀌고광고가 나왔다맛있는 걸 먹으면서깔깔거리며 웃고춤추며 걸어갔다저래도 되나 싶었다[감상] 이나영 주연의 를 재미있게 봤다. 유쾌한 힐링 드라마였다. 4부는 속초의 어느 버스 대합실에서 상인과 설왕설래하던 노인이 호통을 치는 장면이 나온다. “아니 힘들긴 뭐가 힘들다고 그래? 지들이 전쟁을 겪었어? 밥을 굶었어?” 전쟁을 겪은 세대와 베이비붐 세대, X세대와 밀레니엄 세대
나의 생일엔 예쁜 창녀를 선물해줬으면 좋겠다커다란 달 모양의 귀고리를 한 여자, 달에서 온 여자캄캄한 것이 유일한 재능인 여자, 나를 죽여줄 수 있을 것 같은 여자꽃보다 텔레비전을 볼 때 겨우 웃는 여자생일 축하해요, 나를 혓바닥으로 꺼주는 여자눈 내리는 강릉에 가고 싶다고 깡통에 모아둔 게 이십 만원이라고몸무게가 영에 가까우면 좋겠다고, 어차피 천국에 못 가지만눈 내리는 겨울에 대관령 자작나무는 얼마나 아름다운지뼈다귀만 남은 산맥이 허연 입김처럼 눈발을 날릴 때산새들이 날아가고, 덧없이 왜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이유조차 날아가고창
호박 덩굴 아래 길에서달팽이를 만난다둥근 집 등에 지고오늘 이사가는구나?아니요, 학교 가는 길인데요나팔꽃 아래 길에서도달팽이를 만난다학교 가는구나?아니요, 학원 가는 길인데요토란잎 아래 길에서달팽이를 또 만난다학교 갔다 와서 학원 가는구나?아니요, 오늘은 이사 가는 길인데요[감상] 5월에는 반 아이들과 김철순 시인의 를 암송했다. 27명 모두 통과했다. 역시 칭찬과 격려 그리고 작은 선물은 고래(?)도 암송하게 한다. 6월의 암송 시는 송찬호 시인의 다. 아이들이 무척 재미있게 암송하는 동시다. ‘반전’, ‘엉뚱’,
불꽃 쇼가 시작되고 첫 번째 폭죽 터지는 순간 자궁 빠져나올 때 보았던 불꽃 기억하느냐며 희나리 같은 남자가 물었다 수시로 내 머리 위에서 우윳빛불씨 사정하던 땔나무가 아버지의 것이었다면 아궁이 속에서 완전히 연소해버린 나는 한 덩이 숯이다 밥상 뒤엎을 때마다 튀어 오르던 스파크가 엄마의 머리채로 옮겨붙었던 첫 불꽃 쇼는 불행하게도 관객이 없었다 세상의 모든 화약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번갯불처럼 강렬할 줄 알았던 꽃잠이 불량품 폭죽처럼 피씩 바람 꺼지는 소리 내며 밤바다로 사라지던 무렵,스무 살이었다 불쏘시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