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문인 서거정의 대구10경에 남소하화(南沼荷花)라는 시구가 나온다. 남쪽 연못인 남소를 요즈음 연구자들은 현재 영선시장의 영선못 이라거나 성당못 또는 서문시장 자리의 천왕당못 등 여러 설이 있다. 하여간 조선시대부터 알려진 대구 남구의 영선못은 이름 그대로 ‘영선(靈仙)’의 신령한 기운을 품고 있다.일제강점기 시절 남쪽 읍성문 밖에서 남산동을 지나 일본육군관사 거주지 너머 대봉배수지, 수도산과 마태산에 이르면 아래쪽에 영선못이 있었다. 대구부민들의 대표 휴식처였다. 오죽하면 대구사범학교에 다니던 청년 박정희가 급우들과 어울리지 못
약 20여 년 전의 기억을 되살린다. 명덕네거리에서 계명대학교 방향으로 가다 보면 맛집 식당이 있었다. 한정식을 주메뉴로 하는 일반적인 음식점이었다. 이 식당의 입구 계산대 옆 벽면에는 흑백사진으로 제작된 특별한 달력이 몇 년간 걸려있었다. 자주 가다 보니 식당주인과도 자연스레 면을 트게 되었다. 당시 오십대 후반의 주인장은 목소리가 털털하고 눈 모양이 유난히 큰 사람이었다.어느 날 필자는 식당의 흑백 달력에 대하여 물었다. “저 벽면에 붙어 있는 달력에 나오는 흑백사진의 작품은 현장 사실력이 뛰어나네요. 잎사귀 없는 애처롭고 앙상
2010년 7월에 서울 안국동네거리에 위치한 옥션 단에서 경매가 있었다. 집으로 경매책자가 배달 되었다. 펼쳐본 도록에는 깜짝 놀랄만한 전각인보가 소개되어 관심이 갔다. 그것은 대구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상정(1897~1947)장군이 중국에서 독립투쟁을 할 당시에 제작한 ‘청금산방인원 聽琴山房印苑’이었다. 이상정의 인보책자는 총 198엽, 239방의 인장이 찍혀 있으며 1936년 중추절에 중국 남경에서 쓴 자서, 대서, 청남우지, 이상화의 친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민족저항 시인 이상화가 친형인 이상정
대구시내 중심가인 중앙로역 3번 출입구 옆에는 옛 본영당 서점의 건물이 있다. 이곳 건물 입구 윗부분에 대형타일 벽화가 기나긴 시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시민들은 알 길 없는 장식벽화로 여기고 전혀 관심이 없다. 하지만 이것을 제작한 미술가는 다름 아닌 일산 서석규(一山 徐錫珪·1924~2007)화백 이다.최근 서울에서 활동하는 열정 있는 미술학도의 관심으로 SNS상에 소개된 이 세라믹 타일작품은 제목이 ‘황소’라고 알려져 있다. 대구경북의 문화예술 행정가로 잘 알려진 서석규 화백은 1960년 대 당시에, 일찍이 서구 화가들
작년부터 대구 남문시장에 자주 간다. 필자의 그림 그리는 작업실이 시장 부근의 남산동 인쇄골목에 둥지를 틀어서 점심 식사나 저녁 술자리 때 남문시장 안을 기웃거린다. 최근 재개발로 인하여 어수선하게 된 시장 안을 돌아다니다 1970년대부터 보아왔던 대구원로화가 신석필(1921~2017)의 동서미술학원 자리의 옛 간판이 없어진 걸 알고 아쉬움이 남았다.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여도 신석필 선생의 남문시장 안 자택과 동서미술학원 간판이 낡은 채로 녹슨 대문에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신석필 선생과의 인연은 1970년대 후반부터이다
대구읍성은 임진왜란 전 선조 23년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토성으로 쌓았다. 그 후 대구에 경상감영이 설치되자 경상도 감사 겸 대구부사인 민응수에 의해 대구성곽의 요청이 있었다. 영조 12년 1736년 석성의 형태로 착수하여 이듬해 여름 완공하였다고 한다. 그 후 대구는 한반도 남쪽의 정치·경제·문화의 거점도시였다.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까지는 서울, 평양, 대구의 3대 도시였다.시내 중심의 경상감영에서 바라보면 안산에 해당하는 비슬산 줄기인 성불산 즉 앞산은 용의 몸 덩어리가 되어 대구를 지키고 있
서울시 중랑구 사가정로에 위치한 사가정역은 조선시대의 문신 서거정의 호인 사가정(四佳亭)을 인용하여 명명되었다. 지하철 7호선이 지나는 장소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 대구에는 조선 초기 영남의 대표인물로 잘 알려진 서거정을 기념하는 도로나 공원 등은 전무하다.며칠 전 학강미술관에 대경연구원 소속 지인들이 방문하였다. 그 중 한 분이 “서울은 충무로, 을지로, 퇴계로 등 한국의 위인들을 기념하는 도로명이나 장소도 많은데 이곳 대구는 전무 합니다.”라고 하였다. 예를 들면 대구시와 관련된 역사인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천재 고운 최치원을 시
유월은 여름의 시작이다. 대구의 여름은 남부지방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많은 예술가들이 세상에 나왔다가 사라졌다. 그 중 열정이 가득하고 인간미 넘치는 이묘춘(1942~1997) 미술가가 생각난다. 대구MBC 문화방송국에 근무하였다. 미술부장 이었다. 1965년 홍익대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신인예술상전에 장려상을 받았다. 1974년 한국실험작가전과 현대미술 4인전에 참가하였고 80년 프랑스 파리국립방송국 초대 스테이지 미술연수도 하였다.대구에 자리 잡고 제 1회 대구현대미술제와 기타 그룹전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모습이 개성 있고 의로
필자는 봉강서도회에 입회하기 전인 초등학교 시절, 계산성당 입구의 2층 목조건물에 자리한 계산서예원에서 처음 붓을 잡았다. 서예원장은 죽농竹農 서동균徐東均(1903~1978)선생이고 부원장은 죽헌 현해봉선생 이었다.몇 달 후 서예원은 여러 사정으로 인하여 문을 닫았다. 대다수 문하생들은 죽농 선생의 자택인 대봉동 291-6번지인, 지금의 대봉초등학교 뒤편 골목의 한옥으로 배움을 청하러 다녔다. 방 2개에 마루 한 개 딸린 선생의 자택은 큰 방은 선생께서 침식과 함께하는 사랑방 공간이고 작은 방은 항상 두 세 사람의 문하생 연습공간이
요즈음 자주 수성교 옆 방천시장에 간다. 몇 개의 갤러리가 생겼기도 하고 아직도 인간미 넘치는 선술집의 막걸리가 생각나면 시장 안 이곳저곳에서 예술가들과 자주 어울린다.이곳은 필자에게 잊지 못할 추억의 파편이 묻혀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시장 입구 상주한의원 2층 건물의 모습은 사라지고 시장안도 도심재생이라는 명분으로 인하여 많이 바뀌었다. ‘상주한의원’ 이름을 떠올리면 옛 생각의 타임머신을 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오늘날에는 김광석이라는 대구 출신 대중가수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오간다. 허나 나에겐 소헌 김만호라는 스승님의 자
올해도 어김없이 부처님 오신 날이 지나간다. 곧 스승의 날이 다가온다. 수많은 찰나 속에 스치는 만남과 헤어짐이다. 많은 인연들 중 잊지 못할 스승님이 계신다.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50여 년간의 인과 연을 이어오게끔 만들어 주신 분이다. 일찍이 영남서예계의 거목으로 한국서예문화 창달과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신 소헌 김만호(1908~1992)선생 이시다.스승님은 경북 의성군 사곡면에서 출생하셨다. 어린 시절 상주로 이주하여 창랑 김희덕 선생으로부터 서법을 지도받았다. 3·1운동이 일어난 해에는 김도원 선생에게 한문을, 이시발 선생
대구는 산성과 토성의 고장이다. 고대 군사 요충지였다는 사실이다. 삼국시대부터 방어와 보호를 목적으로 생긴 것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만 하여도 20여 군데나 된다. 잘 알려진 것도 있지만 덜 알려진 산성과 토성도 있다.평소 궁금하게 여긴 것이 있다. 대구와 관련된 고문선 중 가장 오래된 통일신라시대의 고운 최치원(857~908 이후)이 지은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수창은 대구의 전신인 수성이다. 알려진 내용으로는 대구 앞산 대덕산 정상의 산성에 누각을 세우고 최치원의 기
며칠 전 대구중심 범어네거리 부근 선술집, 문화예술계 인사와 언론사 기자 등 몇 분과 함께 막걸리 자리를 했다. 술이 거나한 분위기에 하양읍이 고향인 한 분이 “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물띠미에서 바라본 금호강과 경산 하양벌판이다.”고 언뜻 지나가는 소리를 던졌다.그 한마디에 순간 찡하고 느낌이 왔다. 1980년대 초 첫 직장으로 영천 금호에 미술교사로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대구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아양교, 동촌, 반야월, 청천, 물띠미를 지나 하양읍을 거쳐 금호읍에 출퇴근한 추억의 낭만이 회상되었다. 그 시절 버스에 몸
대구경북은 산도 많고 강과 호수도 많다. 오죽하면 대구와 근교지역을 포함하여 물의 도시라 했던가? 1960년대 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못이 제일 많은 곳이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못은 없어지고 택지로 전환되어 도시에는 일부에 적당한 크기의 호수만 있을 뿐이다.몇 년 전 언론을 통하여 청도군 화양읍 고평리에 혼신지라는 아담한 못이 있고, 못 옆에는 혼신지 주택이 있다고 소개되었다. 대구에 거주하는 SPLK 건축사무소 김현진 소장의 솜씨로 디자인된 세컨 하우스였다. 이 건축공간은 국제적사진가 헬렌비네가 몇 일 간 머물며 촬영했다 하여
작년 이맘때 경북 칠곡군 가산면에 수피아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전부터 알고 있는 미술관장 및 관계자와의 인연이다. 이곳은 일단 미술관을 포함한 대지의 규모는 타 공·사립미술관을 압도한다. 더하여 사시사철 둘러싼 환경에서 오는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생태환경과 어우러진 민간정원으로서 전국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듣건대 제3공화국 시절인 1960년대 초 국토건설단 또는 재건대라는 이름으로 시국사범, 부랑인, 군 미필자 등을 동원하여 전국의 오지에 도로건설, 산지개간, 나무심기를 하였다. 여기
1976년 겨울 대구시내 경북대학교 치과대학건물 건너편의 최화실에서 황현욱을 처음 보았다. 얼굴이 조금 검은 황현욱은 바바리코트를 입고 화실에 가끔 나타나 바둑을 두며 이런저런 모습을 보였다. 말수가 거의 없고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였다.안동이 고향으로 서라벌 예술대를 졸업하고 ST 시간과 공간 그룹의 멤버로 활동하다 73년 ‘비오브제’를 타이틀로 명동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74년 제 1회 대구현대미술제에 참가하고 이듬 해 35/128 그룹 창립전을 열었다. 실험미술을 표방하는 젊은 작가그룹으로 대구에서 미술운동을 전개했
1974년부터 1979년까지 더운 여름이면 대구현대미술제가 열렸다. 당시 대구백화점 내에 ‘큐빅’이라는 실내건축사무소가 있었다. 사무실 소장은 박현기였다. 직육면체의 ‘큐빅’이라는 상호는 박현기 작가가 평면이 아닌 3차원의 세계를 다루고자 한 자신의 이미지를 나타낸 핵심 단어였다. 그 조그마한 사무공간은 건축을 전공하고 고향 대구로 와서 자신의 꿈을 펼쳐 보이려는 실험 연구소 같은 장소였다.1942년 오사카에서 출생하여 능인중학교와 대구공고를 거쳐 홍익대를 졸업하였다.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멋을 아는 패셔니스타에 건축가 겸 미술가
대구경북을 대표하는 많은 현대 건축물이 있다. 그 수많은 건물 중 수십 년 동안 아름다운 건축미학을 자랑하는 변함없는 삶의 공간이 있다.경북실내체욱관(현 대구실내체육관), 대구시민회관(현 대구콘서트하우스), 만촌동 영남제일관문, DAC 대구문화예술회관, 경주 화랑의 집, 불국사 복원, 해인사 복원, 부석사 복원, 대전 충무체육관, 춘천실내체육관, 동아쇼핑 백화점, 서울 잠실야구장 등 우리지역 뿐만 아니라 전국의 많은 건축물을 한 사람의 열정과 노력으로 이루어졌다면 대단히 놀라운 사실이 아닌가? 이렇게 많은 멋진 건축물 건립을 진두지
1990년대 초 YS정부시절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이었던 중앙청건물을 없애느냐 존치하느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당시에는 다크 히스토리를 간직한 일본 제국주의 상징건축물은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반면 몇몇 전문가와 필자의 소견은 달랐다. 경복궁을 가로막고 있는 돌로 부착된 르네상스풍의 이 건축물을 그대로 땅속으로 가라앉혀 보존하고자 하였다. 강화유리로 지표면과 투명하게 덮어서 세계적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그러면 자연스럽게 광화문과 경복궁이 연결되고 미래의 후손에게 이 건축물의 아픈 역사를 보여줄
본명이 백종호 이고 예명이 백락종(白樂宗)인 화가이다. 1920년 대구시 중구 인교동에서 태어나 대구수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동상업학교에 5년간 다녔다. 21세 때 일본 동경의 시나가와 사진전문학원에 1년간 연구생을 하였다. 귀국 후 경주에서 사진관을 연다. 경주에서 김준식, 박봉수, 김만술과 함께 4인전을 개최하였다.광복 후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이 개설한 서울의 조선미술연구원에 들어가 5년간 회화를 익혔다. 서울 대원화랑에서 1949년 첫 개인전을 열었고 그 해 대구미문화원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펼쳤다. 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