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선생님도수업 시간에 졸지 모른다졸지만 우리가 모르는 건지 모른다우리 선생님은십 년도 넘게 선생님 했으니까졸면서도 눈 안 감을지 모른다졸면서도 말하고졸면서도 걸어 다니고졸면서도 우리한테 졸지 말라 그럴지 모른다우리 선생님은 진짜못하는 게 없으니까졸면서도 우리를 잘 가르칠지 모른다[감상] 2월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은 삼일절이니까 쉬고 토요일, 일요일 또 쉬면, 3월 4일 월요일부터 2024학년도 첫 등교가 시작된다. 어린이집 신입생, 유치원 신입생, 초등학교 1학년,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들의 입학식을 시작으로 각 학
사람책 빌려준다는사람 도서관에 가니경찰 의사 요리사 과학자 운동선수 영화감독 프로그래머 스튜어디스금박처럼빛나는 사람책 수두룩하다.천국은 도서관처럼 생겼다는데내가 대출하고 싶은 사람책은쭈그렁…….우리 할머니,천국도서관에서 대출하고 싶다.오래오래연체하고 싶다.[감상] 2024 포항시 원북 선정 협의회에 다녀왔다. 시민들이 추천한 어린이, 청소년, 일반부 양서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민의 추천을 받은 저 좋은 책들을 써낸 작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 줄 알기에. 아울러 포항시가 올해 ‘대한민국 독서 대전’
이마에 손바닥을 올리고 눈을 감는다. 아닌 것 같다. 맞을 수도 있다. 병원에는 안 갈 것이다.어떤 것 같아? 사람들이 내 이마를 만지기 시작한다. 이봐요, 뭐라고 말 좀 해봐요. 하나같이 눈을 감고 고개만 갸웃거리네.사람들이 나 때문에 눈을 감을 때. 나는 눈을 크게 뜬다.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그냥 평범한 감기 같아. 비로소 네가 고개를 든다. 그런 것 같애. 한숨을 크게쉬고, 나는 다음 사람에게 간다. 어떤 것 같아?나는 겁이 나지만 마스크는 쓰지 않을 것이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은 늘 혼자있었다.[감상]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워합니다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들은 체하였더니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 그려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하고 물었습니다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감상] 초등학교 5학년 때 청송으로 야영을 갔다. 장기자랑 시간에 그 아이가 ‘해당화’ 독창을 했다. ‘바닷가에서’라는 동
몸의 중심은 심장이 아니다몸이 아플 때 아픈 곳이 중심이 된다가족의 중심은 아빠가 아니다아픈 사람이 가족의 중심이 된다총구 앞에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양심과 정의와 아이들이 학살되는 곳이 순간 그곳이 세계의 중심이다아 레바논이며팔레스타인이여이라크여아프가니스탄이여홀로 화염 속에 떨고 있는 너국경과 종교와 인종을 넘어피에 젖은 그대 곁에지금 나 여기 서 있다지금 나 거기 서 있다[감상] 올해도 종전(終戰)의 희소식은 아득하다. 세계가 포화로 뒤덮여 통곡과 눈물과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있다. 특히,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비
곁을 떠난 적이 있다 당신은 나와 헤어진 자리에서 곧 사라졌고 나는 너머를생각했으므로 서로 다른 시간을 헤매고 낯익은 곳에서 다시 만났다 그 시간과공간 사이, 우리는 서로가 없어도 잔상들을 웃자라게 했으므로 근처 어디쯤에는 그날 흘리고 온 다짐 같은 것도 있었다[감상] ‘곁’은 15세기 문헌에서부터 ‘곁’으로 나타나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진 말이다. 어떤 대상의 옆을 가리키는데 공간적, 심리적으로 가까운 데를 말한다. ‘곁이 많다’는 가까이에서 보살펴 주거나 도와줄 만한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곁을 떠나다’는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헤어진 애인이 꿈에 나왔다물기 좀 짜 줘요오이지를 베로 싸서 줬더니꼭 눈덩이를 뭉치듯고들고들하게 물기를 짜서 돌려주었다꿈속에서도그런 게 미안했다[감상]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에서 “꿈은 은폐되고 왜곡된 소망이 드러나는 곳이다. 그러므로 꿈의 해석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라고 썼다. 이 시에서 화자(話者)는 오이지의 물기를 짜서 돌려주는 헤어진 애인의 꿈을 꾸고는 “꿈속에서도 그런 게 미안했다”라고 고백한다. 베에 싼 오이지 따위도 정성스럽게 “고들고들하게 물기를 짜서” 돌려주는 애인이라면, 그가 어떤 사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지은 지 삼 년밖에 안 된 집을 부득이 헐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지붕을 들어내자 꼬리에 못이 박혀 꼼짝도 할 수 없는 도마뱀 한 마리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 동료 도마뱀이 그긴 시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이를 날라다 주었기 때문이다.[감상] 독자들을 만나면 빠지지 않고 받는 질문이 “시의 소재를 어디서 얻는가?”이다. 내 시의 팔 할은 신문이나 잡지, 책에서 얻는다. ‘좋은 생각’, ‘샘터’ 같은 월간지에서도 많이 얻는다. 나머지는 일상에서 500원짜리 동전 줍듯 가끔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한참 후에 왔다- 왔데이!할머니가 말했다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눈이 파란 아저씨가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먼데이!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버스데이!오늘이 할머니의 생일이라고 생각한서양 아저씨가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해피 버스데이 투 유!할머니와 아저씨를 태운행복한 버스가힘차게 떠났다[감상] 절묘하다. 할머니의 사투리와 서양 아저씨의 영어가 버스정류장에서 스파크를 일으켜 버스 안에서 “해
여자가 아기의 말랑한 뼈와 살을 통째로 안고산후조리원 정문을 나온다 아직아기의 호흡이 여자의 더운 숨에 그대로 붙어 있다빈틈없는 둘 사이에 끼어든 사내가검지로 아기의 손을 조심스럽게 건드려 본다아기의 잠든 손이 사내의 굵은 손가락을가만히 움켜쥔다[감상] 산후조리원 동기를 ‘조동’이라고 한단다. 학부모 상담할 때도 “그 애 엄마랑 저랑 조동”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여동생은 오래전 ‘조동’과 여전히 언니, 동생처럼 지낸다. 혈연, 지연, 학연보다 ‘조동’의 유대감이 더 끈끈한 것은 아이가 자라면서 겪는 갈등과 고민과 어려움을 긴밀하
주인 없는 개, 라는 말을 들을 때 슬프다.주인이 없어서 슬픈 게 아니라주인이 있다고 믿어져서 슬프다.개의 주인은 개일 뿐인 거지.개와 함께 사는 당신은 개의 친구가 될 수 있을 뿐인 거지.이 개의 주인이 누구냐고요?그야 개, 아닐는지?이 개가 스스로의 주인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라면사랑을 아는 좀 멋진 절친쯤 될 수 있겠소만.[감상] “늘/ 강아지 만지고/ 손을 씻었다// 내일부터는/ 손을 씻고/ 강아지를 만져야지” (「반성」, 함민복) 우리는 ‘천오백만 반려인’ 시대에 살고 있다. 반려동물을 위한 호텔, 스파, 유치원, 돌
‘나는 너, 너는 나우리는 한 몸이란다’설법을 듣고 난 동승이 말했다‘알았어요. 하지만 내가 스님일 때보다스님이 나일 때가 많았으면 좋겠어요’[감상] 여시아문(如是我聞)이란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는 뜻으로 아난다가 붓다의 가르침을 사실 그대로 전한다는 의미로 경전의 첫머리에 쓰는 불교 용어다. 모든 불교 경전에 ‘여시아문일시부재(如是我聞一時佛在)’가 첫머리로 붙는 까닭이다. 십수 년 전에 절에 갔다가 마음에 담아온 말씀인데 붓다는 이기심과 이타심을 이렇게 설파하셨다. “모든 괴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일어나긴 했는데잘 때까지 딱히할 일이 없다연상이내 취향인데이제 없어할멈,개한테도 주는 사랑나한테도 좀 주구려[감상] 설 연휴 때 누가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위 시를 낭송했으면 좋겠다. 설 선물로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포레스트북스, 2024) 한 권 사드리면 센스 있다고 칭찬받을 것이다. 이 책은 일본에서 열린 실버 센류(짧은 시) 공모전에서 8년 동안 수상한 작품 중 많은 사랑을 받았던 88편을 엮은 시집이다. 센류란 일본의 정형시 중 하나로 5-7-5의 총 17개의 음으로 된 짧은 시를 말한다. 주로 풍자나 익살이 특징이
늦은 밤,아파트 놀이터에 불빛이 어른거린다.플래시다!으슥한 지하 주차장에도후미진 분리수거장에도플래시다!구석구석 속속들이플래시다!등굣길,아파트 입구에 플래시가 서 있다.“경비원 할아버지, 안녕하세요!”“그래, 은유구나. 학교 잘 다녀오렴.”내 이름을 불러주며플래시가 손을 흔든다.해처럼 달처럼한결같이 우리를 비춰주는플래시다![감상] 인터넷 검색창에 ‘경비원’을 검색하면 ‘올해도 경비원 해고 대란’, ‘반드시 고분고분할 것’, ‘명절마다 상납에 해고까지’, ‘경비원 극단 선택’, ‘아파트 머슴도 아니고’와 같은 기사가 주르륵 뜬다. 동화
산비둘기 두 마리가정다운 마음으로서로 사랑을 하였습니다.그다음은 차마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감상] 요즘 인기 있는 웹툰, 웹소설의 구조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이 아니라 ‘승전기결(承轉結起)’이다.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하는 방법이다. 자소서나 보고서는 ‘결기승전’, 먼저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밝히는 게 대세다. 가수 싸이는 ‘전결전결’ 뮤지션을 꿈꾼다. 다들 배우기는 ‘기승전결’로 배웠지만, 각자 자신만의 호흡과 리듬으로 세상을 향해 스토리텔링을 한다. 옳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아닌가. 프랑스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장 콕토는 학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나에게서 그대에게로 가는 편지는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그대가 가고 난 뒤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감상] 시인은 산책 중에 우체국과 우체통을 보고 느림과 기다림의 의미를 통찰한다. ‘푸른곰팡이’를 배양하여 항생제 페니실린을 얻듯이 ‘산책’, ‘우체국“, ”편지“, ”우체통
사과를 먹는다사과나무의 일부를 먹는다사과꽃에 눈부시던 햇살을 먹는다사과를 더 푸르게 하던 장맛비를 먹는다사과를 흔들던 소슬바람을 먹는다사과나무를 감싸던 눈송이를 먹는다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을 먹는다사과나무에서 울던 새소리를 먹는다사과나무 잎새를 먹는다사과를 가꾼 사람의 땀방울을 먹는다사과를 연구한 식물학자의 지식을 먹는다사과나무 집 딸이 바라보던 하늘을 먹는다사과에 수액을 공급하던 사과나무 가지를 먹는다사과나무의 세월, 사과나무 나이테를 먹는다사과를 지탱해온 사과나무 뿌리를 먹는다사과의 씨앗을 먹는다사과나무의 자양분 흙을 먹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한 잎의 혀로참, 좋은 말을 쓴다미소를 한 육백 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한줄기의 슬픔으로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말물방울 작지만 큰 그릇 채운다는 말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한 송이의 말로참, 좋은 말을 꽃 피운다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전파가 되었다.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누가 와서 나의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 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사랑이 되고 싶다.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라디오가 되고 싶다.[감상] 패러디란 특정 작품의 소재나 작가의 문체를 흉내 내어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수법이나 작품을 뜻한다. 다른 노래에 병행하는 노래란 뜻의 그리스어 ‘파로데이아’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아아, 아직 처녀인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그러나 지금 우리는불로 만나려 한다.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저 불 지난 뒤에흐르는 물로 만나자.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올 때는 인적 그친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감상] 이태준은 수필집 ‘무서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