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대륜고 미술 교사로 1968년부터 1985년까지 재직하며 일생을 독신으로 살아간 김기동 현대미술가의 이야기이다. 대전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하였다. 1960년 미술가협회 창립회원으로 4·19혁명 몇 달 후인 1960년 10월 5일 덕수궁 담벼락에 추상작품을 선보였다. 담벼락 전시의 ‘60년미술가협회전’의 오픈날, 출품 작가와 평론가 여럿이 촬영을 하였다.김봉태, 윤명로, 방근택, 이구열, 박서보 등과 함께 김기동의 당찬 모습도 보인다. 홍익대 4학년 시절에 벌써 아방가르드한 그룹전에 몸을 담았다. 출발은 의기양양함에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국현은 국가미술관이다. 올해는 마이너 장르에 두루 안배했다. 시대의 미적 생산물은 다 검토대상이다. 역사적 맥락에서 정리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전에서 그동안 소외된 서예, 공예, 건축, 등의 광범위한 미술 분야에 대한 관심의 표방으로 생각된다. 맞는 말이다. 최근 몇십 년 동안 한민족 정신의 뿌리인 우리 것에 너무 소홀하였다. 서예는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수 천 년의 역사를 지켜온 대한민국의 대표 미술 분야였다. 오히려 서구에서는 2차 세계대전 후 동양의 서
소식이 왔다. 한국현대조각가 오종욱 작가를 알고 있냐고? 이어 포항시립미술관에서 2월 13일부터 오종욱 기증특별전이 열린다고 한다. 그 소식도 멀리 서울의 어떤 미술학도로 부터였다. 내가 있는 이곳 대구에서는 그의 특별전이 포항에서 곧 열린다는 사실도 거의 모르고 있었다. 대구에서 포항은 가까운 거리로 가끔씩 동해바다가 생각나면 죽도시장, 영일대해수욕장, 포항시립미술관, 구룡포 일본식가옥지역에 나들이한다. 60년대에는 대구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영일대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한 기억이 스친다. 포항사람들의 정다움에 억센 사투리와 함께….
나와 정점식 화백은 40여 년 나이 차이가 있다. 부모님 연령 세대이다. 나에게 극재 정점식 화백은 불가에서 말하는 ‘우연한 인연은 없다’는 말씀이 떠오른다. 정·점·식이라는 세 글자를 인식하게 된 것은 70년대 초부터였다. 계명대학 교수미전에서 추상화 작업을 보고 독특한 표현을 하시는 분으로 인식하였다. 그 후 대구시내 전시장 먼발치에서 가끔씩 만나 뵐 수 있었다. 1977년에 대구백화점 갤러리에서 회갑을 기념하여 계명대학 제자들과 함께한 을 지역에서는 처음 볼 수 있었다. 당시에 이러한 개인전을 겸한 전람
극재(克哉) 정점식(鄭點植·1917~2009)은 아호에서 자신의 자전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극한으로 노력한다’는 뜻을 가진 극재는 화가, 교육자, 수필가, 평론가로서 광범위한 노력을 이룬 예술가였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일평생을 색상 이미지로 볼 때 정점식을 상징하는 색은 회색과 갈색이 섞여진 중간색 톤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상상해본다.성주에서 출생하여 대구 남산동에서 선배 화가인 서동진, 김용조, 서진달, 이인성의 영향을 받고 화가의 꿈을 키웠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중국 하얼빈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였다. 쯔다 세이슈 일본인 교수와
추사는 인복이 많은 사대부 학자였다. 초정 박제가(1750~1805)라는 북학파 석학과의 만남이었다. 1809년 자제군관 자격으로 부친을 따라 연경에 가서 완원과 옹방강 이라는 청나라 문사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다녀온 후부터는 필체가 옹방강과 흡사한 구양순 서체로 변하였다.이어 완원의 ‘완’자를 따서 완당이라 하고 중국이라는 경학의 국제적 보편성에 편승한 학예일치의 경지를 찾았다. 이후 선배인 자하 신위(1769~1847)가 연경에 갈 때도 소개장을 써주며 길잡이 역할을 했다. 대체로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는 서여기인(書如其人)
지난여름 베이징 중국미술관에서는 라는 대규모 전시가 성황리에 열렸다. 1809년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연경인 베이징을 방문한 이래 210년 만에 베이징을 다시 찾은 김정희의 특별전이었다. 30만 관람객이 놀라움을 가졌다. 그 관람객 중 북한 만수대 창작사 길정태관장 왈 추사 선생의 개성은 ‘변화’ 한마디로 압축했다. 실제 추사의 서법은 일생동안 변화와 혁신의 모습이었다.김정희는 충남 예산의 명문가에서 출생하여 일찍부터 신동의 기질로 많은 일화를 담고 있다. 추사 아버지 김노경이 경상도 관
우리가 익히 아는 국민화가로는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가 있다. 사람에 따라 갑론을박이 필요하지만 여기에 이쾌대, 이인성이라는 대구지역 출신의 근대미술가도 포함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화가들은 주로 서양미술사의 인상파, 야수파, 표현주의, 추상주의를 따른 화가이다. 캔버스 전경에 물감과 붓 터치로 아름다움을 표현한 형상예술의 미학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들과 동년배인 곽인식의 경우, 초기에는 이들처럼 화면에 아름다움을 찾고자 인물표현과 초현실주의풍의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처한 환경과 기질이 남달랐을 것이다. 빈곤 속에서도 귀족풍
칼럼을 의뢰받고 우리지역 미술가에 관한 얘기 중 누굴 첫 장으로 꾸며 볼까? 하고 여러 날 고민했다.과거 수십 년 동안 나의 관심사가 된 여러 훌륭한 미술가들이 생각났다. 그중에 최근 대다수의 많은 미술 애호가들에게 관심사가 된 대구시 달성군 현풍 출신의 곽인식(1919-1988) 이라는 재일동포 현대미술가가 단연 떠올랐다.그는 언제부턴가 내 가슴의 한 언저리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과거를 회상해보면 1985년 봄, 대구시내 중심가에 자리한 수화랑에서 약 일주일간 곽인식 초대개인전이 열렸다. 그 시절 미술교사 초년생이었든 난